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이즈하라 -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쓰시마 번주 소 타케유키(宗 武志)백작과 결혼하였습니다.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쓰시마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입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지도를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는 대마역사민속자료관 뒷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마역사자료관에서 아리아케 등산로 가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종합쇼핑센터 티아라몰에서 만송원, 반쇼인(万松院) 가는 방향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종합쇼핑센터 티아라몰에서

만송원, 반쇼인(万松院) 가는 방면의 중간에 위치하며 도보로 2~5분 거리입니다.

 

 

 

 

 

가네이시 성터를 지나 가네이시성 정원으로 향해서 걸어 들어가면 됩니다.

 

 

 

 

도중에 조그마한 사각기둥의 비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비석에는 조선통신사 접우의 땅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곳이... 그럼 우리땅인가요?? 대마도는 우리땅!!!

 

 

 

 

조선통신사 접우의 땅이라고 적혀 있는

비석 뒤편 정원에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기념비 하단에는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기부한 사람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습니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라고 호칭했습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습니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습니다.

1916년 준명당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습니다.


덕혜옹주는 서녀()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습니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습니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습니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라는 호를 내려받았습니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습니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습니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습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귀인양씨)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습니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습니다.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습니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이 지나서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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