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만에 다시 찾은 두미도. 오직 선택받은 사람만이 살고 싶은 섬, 두미도를 이해할 수 있다. 헤어진 여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기뻐하는 남구의 누렁이가 나를 반긴다. 종을 뛰어넘은 인간과 동물의 우정이다.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할 때 이미 그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어떤 글로도 표현할 수 없다.

 

현실과 이상

 

무더운 한낮의 더위를 피해 계곡으로 걸음을 옮긴다. 녹음이 짙어진 그늘진 계곡은 맑은 물이 흐른다. 계곡물은 바위에 부딪혀 철퍼덕거리기도 하고 급류가 되어 헐떡거리기도 하며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신음하기도 한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계곡물은 졸졸 흘러야 아름답게 느낀다. 우리는 현실의 계곡물을 보고 이상적인 계곡물을 생각한다.

나무는 잎의 광합성을 통해 하늘로 가지를 뻗고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다. 뿌리로 물을 얻고 잎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얻어 햇빛을 통해 광합성을 한다. 광합성을 통해 포도당과 산소를 만든다. 나무가 배출한 산소를 우리는 숨을 쉬고 우리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를 나무는 광합성에 이용하는 것이다. 나무와 우리는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눈에는 볼 수 없지만, 숲은 살아 있는 생물들의 고향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햇빛이라는 동료가 필요하다.

 

섬과 산

 

자연은 있는 그대로 그냥 놔두어야 한다. 늘 거기에 존재해야 한다. 존재하므로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다. 하늘을 천장 삼아 봉우리를 마루 삼아 아무것도 없는 바위에 앉는다. 인생의 창밖으로 사랑도, 욕지도를 바라본다. 두 손을 입에 대고 힘차게 외쳐본다. 언어는 떠나버리고 소리만 남는다. 언어는 더는 현실 세계의 존재를 표현하지 못한다.

나뭇잎은 산에서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나무 사이로 드넓은 바다와 인근 섬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바다의 섬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만 하지 말고 아주 잘 보이는 곳인 산 정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먼 곳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산을 오르듯 성장하려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성장이 눈앞에 보이는 데 더 노력해서 높은 곳으로 맞으러 가야 한다. 길게 출렁이는 파도가 섬에 도착할 때까지 성장에 대한 열정도 파도처럼 어느 쪽으로 흘러가다 멈출 것이다.

 

긴 하루

 

두미도의 봄은 이미 지났고 여름이 찾아왔다. 섬에 하얀 뭉게구름이 걸려 있다. 아침 해가 수평선 위로 떠 오르고 한층 더 빛나고 있다. 예전 섬사람들이 왕래하던 길을 우리는 옛길, 삶의 길이라 여기며 오늘도 찾아다니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산과 바다가 깨끗하고 아름답다.

긴 하루를 보내고 어느새 밤은 깊어졌다. 산과 바다가 섬을 어루만져준다. 두미도를 찾은 여행자들은 밝은 달빛과 별빛 아래 편히 누워 잠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 마시는 맥주 한잔보다 나은 것 아무것도 없다.

 

옛날부터 두미도에 사람이 살았다. 내가 지금 통영에서 바다누리 호를 타고 그 섬에 가는데 두미도를 모른다면 말이 되겠는가? 두미도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천천히 알아보자. 아름다운 섬도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아름다운 섬에 있어도 그 아름다움을 찾지 않으면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두미도 옛길

 

두미도 옛길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있다. 옛길이 험하다고 찾지 않으면 잊힌 길이 되는 것이다. 옛길을 찾는 데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우선 고지도와 현재 지도를 현장과 비교해 본다. 현지인들의 생생한 증언은 옛길을 찾는 데 최고의 도움이 된다.

두미도의 자연 앞에서는 아름다운 기운을 느끼게 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산의 힘을 보여주고 바다로 뻗어 들어간 갯바위는 바다를 넘치게 한다. 자연의 웅장함에 기가 꺾인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내가 더 나아갈 수 없으니 옛길을 찾을 수 있을까?

옛길을 찾다 보면 가시나무에 긁히고, 산속 벌레에 쏘이고, 뱀과 멧돼지 등 야생동물과 마주치기도 하며, 낭떠러지에 서게 되는 경우가 늘 있다. 하늘은 처음에 육체에 고통을 주지만 마음이 강인해지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을 키워준다. 그런 힘듦을 이겨내고 옛길을 하나씩 찾았을 때는 그보다 더한 즐거움과 내재적인 만족을 느끼게 된다.

 

살고 싶은 섬

 

바다의 고기잡이배 위에 바람이 불어오니 봄은 깊어가고 여름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저 멀리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고 하늘의 태양은 구름과 마주하고 있다. 부두의 갈매기는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은 나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오랫동안 홀로 서 있었다. 푸른 바다에 선혈을 남기며 수평선 아래로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물이 좋고 산이 좋아서 살고 싶은 섬, 두미도. 드넓은 바다가 만들어낸 파도의 출렁임을 고즈넉하게 바라보는 것도 좋다. 옛길의 흔적 따라 산속을 헤매도 즐겁다. 공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지금 나는 물, 산과 더불어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바다가 바라보는 자리에 텐트를 치고 찬 바닥에 팔베개하고 눕는다. 바닷바람이 차가워도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두미도 오락(頭尾島 五樂)

 

밤하늘에 뜬 별들을 우러러보고 밤바다의 고요한 속삭임을 듣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머위, 줄딸기, 산괴불주머니 등 야생화를 발견하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바닷바람이 숲의 나뭇가지를 흔들면 잠에서 깬 새들의 아침 인사를 듣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북구에서는 사랑도, 수우도, 삼천포가 바라다보이고 남구에서는 추도, 노대도, 욕지도를 바라보는 것이 네 번째 즐거움이다. 섬사람 특유의 강인함보다 내면에 숨은 온화한 마음을 느끼게 해 준 두미도 섬 주민을 만나는 것이 다섯 번째 즐거움이다.

 

쉼표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잊고 지내는 것들이 많다.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는 돈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다. 한껏 몸을 움직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지친 마음은 자연이 알아서 다독여준다.

초록빛의 두미도가 푸른빛의 바다를 어우르고 있다. 섬의 봄은 푸른 바다로 충분하고 짙은 녹음으로 충만하다. 오늘 난 이곳에서 쉼표를 찍는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에 있어 대역죄인이다. 자유로운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불법 활동으로 자연이 훼손되었으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유전자 보호구역을 무단 침입하여 야생화를 짓밟고 쓰레기를 내버렸다. 자연에 피해를 준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기적인 자신의 욕구 충족이 우선이고 진정한 자연의 돌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연과 우리의 위치를 바꾸어 자연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인간은 무시무시한 파괴자로 보일 것이다. 자연은 해의 흐름에 따라 하루를 살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루를 산다. 자연은 언제나 그곳에 평화롭게 있었는데 인간이 갑자기 다가가니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위치를 바꾸어 생각함으로써 자연을 어떻게 보존해야 훼손을 덜 하게 될지를 알게 된다. 인식의 기준을 잠시 바꾸어 보아야 진정한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곰배령 가는 길

 

곰배령으로 향하는 길은 닫혀 있다. 오직 허가받은 사람만이 강선마을을 지나 좁은 숲길과 계곡을 따라 걸어갈 수 있다. 노루귀, 괭이눈, 바람꽃, 개별꽃, 모데미풀, 제비꽃, 현호색, 미나리아재비, 한계령풀, 얼레지 등 숲에서 발견한 야생화는 경이롭다. 겨우내 숨어 지내던 식물들이 봄소식에 깨어나 생명의 빛을 발산하고 있다. 숲길은 좁고 자연은 시련에 훼손되었지만 완전한 만족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이 길을 따라 걷는다. 오랜 세월 버텨온 야생화가 만들어낸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 그 길에 있다.

맑은 날,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숲에 끝없이 펼쳐질 때 활짝 꽃을 피운 야생화를 본 적이 있는가? 야생화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생명력을 유지하고 저마다의 색깔로 활짝 피어난다. 나는 야생화가 활짝 핀 숲속을 거닐고 있다는 것에 대해 신비함을 느낀다. 계절은 정해진 절기로 순환하면서 쉼 없이 변화하고 있다. 숲은 분주히 깨어나는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 나 또한 숲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자연에서 자유를 느낀다. 가장 원초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느낌과 감각에 자극을 주어 현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늘 변화를 원한다.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정체되어 있지 않은 자연에서 봄의 새싹, 야생화 등 역동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자연을 보고 진리 탐구를 하기보다는 미적 탐구를 통해 감성적으로 느껴야 한다. 자유를 꿈꾸는 사람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찾아야 한다.

 

적당한 무관심

 

곰배령에 올라서면 평화로운 자연풍경이 펼쳐진다. 우뚝 솟아있는 나무 아래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점 길어진다. 산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지키려면 적당하게 무관심해야 한다. 너무 지나친 관심은 자연에 고통을 줄 뿐이다. 쓱 스쳐보면서 마음속으로 감탄해야 진정으로 자연을 위한 것이다.

큰 산맥은 여러 갈래의 지맥을 품고 있다. 웅장한 산봉우리는 호주머니의 송곳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산이 어느 산의 봉우리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작은 봉우리가 없으면 큰 산맥도 없는 것이다. 곰배령에서 점봉산, 설악산 중청과 대청을 바라본다. 마음은 소박해지고 사사로운 욕심은 어느새 사라지게 된다.

 

아름다운 기억

 

세월과 함께 잊히는 것도 있지만 자연과의 추억은 세월과 함께 아름다운 기억이 짙어진다. 찾아오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사람과의 만남처럼 산이 정답게 느껴진다. 농익은 자연풍경이 계절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슬프도록 푸르고 싶은 하늘을 바라보며 다짐한다. 자연과 사귀기 위해 이곳에 홀로 머물러야겠다. 자연은 홀로 있는 사람에게만 가슴을 연다.

 

누구나 유토피아, '이 세상에 없는 장소'를 꿈꾸며 세상을 살고 있다. 현실 상황이 복잡하고 힘들수록 이상에 대한 염원을 끝없이 추구하려고 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 즐거워지려면 마음과 상반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 속에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나 좋을 대로, 자유와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면 어디에도 없는 곳과 만나는 순간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떠돌이 여행자

 

봄의 산뜻함이 좋고 여름의 싱그러움이 좋다. 가을의 풍요로움이 좋고 겨울의 총명함이 좋다. 내 인생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었다. 인생은 떠돌이 여행자다.

나는 가끔 도보여행하면서 경험주의자가 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것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가장 멋진 하루를 살아가는 방법은 마음의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훌쩍 떠나온 인제 여행이 기쁘다. 공기가 바람에 녹아 솜사탕같이 달콤한 한밤 공기는 싱그러운 냄새를 품고 있다. 지금 이곳은 흐르는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다.

 

숙취

 

간밤에 마신 알코올의 취기가 아직 남았는지 머리가 무겁다. 술이 덜 깼는데 날씨가 화창해 왠지 슬픔이 몰려온다.

함께한 상대와 분위기에 따라 주량은 달라진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되지만 많이 마시면 마약과 같은 것이다. 숙취가 주는 지속적인 머리의 통증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을 주고 있다. 아침에 먹은 막국수의 소화되지 않은 것들을 원대리 야산의 급경사지에서 쪼그리고 앉자 비워내야만 했다.

 

숲을 보다

 

숲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미세하게 자라고 있는 나무의 생명력이다. 숲속으로 더 들어가니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생명줄을 놓아버린 전도된 나무와 부러진 나무들이 있었다. 본시 아름드리나무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폭설에 그 기상이 꺾이고 만 것이다.

숲의 햇빛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더욱 밝은색으로 지면을 비춘다. 바싹 말라버린 낙엽 사이에서 생명력을 키워낸 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숲에 들어왔던 햇빛은 다시 반사되어 숲을 빠져나간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변해 버린다.

 

천상의 화원

 

내가 돌단풍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올망졸망 제각각 놓여 있는 돌들 사이에서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작은 생명체 같은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을 거로 생각하는 장소에 생명의 씨앗을 키웠다. 나는 움직일 수 없는 자연의 피사체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찍었다. 그것은 내가 본 백만 송이 돌단풍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돌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돌단풍은 돌이 삶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한낮의 태양은 하늘 높이 떠 있고 내린천은 미세한 거품을 일으키며 찰랑찰랑 흘러간다.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는 반대편 강기슭, 물에 빠지더라도 열정적으로 건너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봄날의 내린천은 돌단풍의 보금자리이고 물소리의 힘찬 외침 속에서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내린천

 

내린천은 물길이 트면 그 방향으로 흐른다. 어떤 가식적인 치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내린천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고 있다. 계절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기적과 흐르는 물로 인한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물살이 주는 공포 때문에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오랜 산행으로 세숫대야에 찬물을 받아놓고 족욕을 하듯 그냥 발을 내린천에 담그고 싶었다.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바위에 철퍼덕 앉았다. 물이 주는 시원함에 잔뜩 취해서 세수도 했다. 오 맙소사. 1분도 안 지났는데 발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서리치며 얼른 물에서 발을 뺐다.

흐르는 물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물에 반사된 내 머리가 보인다.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내린천의 흐르는 물속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매우 친밀하고 떨어질 수 없는 친한 물고기와 물의 사귐인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사자성어처럼 그걸 말로 표현하려 노력했지만,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인생

 

시간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세월은 흐르는 내린천처럼 쉬지도 않고 계속 흘러간다. 때로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완만하게, 때로는 급류를 만난 성난 강물처럼 거침없이, 마치 폭포수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릴 뿐이다. 인생은 물처럼 흐르기 위해 사는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어느새 거대한 바다와 마주하게 된다. 바다는 물이 더해져도 흘러넘치지 않는다.

오늘도 내 인생은 내린천처럼 흐른다.

 

 

비 오는 제주, 갈 곳이 없어지고 할 일도 없어졌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문득 그런 날이 있다. 공기에 비 냄새가 섞여 있지만 내 마음을 적시기에 아직 양이 부족하다.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날씨라는 약간의 결핍이 필요하다.

안개에 물들고 싶은 새벽이다. 어둠을 바라보며 난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새벽부터 한라산 산행을 시작한다.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익숙함에 곧 안도감을 느낀다. 이 순간도 조만간 지나가겠지.

 

괜찮은 사람

 

세상에서 가장 짙은 어둠을 내 뒤에 두고 열심히 산을 오른다. 걸음에 집중하다 보니 먼동이 떴고 어느새 편백 숲이다. 위풍당당한 발걸음에 신이 절로 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평범하다, 특별하다'란 말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품 안에 자연을 담을 수 없지만, 마음속에는 나만의 자연이 존재한다. 숲을 지키는 나무는 하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준다. 숲은 인간의 본보기다. 나무는 홀로 살지 않고 이웃 나무들과 숲을 이룬다.

아직 익지 않은 과실처럼 숲의 냄새도 풋풋하다. 절기는 입춘을 지났지만, 조석으로는 겨울을 실감하게끔 쌀쌀하다. 한낮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한없이 높기만 하다. 산 정상에 오르면 하늘에 닿을까? 바다같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나룻배처럼 떠다닌다. 나뭇가지 사이로 맑고 투명한 햇빛이 대지에 닿으면 유릿가루처럼 빛을 낸다.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면 풋풋한 숲에서도 상큼한 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구상나무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고사한 구상나무지만 죽은 나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한라산의 아침은 평화롭고 구상나무는 싱그럽다. 푸른 색채에 빛나는 나뭇결무늬가 무성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얼어 있던 상고대가 녹아 무성한 숲으로 빛을 발산하며 스며든다. 한라산은 높지만 그윽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쉬고 싶을 때는 언제나 그곳으로 찾아가 내 보금자리를 만든다. 자연의 의연한 기상과 늠름함에 매료된 순간이다. 기분 좋다.

산은 구름에 기대어 살고 구름은 바람에 기대어 산다. 기대어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다. 오늘 내가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파도처럼 바람에 출렁이는 맑은 하늘이다.

한라산만 52번째

 

눈부시게 맑은 날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을 쳐다본다. 한반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보다 더 청량한 세상의 첫 공기를 마신다.

세상의 주인은 자연이다. 한 생명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세상을 자연으로부터 빌려 한평생을 사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소유욕은 자연을 황폐화한다. 끊임없는 소유욕은 언젠가 화마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자연이 원금이라면 자연이 사계절 동안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은 이자다. 세상 이치가 이자로 먹고살아야 한다. 원금으로 먹고살기 시작하면 금세 황폐해지고 만다. 물질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을 정복하려고만 한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고 어느 등산가의 욕망도 무궁무진하다. 구름으로 뒤덮인 날, 비바람이 부는 날,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 비록 환상적인 풍경을 못 보고 허공을 향해 고함만 지르다 가도 그저 좋았다. 복 받게도 오늘은 청량한 봄 날씨다. 나는 오늘의 한라산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1997년 나의 첫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약 1달 동안 하노이를 중심으로 베트남 북부여행을 다녀왔다. 2000,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10개월 동안 인도와 네팔을 여행했다. 낯선 곳에서 지낸 그때의 삶의 교훈은 인생의 여행자로서 삶에 초석이 되고 있다.

한 달 이상의 장기 여행이 좋은 이유는 여행이 일상이 되고 그 일상 속에 모험을 즐긴다는 점이다. 장기 여행은 정해져 있지 않은 불확실함과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불확실한 순간과 만남은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인생과 세계관을 변화시킨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준비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 일상을 벗어나면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내 일상이 된다.

 

딱하다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마음대로 해외여행을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땀 흘려 일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듯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녔던 그 날들이 그립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날씨와 상관없이 우울한 습기가 느껴진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소중하다. 한번 흘러간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여행자로서 확실한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자유로운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할수록 어느 장소이든 간에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한 줄기 바람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밤에 떠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노는 맛

 

1년 전, 나는 제주에 있었고 정확히 오늘 추자도로 향했다. 자연을 직접 보지 않고서 어떻게 글을 쓴단 말인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나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하늘은 맑아졌지만 바람은 멈추지 않아 파도가 심하다. 여행에 있어 파도가 심하게 출렁거리는 게 심각한 걱정거리는 아니다. 멀미로 고생한 여행이라도 보람과 살아있음을 느낀다. 퀸스타 2호 실내공기에 바닷냄새가 섞여 있다.

강풍이 휩쓸고 간 후 하늘도 땅도 그저 좋은 봄날이다. 바닷바람이 등을 떼밀어 추자도 숲길을 즐겁게 걷는다. 온전히 나를 보고 자연을 보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이 순간을 누릴까?

사람의 자취가 거의 없는 곳으로 바람을 피해 이곳에 왔다.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연장하고 싶어 나바론 절벽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추자도에 온다면 그때는 지금의 추자도는 아닐 것이다. 지금 난 차갑게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길에서는 나라는 사람의 꼬리표를 항상 떼고 다닌다. 유유자적 걷는 방랑의 삶도 참 멋지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봄 하늘, 흰 구름이 떠다닌다. 구름의 이동만큼 세월의 흐름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내 젊은 날의 자취가 구름과 함께 사라진다. 어떤 여행을 하든 간에 경험이 써 내려가는 삶의 드라마는 찬란하게 눈부시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여행은 부자유를 거부하고 세상을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다. 일에 얽매여 삶이 지쳤을 때는 현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휴식과 삶을 찾아 떠나야 한다. 낯선 곳을 여행하면 할수록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엉켜있던 생각의 끈이 실타래처럼 막힘없이 풀리게 된다. 바람의 방향에 자신을 맡기면 자연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다.

 

신체 리듬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보통 자정에 잠을 자고 오전 6시에 일어난다. 널리 알려진 수면 주기는 1.5시간이다. 나는 이 단위의 4배인 6시간을 잠을 잔다. 일과의 규칙성을 살펴보면 이는 이미 습관으로 자리 잡은 시간의 흐름 속 행동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생산활동, 유지활동, 여가활동으로 보낸다.

 

일주일 168시간을 기준으로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126시간이다. 직업의 종류가 다르고 근무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생산활동에 투입되는 시간은 40시간(표준근로시간)이다. 나머지 86시간은 이동, 식사 등 유지활동과 취미, 휴식 등 여가활동이다.

보통 여가활동은 TV 시청, 스마트폰 사용, 운동이나 영화감상 등이 대부분이다. TV보다 더 중독성이 강한 것이 스마트폰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스마트폰에 무아지경으로 빠진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스마트폰을 통해 자극적이고 얄팍한 정보를 눈으로 읽는 것에 불과하다.

주위에 기상천외하고 색다른 자극을 주는 것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 자극을 주는 모험을 찾아다녔고 거기서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자기계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이 하루하루 더해지면 큰 시간이 허공의 안개처럼 형체 없이 사라질 뿐이다.

 

내 인생을 걸고 가장 해 볼만한 일은 독서다.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전하지 않거나 너무 어려운 책을 선택하여 독서를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다수가 속하는 특별하지 않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유지활동과 여가활동의 시간을 잘 활용하면 삶이 알찰 수 있다. 나는 하루 6시간, 일주일에 42시간을 규칙적으로 책 읽기에 사용하고 있다.

누군가 정해 놓은 방식은 내 것이 아니다. 독서 시간도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기가 정한 시간과 목적이 뚜렷해야 독서에 몰입을 더할 수 있다.

 

독서는 놀라울 만큼 특별한 능력은 아니다.

 

지적 호기심은 끊임없이 두뇌를 발전시킨다. 읽고자 하는 열의만 있다면 나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질은 헤지거나 망가지면 내 버려지지만 읽어서 몸에 익은 것은 죽는 날까지 함께 한다.

독서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계속 흐르기만 하면 큰 바다가 될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두뇌를 썩혀야 하겠는가? 독서에 있어 졸업은 없다. 졸업은 곧 바보로 전략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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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나이와 무관하다. 변함없는 일상의 삶에 빠지면 성장에 필요한 능력을 잃게 된다. 도전을 포기하고 현재 상황에 만족하면 삶을 바꾸는 건 상당히 어렵다.

삶 속에는 절박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삶이 된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일상을 바꾸는 작은 습관을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첫 독서는 읽기 쉬운 책이었다

 

읽는 것의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독서에 흥미가 생기고 난 후에는 좋은 책,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 순으로 책을 읽고 있다.

책은 주로 지역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일 도서관에 간다. 독서가 일상이 되다 보니 지금은 읽을 책의 목록을 사전에 정해 두고 있다. 소설, , 경제, 자기계발, 인문, 역사, 종교, 정치, 과학 등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관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여러 종류의 책을 읽으면 생각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고 세상을 다양하고 폭넓게 보게 된다. 독서를 통해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 의식이 깊어지면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자신의 한계를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

 

시간의 주인이 되자

 

하루 24시간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주어지는 시간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하다. 소신껏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길러야 한다.

삼시 세끼를 먹듯이 독서를 삶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1시간, 저녁에 잠들기 전 2시간은 규칙적으로 책을 읽는다. 3시간이면 200쪽 내외의 책 한 권은 거뜬하게 읽을 수 있다.

개인 성향이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오히려 집중력이 좋아진다. 다른 사람들이 정보의 바다인 스마트폰에 빠져 있을 때 난 책을 읽는다. 한 권을 계속 읽는 게 아니라 여러 권을 상황에 따라 바꿔가면 읽는다. 독서는 나에게 오로지 집중하는 시간이다.

다른 잉여시간을 포함하여 하루에 평균 6시간 정도 책을 읽는다. 시간의 주인이 되기 위한 의식이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화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인간의 당연한 감정이다. 세상살이가 늘 변화를 요구하지만,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다.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조금씩 벗어난 행동을 통해 서서히 거부감을 줄어야 한다. 거부감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몸에 익숙해진다. 무언가를 할 때 잘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성취감이 강하게 밀려온다. 성취감을 느끼면 뇌에 자극이 가고 작은 의지력의 실행이 삶을 변화시킨다. 작은 행동이 습관이 되는 것이다.

31,000권 독서

 

매년 100권 내외를 읽다가 2018년부터 하루 한 권 독서를 통해 3년 동안 1,300여 권을 읽었다. 하루 한 권 독서는 4년째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은 월평균 50여 권을 읽고 있다.

질은 양이 수반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버리겠다.'라는 말은 얼토당토않은 생각같이 보인다. 하지만 생각의 틀을 넓혀 사고를 크게 하면 무의식에 자극이 되어 상상 이상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무의식은 살아 있다. 그 에너지는 자신을 뛰어넘는 원동력이 된다. 인생의 내공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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