[프롤로그]

 

새벽 4.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알람도 울리기 전인데 눈이 떠진 것이다. 열린 창문의 방충망 뒤편은 여전히 어두웠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처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비였다. 두두두두. 빗소리는 커다란 소음을 일으키며 대야에 떨어졌다. 첨벙첨벙. 순식간에 그 소리가 변했다. 벌써 대야에 물이 차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 고추에 물은 안 줘도 되겠네.’

도시는 비에 흠뻑 젖었다.

비가 내리면서 어둠살이 깔린 거리엔 왠지 모를 우울함이 바람과 함께 나부끼기 시작했다. 아침이지만 거리의 가로등과 상점들은 다양한 색깔의 빛으로 어둠을 밀어내는 몸짓을 시작했다. 그들만의 빛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빛의 현란함 속에서도 도시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엔 우산을 받쳐 든 사람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7월, 어느 비오는 날 아침

 

폭우 속에 나와 K가 있었다.

내가 커피를 사고 K가 물과 담배를 샀다. 우리들의 루틴은 오늘도 변함이 없었다. 루틴을 마치자 나와 K는 폭우를 뚫고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는 액체이지만 차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고체처럼 선명하게 앞 유리에 부딪혔다. 유성을 출발하여 진천터널을 지날 때쯤에서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겁게 깔린 먹구름은 흰 구름으로 대체되었다.

대관령면에 도착했다.

올해만 4번째 방문이고 평소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3월과 5월에는 하루, 6월에는 3일을 체류했다. 7월에는 5일을 체류할 예정이었지만 비가 와서 4일째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3월은 폭설이 내렸고 5월은 비가 왔고 6월과 7월은 흐렸다. 6월의 낮은 서늘했고 7월의 낮은 해발고도만큼 해가 비치는 곳만 뜨거웠다.

다른 지역보다 여름이 시원하다는 것은 대관령면에 오고 나서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3월, 폭설
3월, 횡계리 배추밭
6월, 능경봉 아래 전원단지
7월,횡계리 배추밭

 

 

[훑어보기]

 

1. 대관령면

대관령면은 대부분이 산악지대이다.

강원도 평창군의 북쪽에 위치하며 강릉시에 인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황병산, 동쪽에는 백두대간 선자령 · 능경봉 · 고루포기산이 있고, 남쪽에는 발왕산이 있고 서쪽에는 매산 · 장군바위산이 둘러싸고 있다. 높은 고산으로 둘러싸인 고위 평탄 분지 같은 모습이다. 한우연구소, 가금연구소, 양떼목장 등 이국적 풍광의 초원이 대관령면 전역에 산재해 있다.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해가 뜨는 듯하다가 안개 같은 구름이 순식간에 뒤덮어 버린다.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다. 여름 기온은 평지보다 4정도 낮다.

 

지르메마을에서 바라본 능경봉과 고루포기산
대관령면
알펜시아 스키점프대

 

2. 대관령

대관령은 큰 고개다.

높은 고개를 뜻하는 관()에 령()까지 붙었으니 높고 험준한 고개였음을 알 수 있다. 대관령은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평창과 강릉의 경계에 있다.

4번 대관령에 왔다.

내가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강릉 방향, 위 주차장)을 찾은 것은 6월에 한 번, 7월에 세 번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변화무쌍한 기후에 놀라곤 했다. 뜨겁게 햇볕이 내리쬐다가도 순식간에 구름에 뒤덮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시내는 맑은데 이곳은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구름이 낮게 드리워지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주차장은 드넓었다.

현재 이곳은 신재생에너지전시관, 평창대관령수소충전소, 대관령숲길안내센터, 대관령유아숲체험관, 공중화장실이 자리하고 있다. 6월말에서 9월말까지를 제외하고는 드넓은 주차장은 한산하다.

서늘함이 느껴졌다.

기온이 다른 지역보다 낮다고 내 마음마저 서늘해지진 않는다. 이곳은 6월 말부터 캠핑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허가된 야영장이 아니다. ‘야영 · 취사 · 쓰레기 투기 금지라는 현수막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음식물을 먹고 있었다.

주차공간이 없었다.

백두대간이나 대관령 숲길을 찾아온 사람들은 주차할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캠핑카, 텐트 등 주차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차량이 70대가 넘었다. 이런 행태는 야간이나 주말에는 100대가 훌쩍 넘는다고 한다. 대부분은 한달이상 장박을 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취사의 위험성, 소음, 쓰레기 투기, 화장실 사용문제 등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었다.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이런 불편을 호소하며 오히려 악성 민원을 넣고 있는 게 현실이다. 후안무치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라고 생각된다.

주차료를 받는 휴게소가 있다.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횡계 방향, 아래 주차장)은 올 초부터 주차료를 받기 시작했다. 최근에 주차료 받는 희한한 휴게소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중앙일보 박진호 기자(7/17, 7/19).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단지, 아래 주차장처럼 위 주차장도 주차요금을 받는다면 캠핑족의 이런 행태는 확 줄었을 것이다.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원만한 해결책을 관계기관에서 하루빨리 찾길 바랄 뿐이다.

 

대관령
6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 ( 강릉 방향 ,  위 주차장 )
7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 ( 강릉 방향 ,  위 주차장 )
7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 ( 강릉 방향 ,  위 주차장 )
7월,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 ( 횡계 방향 ,  아래 주차장 )

 

3. 대관령 국가숲길

대관령에는 국가숲길이 있다.

국가숲길은 산림·생태적,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아 체계적인 운영·관리가 필요한 숲길을 정부에서 지정·고시하고 관리하는 정책이다. 그간 최초 지정된 지리산둘레길, 백두대간트레일, DMZ편치볼둘레길, 대관령숲길과 추가 지정된 내포문화숲길, 울진금강소나무숲길 총 6개소가 국가숲길로 지정되었다.

대관령 국가숲길은 12개 노선으로 약 103km이다.

숲길은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성산면에 걸쳐 있다. 개별노선으로 관리되던 숲길을 대관령의 자연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4개의 주제 순환 숲길(목장코스, 소나무코스, 옛길코스, 구름코스)로 새롭게 구획했다.

 

대관령숲 안내도
대관령 국가숲길 목장코스
올림픽트래일

 

4. 국민의 숲

국민의 숲은 인공조림지다.

대관령 국가숲길 중 개별 숲길에 포함된 국민의 숲은 전나무, 낙엽송(일본잎갈나무), 잣나무, 자작나무, 독일가문비 등이 조림되어 있다. 숲 옆에는 양묘장이 있다. 침엽수가 주종을 이뤄 강력한 살균물질인 피톤치드를 즐기며 걷기에 편안한 숲길이다.

야생화도 다양하다.

은대난초, 동자꽃, 좁쌀풀, 쥐오줌풀, 노루오줌, 은방울꽃, 개쉬땅나무꽃, 고광나무꽃, 산사나무 열매 등 잘 정리된 숲길 주변으로 계절에 따라 야생화가 피고 진다.

숲에 벌레가 없다.

7월 한낮, 무더위에도 숲은 시원하며 모기 등 벌레가 거의 없었다. 국가대표 등 운동선수들의 훈련장으로 활용되는 곳이다.

 

국미의 숲 1
국미의 숲 2
국미의 숲 3
동자꽃

 

5. 등산안내

선자령

백두대간 중심부에 있는 봉우리로 해발고도는 1,157m이다. 강릉시가지와 푸른 동해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초원 위의 풍력발전단지도 장관이다.

능경봉

백두대간에 있는 고산으로 해발고도는 1,123m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고 겨울에는 무릎이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이는 곳이다.

고루포기산

백두대간에 있는 고산으로 해발고도는 1,238m이다. 울창한 숲, 초원지대, 야생화가 조화를 이루어 풍경이 아름답다.

발왕산

대관령면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우뚝 솟아 있고 해발고도는 1,458m이다. 사계절 휴양리조트인 용평리조트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정상에는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의 수백년 묵은 주목 군락과 철쭉이 장관을 이루는 산이다.

장군바위산

칼산, 투구봉과 함께 횡계의 고원지대를 지탱하면서 명성을 지키고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1,140m이다. 보는 방향에 따라 신선바위, 코끼리바위 등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 맑은 물이 흐르는 백일평 계곡을 끼고 있어 청청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칼산

횡계리를 기점으로 하여 차항리와 용산리 사이의 산으로 해발고도는 941m이다. 참나무숲 사이로 스키점프장과 알펜시아스키장이 보이고 정상에서는 이국적인 풍력발전소와 드넓은 초지가 펼쳐진다.

 

대관령면 등산 안내도
발왕산 엄홍길 숲길 입구
능경봉 등산로 입구

 

1년 전 이맘때에 인제를 갔었다.

어느 지역을 간다고 말하는 순간 여행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나는 오늘 인제에 간다. 늘 만나던 노은동 약속장소에서 K형과 만났다. 이른 아침이라 단골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선택된 곳이 파리바게뜨였다. 장거리 여행을 하기 전 승용차에 휘발유를 넣듯 커피는 우리에게 에너지를 제공한다.

월요일인데도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유성에서 출발하여 청주, 오창, 진천, 충주, 홍천을 거쳐 인제로 향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후텁지근하게 느껴지던 바깥 기온은 점점 내려갔다. 아침 하늘은 아이가 생떼를 부린 듯 흐렸다.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처럼 엷은 먹색 구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입김을 세게 불면 엷은 먹색 구름이 흩어져 맑은 하늘이 나올 것 같았다.

 

통영 바닷가의 하늘

 

1년 만이다.

원통에 있는 다들림막국수에 왔다. 과속도 하지 않았는데 약속 시각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일행을 기다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입구에 간판이 없었더라면 그냥 시골의 여느 집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작년에 왔을 때도 이곳이 식당이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현관 앞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식당의 수호신처럼 자리하고 있다.

맛집이 없는 고장은 없다.

인제에 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막국수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인제에 오면 막국수를 먹고 있다. 막국수는 춘천이 아니라 인제에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제에는 막국수 맛집이 여러 군데 있는데 그중 합강막국수, 다들림막국수, 방동막국수, 옛날원대막국수를 추천하고 싶다. 식당마다 고유의 육수 제조법이 있어 막국수 맛이 다 다르다.

 

다들림막국수
식당내부

 

비빔 막국수 3, 물 막국수 1, 편육 주세요.

내가 인제에 올 때마다 물 막국수를 먹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 모닝커피를 마시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행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미리 주문했다. 점심시간 전이라 식당에는 우리만 있었지만 금방 모든 자리가 다 찰 것이다. 면을 뽑는 기계음이 들리고 주방의 분주한 움직임은 다양한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모든 음식은 색감이 있다.

음식은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맛이 달리 표현된다. 맛으로 표현되는 음식은 주관적이지만 색감으로 표현하는 음식은 객관적이라 더 좋다. 두부는 노르스름하고, 수육은 밝은 회색을 띠고, 상추는 녹색이고, 김치는 빨간색이다. 막국수의 달걀은 하얗고, 오이는 밝은 연두색이고, 면은 옅은 자색이고, 김 가루는 까맣다.

 

두부
편육(15,000원)과 기본반찬
물막국수 7,000원
비빔막국수 8,000원

 

막국수를 먹으면 좋은 이유가 있다.

물 막국수는 시원하고 비빔 막국수는 매콤하다. 비빔 막국수를 먹다가 육수를 넣어 물 막국수로 먹을 수도 있다. 면은 탱탱하지만 부드럽고 얼린 살얼음 육수가 시원하다. 막국수를 먹으면 덤으로 편육(수육)까지 먹게 된다. 과식과 폭식을 해도 배가 더부룩하지 않다. 식후 금방 배가 꺼져 또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막국수를 먹으면 온몸이 서늘해진다.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개인적인 취향을 고려하여 식당마다 양념을 따로 준비해 두고 있다. 막국수에 설탕, 식초, 겨자, 들기름을 넣는 것에 대한 고민은 행복한 고민이다. 막국수를 먹는 순간만큼은 모든 일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막국수를 먹는 행위에 마음을 다하고 색감을 즐기며 먹으면 된다. 그냥 천천히 육수를 마시면 머릿속의 번잡함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막국수를 먹은 뒤 카드로 계산을 했다.

은행 계좌에 존재하는 돈이지만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돈을 사용했다. 존재하지만 사용할 때는 없는 돈을 쓴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무엇을 먹고 다니든지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의 총량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옛날원대막국수
곰취수육 20,000원
곱배기 막국수 10,000원

 

한계령을 넘었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도시 생활로 찌든 내 안의 번뇌를 깨끗하게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내 모든 발걸음에 선명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걸어온 발자국이 아쉽지 않게.

도로에 한여름 냄새가 난다.

한낮의 불볕더위가 공기를 뜨겁게 달궈 시큼한 냄새가 난다. 살아 있는 식물은 메말라 앙상해지고 그림자의 그늘은 점점 좁아진다. 햇빛의 딱딱함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원통에서 한계령을 넘어 필례약수에 왔다.

이곳에 인제 천리길이 있다. 길에도 목적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인데 목적 없이 만들어진 길이라면 쓸모없는 길이 되고 만다. 더군다나 걷는 사람에게 허무감을 주기 쉽다.

 

한계령
한계령휴게소
점봉산 자락(오색방향)

 

지난주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불볕더위라 낮에 햇빛을 받으면 그늘을 찾게 된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천둥소리와 함께 먹장구름이 산릉선을 넘어와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졌다. 눈앞의 사물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렸다.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끄듯 리모컨으로 비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인제에서의 밤은 길었다.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고 술자리가 이어졌다. 늘 보는 사람들이지만 마치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처럼 밤늦게까지 왁자지껄했다. 밤이 길었던 만큼 아침은 금방 찾아왔다. 산을 감싸고 있는 안개 같은 흰 구름이 산들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아침 기온은 높았으나 체감온도는 훨씬 낮게 느껴졌다.

 

인제 전통시장

 

인제의 산은 푸르다.

푸른 숲, 내가 찾아간 필례약수의 주변 숲도 푸르렀다. 불볕더위를 이겨낸 찰피나무와 까치박달 나무가 열매를 흐드러지게 맺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필례약수를 가다 보면 찰피나무 가지 틈으로 맑은 하늘이 숨어 있다. 구름을 뚫고 빛이 대지에 닿으면 음지가 사라지고 양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양지는 음지를 없애버린다. 마치 음지는 가짜이고 양지가 진짜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낮의 따가운 햇볕이 도로 위로 쏟아졌다.

햇빛이 장맛비처럼 강렬하게 내비친다. 햇빛을 머리에 이고 걷자니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진다. 아지랑이가 꿈틀거리는 필례계곡에는 사람들이 나무 그늘서 삼삼오오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필례계곡
필례약수
찰피나무
까치박달나무

 

숲속에 앉아 계곡을 흘러가는 물을 바라봤다.

굳었던 몸이 이완되면서 마음마저 차분해진다. 내 호흡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내 안의 계곡 속에 빠져들었다. 세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편안함이 나에게 찾아들었다. 맑은 물처럼 내 의식도 점점 맑아지고 있다.

이곳만큼 숨쉬기 좋은 장소도 없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숲을 이뤄 우거져 있고 맑은 계곡이 사시사철 흐른다. 무심코 쉬는 숨이 아니라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복식호흡을 해야 한다. 호흡에 집중하면 마음과 몸이 편안해진다.

 

5단 폭포

 

숲길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숲길 조사가 고되고 힘들수록 숲길을 더 놓은 길이 될 수 있다. 숲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숲 안을 들여다보면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이 지형이 험한 숲에 숲길 조사자의 열정이 더해지면 불가능할 것 같은 숲길 노선에 서광이 비치며 온기로 채워진다.

덤불 숲, 흔들리는 이끼긴 돌, 무더위,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 갈증, 산모기의 공격. 느릿느릿 움직이는 뱀, 모든 역격을 이겨내고 지금 내가 내딛는 걸음이 좋은 숲길이 된다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필례약수에서 바라본 귀둔리 야산

새소리와 파도 소리에 눈을 떴다.

세상은 아직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로등 불빛만이 어둠에 항거하고 있었다.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고 쌀쌀했다. 산속이라 그런지 텐트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해가 빛을 내뿜기 전에 배낭을 꾸렸다.

주변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나와 K는 산에서 내려와 일주버스를 타고 사동항에 왔다. 관광안내센터에서 승선을 기다리며 이번 울릉도 여행을 되돌아봤다.

 

학포마을의 새벽
LNT(Leave No Trace)

 

캠핑과 백패킹을 함께 했다.

나는 큰돈 들이지 않고, 배낭에 꼭 필요한 것만을 넣어 가볍게 메고, 울릉도 자연 속을 걸어 다니는 여행을 했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즐겼다.

울릉도를 다 돌아보지 않았더라도 여행을 즐겼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행을 즐기고 행복함을 느꼈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여행을 한 셈이다.

 

KTX 포항역

34일이 훌쩍 지나갔다.

새벽 4시부터 줄을 서기 시작한 야영장은 해가 뜨기 전부터 사람들로 분주했다. 이른 아침을 먹고 서둘러 텐트를 철수하고 배낭을 꾸렸다. 최대 3박만 가능하므로 오늘 야영장을 나가야만 했다. 일단 우리는 배낭을 야영장에 맡겨 두었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야영장을 벗어나 일주 버스를 타기 위해 언덕을 올랐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대의 자동차가 지나갔고 갑작스럽게 은색 자동차가 우리 앞에 멈춰섰다. 울릉도에서의 세 번째 행운이었다.

오늘 함께 다닙시다.”

 

학포야영장 9번 데크
아침엔 라면

 

처음에 U형을 만난 건 야영장이었다.

사흘 동안 학포야영장에서 야영을 한 공통분모로 유대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특별히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몇 번 얼굴을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유대감이 긴밀해졌다. 살아온 시대나 환경이 다르지만,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존경심을 서로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여행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부질없는 근심을 떠안고 있어 봐야 여행은 즐겁지가 않다. 매 순간에 몰두하고서 동시에 여행의 즐거움을 생각해야 한다. 낙관적인 태도로 순간을 즐기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다.

 

뚜벅이
U형과의 만남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가 보고 싶은 장소를 상대에게 강요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U형은 여행을 알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와 K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다. 여행을 알고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을 즐기는 사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함께 여행할 수 있을까?

차는 태하에서 멈춰섰다.

5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떤 설명도 없이 아침을 먹자는 U형의 말에 우리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원래 U형이 가려고 했던 중국집은 문을 열지 않았다. 인근에 문 연 식당에 들어갔다. 먹방 유튜버 쯔양이 방문한 우진이네였다. 우리는 야외 탁자에 앉아 홍해삼물회를 먹으면서 간단히 통성명했다. 초고추장을 넣지 않아도 맛있는 홍해삼물회가 두 번째 아침이었다.

 

태하, 먹방 유튜버 쯔양 방문 맛집, 우진이네
홍해삼물회

 

해가 높이 떠 있는 화창한 날이었다.

이따금 괭이갈매기가 창공을 순찰하듯 날아다녔다. 아침을 두 번이나 먹었으니 커피를 마시면 좋을 것 같았다. 추산에 다다랐을 때 차는 속력을 줄였다. 긴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데 관광버스 때문에 길이 막혀 있었다. 5분이 더 흘렀을 때 우리는 카페올라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먼 안쪽 창가에 앉았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K는 아이스 소금라테, U형은 아이스 녹차라테를 마셨다. 우리는 오랫동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왔다.

듬직한 울라는 우울해 보였다. 울라는 수많은 사람을 반겨줬는데 사람들은 그저 사진만 찍고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울라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반가운 인사말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송곳봉 아래 독불장군처럼 서 있는 울라와 흰색 건물이 바다와 묘하게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카페울라
울라-울릉도 고릴라

 

오후 1시가 넘었다.

태양이 머리 정수리에서 조금 비껴 나갈 때쯤 우리는 삼선암에 도착했다. 그늘에 서서 U형이 주신 산양유 가루를 마셨다. 도로 건너편 바위에 올라서서 손차양하고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세 개의 바위를 바라봤다. 가까이 있는 두 개의 바위 위쪽에는 짙은 녹색의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제일 늑장을 부린 막내 선녀 바위에만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뒤쪽의 조그만 바위에는 녹색이 전혀 없었다. 나는 해안가 평평한 바위 위에 두 다리로 우뚝 서서 아름다운 울릉도 해안 비경인 삼선암과 좀 더 가까이 마주했다.

석포마을로 향했다.

일주도로에서 석포마을까지는 굽이굽이 급경사지를 올라야 했다. 차를 타고 가는 이 길을 7년 전에는 걸어서 내려왔었다. 숭고한 나라 사랑과 독도수호 정신을 느낄 수 있는 독도 의용수비대기념관과 독도를 지킨 안용복의 업적을 기리는 안용복 기념관을 갔다. 전망대에서는 섬목과 관음도를 연결한 보행 연도교와 울릉도의 부속 섬 중 가장 큰 죽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삼선암
죽도
섬목, 관음도, 죽도

 

임도를 따라 석포전망대에 왔다.

바닷냄새가 바람을 타고 해안 절벽을 휘감아 돌았다. 발아래 울릉 북구 해안이 드넓게 펼쳐져 보였다. 가까운 곳에 홀로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딴바위가 있었다. 정상부가 분화구 모양을 하고 있어 흡사 백록담이나 성산일출봉 같았다. 석포전망대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을 한눈에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반가워

풍경은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졌다.

타이밍에 따라 더 좋은 모습이 될 때도 있다는 말이다. 햇빛을 받은 바다는 춤을 추는 것처럼 계속 반짝거렸다. 울릉도는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흑백으로 찍은 사진을 보니 더 멋진 풍경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만 개의 별이 바다에서 영롱하게 반짝였다. 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즐기되 감상에 빠지지는 않았다.

 

석포전망대, 딴바위

 

아름다운 동행은 계속되었다.

석포전망대에서 태하로 이동하여 저녁을 먹었다. 아침에는 U형이 가려던 그 중국집에서 짬뽕에 탕수육을 먹었다. 지금은 울릉도에서 많이 안 잡힌다는 오징어가 아이러니하게 짬뽕에 들어 있었다. 모두 배가 고팠는지 쉴 새 없이 젓가락이 움직였다.

잘 먹었습니다.”

학포야영장으로 돌아온 후 배낭을 메고 인근 산으로 향했다.

전망대에 텐트를 친 후 학포해변으로 향했다. 학포해변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어둠은 금방 찾아왔고 우리의 아름다운 동행은 여기서 끝을 맺어야 했다. 오늘 나와 KU형 덕분에 아침, 커피, 저녁을 대접받고 온종일 편안하게 차도 함께 타고 다녔다.

오늘 하루 정말 감사했습니다.”

 

탕수육
짬뽕
학포인근 야산
학포일몰

 

한층 더 어둠에 휩싸였다.

백패킹은 여러 감정을 느끼게 했다. 모든 것이 불편하지만 직접적인 야외체험을 통해 색다른 감정과 희열을 만끽하게 된다. 캠핑의 꽃은 모닥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노을로 물든 서쪽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석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 최고의 안식을 느낀다.

 

어둠에 휩싸인 학포마을
학포인근 야산

늦잠을 잤다.

그래 봐야 오전 6시가 막 지났을 뿐이다. 욱신거리는 종아리를 손으로 주무르며 텐트에서 나왔다. 카누와 시에라컵을 들고 정수기로 갔다. 온수 버튼을 누르고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았다. 카누를 컵에 부었다. 커피 입자가 물에 녹아들면서 순식간에 검은 아지랑이가 나타났다.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금방이라도 햇빛이 비처럼 쏟아질 것 같았다.

햇반과 라면을 끓였다.

파김치를 곁들여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면서 어젯밤 마시다 남은 막걸리로 반주를 했다. 아침 후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거나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괭이갈매기는 날아들었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우리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해는 공기를 뜨겁게 데우기 시작했고 우리는 나무 그늘에 앉아 한가한 아침을 즐겼다.

 

휴식
청명한 하늘
괭이갈매기

 

한낮이 되어 일주 버스를 타고 도동에 왔다.

관광객들이 비좁은 골목을 배회하며 무리를 이루고 걸었다. 이사부 초밥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지만 예약하지 않아 먹을 수가 없었다. 어제 브레이크 타임(Break Time)이라 못 먹었던 만원의 행복을 다시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사장님께서 아는 체를 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뷔페식이라 음식도 다양하고 맛도 좋아서 풍족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K는 초밥을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나는 모든 음식을 다양하게 먹었다.

점심 후 호박 막걸리를 구매했다.

하루 만에 다시 나타난 우리를 보고 반가우셨던지 앉은 자리에서 막걸리 한 병을 두 번에 걸쳐 전부 따라 주셨다. 꿀꺽꿀꺽 목 넘김이 정말 좋았다. 술은 역시 낮에 먹는 술이 최고였다. H 마트에 들러 참외와 방울토마토를 샀다. 도동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도넛과 꽈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제보다 두 개 더 많은 6개씩 2봉지를 구매했다. 물론 나는 설탕을 듬뿍 뿌려달라고 했다. 어느새 에코백이 가득 찼다. 2시간의 짧은 도동 외출을 이렇게 마쳤다.

 

일주버스
만원의 행복
도동 호박막걸리 이송옥할머니

 

학포야영장으로 돌아와 익숙한 텐트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깐의 도동 방문은 알차고 실속있었다. 도동에서 사 온 호박 막걸리, 꽈배기와 도넛, 방울토마토와 참외를 꺼내놓고 의자에 몸을 맡겼다. 두 눈을 감고 파도 소리를 들었다. 파도가 부르는 손짓을 거역할 수 없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학포해변으로 내려갔다.

철썩철썩, 촤르르

한낮의 학포해변은 스노클링(snorkeling)을 하는 사람들과 스킨스쿠버(skin scuba)를 배우는 사람들,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사람들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학포해변은 모래는 없고 오직 몽돌만이 가득했다. 나는 바다에 반사된 햇살에 눈이 부셔 고개를 숙였다.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몽돌 해안에 앉아 있었다.

 

학포 몽돌해변

 

밖에서 보는 바다는 잔잔해 보였다.

바다는 내게 목욕탕 같은 곳이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물장구를 치던 어릴 적 놀이터인 셈이다. 바다의 수면은 따뜻한 온탕 같고 바닷속은 차가워 냉탕 같았다. 맨발에 느껴지는 몽돌의 촉감은 부드러웠지만,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미끄러웠다. 바닷속의 물살은 거칠었고 파도는 흰 거품을 일으키며 해안으로 밀려들었다. 맨몸으로 수영 중인 나도 파도에 밀려 해안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학포해변은 울릉도 서쪽으로 시야가 트여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수상/수중 레포츠를 즐긴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드넓은 바다에 갇혀 있는 것이다. 괭이갈매기가 바위에 앉아 우리를 희롱하다 드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학포 몽돌해변_수영, 스노클링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바다의 짠 내가 없어지자 몸이 한결 산뜻해졌다. 수영복도 잘 빨아서 양지바른 곳에 널어놓았다. 따뜻한 커피를 마신 후 매트를 깔고 그늘에 누워 낮잠을 청했다.

어둠은 서서히 찾아왔다.

수영 후 지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참치 범벅(참치를 겨자 소스에 비빈 음식)을 만들었다. 밥 한 수저에 참치 범벅을 올린 후 깻잎으로 싸서 먹었다. 담백한 맛, 단맛 짠맛이 궁합이 좋았다. 옆 텐트에서 골뱅이 무침과 김치전을 주셨다. 호박 막걸리를 안 마실 수가 없었다.

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때문에 그늘을 찾게 되지만 해가 지면 풀벌레 소리와 새의 지저귐을 시점으로 기온이 서늘해졌다. 나는 랜턴을 켜 놓은 텐트 안에서 그 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밤의 이야기는 내일 또 계속될 것이다.

 

학포마을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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