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를 가는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집을 비우는 동안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게 사전조치를 취해야 했다. 40년도 넘은 오래된 단독주택에 살다 보면 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보수를 해야만 한다. 아침을 먹기 전인데도 온몸이 땀으로 젖어버렸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날씨는 눈부실 정도로 화창하고 더웠다. 더운 정도가 너무 지나쳐 모든 것이 다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직 6월도 안 되었는데 올여름을 어떻게 넘길까 살짝 걱정되었다. 점심을 먹고 샤워를 했다. 어젯밤 대충 챙겨둔 백패(backpack) 장비들을 배낭에 넣었다. 갈등은 항상 이 순간에 찾아왔다. 배낭여행을 하다 보니 무게를 고려해서 배낭에 장비를 챙겨야 한다. 장비를 가지고 갈까 말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백팩장비

 

대전역에서 기차를 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기차역은 도착한 사람들과 떠나려는 사람들이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학생, 아장아장 걷는 아기 손을 잡은 젊은 부부, 휴가를 즐긴 뒤 복귀하는 군인, 데이트를 즐긴 후 이별하는 연인, 중절모를 쓰고 낡은 양복을 입고 있는 70대 초로의 노인 등 각자의 용무를 위해 기차역을 찾은 것이다.

1년 만에 타는 기차였다.

11자 철로를 빠르게 움직이는 기차의 흔들림은 이번 울릉도 여행을 더욱 설레게 하고 있었다. 지저분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기차 밖 세상은 뜨거운 열기로 점점 끓어오르고 있었다. 5월 말인데도 독기를 품은 해는 강렬한 빛을 세상에 계속해서 내리쬐고 있었다. 기차속도와 비례하여 사라져가는 풍경이 내 인생의 슬라이드를 보는 듯 애틋하기만 다가왔다.

 

대전역

 

해가 진 후에 기차는 포항역에 도착했다.

나는 동대구에서 합류한 K와 함께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듯 기차는 사람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기차역 대합실을 벗어나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낮의 열기가 밤까지 이어지고 있다. 셔틀버스를 타고 포항 영일만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어두워진 거리엔 가로등과 네온사인만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드디어 뉴씨다오펄(NEW SHIDAO PEARL)과 마주했다.

배는 조명을 받아 더욱 위세 등등하게 보였다. 배를 보고나니 뱃멀미는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뱃멀미 안녕.’ 곧 승선이 시작되었고 두 줄로 길게 늘어선 인파가 사라질 때쯤 유유자적 배를 탔다.

 

 

좌석은 6인실 7516_2였다.

샤워실과 화장실까지 갖추어진 2층 침대 3개의 6인실이었다. 게스트하우스의 6인실처럼 꾸며져 있어 울릉도 여행을 한층 더 실감이 나게 했다. 출항까지는 아직 30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출항 전에 잠이 들면 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침대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엔진이 점화되고 스크루의 회전이 빨라질수록 배의 흔들림이 점점 잦아졌다. 이런 불규칙한 흔들림은 내 감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배가 일정 속도의 추진력이 생겼을 때 안내방송이 시작되었다. 어느새 배는 불빛 한점 없는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울릉도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이다.

 

6층 6인실(화장실 및 샤워실)
5층 식당 및 공연장
뉴씨다오펄(NEW SHIDAO PEARL)

옛날부터 두미도에 사람이 살았다. 내가 지금 통영에서 바다누리 호를 타고 그 섬에 가는데 두미도를 모른다면 말이 되겠는가? 두미도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천천히 알아보자. 아름다운 섬도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아름다운 섬에 있어도 그 아름다움을 찾지 않으면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두미도 옛길

 

두미도 옛길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있다. 옛길이 험하다고 찾지 않으면 잊힌 길이 되는 것이다. 옛길을 찾는 데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우선 고지도와 현재 지도를 현장과 비교해 본다. 현지인들의 생생한 증언은 옛길을 찾는 데 최고의 도움이 된다.

두미도의 자연 앞에서는 아름다운 기운을 느끼게 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산의 힘을 보여주고 바다로 뻗어 들어간 갯바위는 바다를 넘치게 한다. 자연의 웅장함에 기가 꺾인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내가 더 나아갈 수 없으니 옛길을 찾을 수 있을까?

옛길을 찾다 보면 가시나무에 긁히고, 산속 벌레에 쏘이고, 뱀과 멧돼지 등 야생동물과 마주치기도 하며, 낭떠러지에 서게 되는 경우가 늘 있다. 하늘은 처음에 육체에 고통을 주지만 마음이 강인해지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을 키워준다. 그런 힘듦을 이겨내고 옛길을 하나씩 찾았을 때는 그보다 더한 즐거움과 내재적인 만족을 느끼게 된다.

 

살고 싶은 섬

 

바다의 고기잡이배 위에 바람이 불어오니 봄은 깊어가고 여름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저 멀리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고 하늘의 태양은 구름과 마주하고 있다. 부두의 갈매기는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은 나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오랫동안 홀로 서 있었다. 푸른 바다에 선혈을 남기며 수평선 아래로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물이 좋고 산이 좋아서 살고 싶은 섬, 두미도. 드넓은 바다가 만들어낸 파도의 출렁임을 고즈넉하게 바라보는 것도 좋다. 옛길의 흔적 따라 산속을 헤매도 즐겁다. 공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지금 나는 물, 산과 더불어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바다가 바라보는 자리에 텐트를 치고 찬 바닥에 팔베개하고 눕는다. 바닷바람이 차가워도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두미도 오락(頭尾島 五樂)

 

밤하늘에 뜬 별들을 우러러보고 밤바다의 고요한 속삭임을 듣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머위, 줄딸기, 산괴불주머니 등 야생화를 발견하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바닷바람이 숲의 나뭇가지를 흔들면 잠에서 깬 새들의 아침 인사를 듣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북구에서는 사랑도, 수우도, 삼천포가 바라다보이고 남구에서는 추도, 노대도, 욕지도를 바라보는 것이 네 번째 즐거움이다. 섬사람 특유의 강인함보다 내면에 숨은 온화한 마음을 느끼게 해 준 두미도 섬 주민을 만나는 것이 다섯 번째 즐거움이다.

 

쉼표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잊고 지내는 것들이 많다.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는 돈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다. 한껏 몸을 움직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지친 마음은 자연이 알아서 다독여준다.

초록빛의 두미도가 푸른빛의 바다를 어우르고 있다. 섬의 봄은 푸른 바다로 충분하고 짙은 녹음으로 충만하다. 오늘 난 이곳에서 쉼표를 찍는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에 있어 대역죄인이다. 자유로운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불법 활동으로 자연이 훼손되었으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유전자 보호구역을 무단 침입하여 야생화를 짓밟고 쓰레기를 내버렸다. 자연에 피해를 준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기적인 자신의 욕구 충족이 우선이고 진정한 자연의 돌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연과 우리의 위치를 바꾸어 자연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인간은 무시무시한 파괴자로 보일 것이다. 자연은 해의 흐름에 따라 하루를 살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루를 산다. 자연은 언제나 그곳에 평화롭게 있었는데 인간이 갑자기 다가가니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위치를 바꾸어 생각함으로써 자연을 어떻게 보존해야 훼손을 덜 하게 될지를 알게 된다. 인식의 기준을 잠시 바꾸어 보아야 진정한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곰배령 가는 길

 

곰배령으로 향하는 길은 닫혀 있다. 오직 허가받은 사람만이 강선마을을 지나 좁은 숲길과 계곡을 따라 걸어갈 수 있다. 노루귀, 괭이눈, 바람꽃, 개별꽃, 모데미풀, 제비꽃, 현호색, 미나리아재비, 한계령풀, 얼레지 등 숲에서 발견한 야생화는 경이롭다. 겨우내 숨어 지내던 식물들이 봄소식에 깨어나 생명의 빛을 발산하고 있다. 숲길은 좁고 자연은 시련에 훼손되었지만 완전한 만족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이 길을 따라 걷는다. 오랜 세월 버텨온 야생화가 만들어낸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 그 길에 있다.

맑은 날,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숲에 끝없이 펼쳐질 때 활짝 꽃을 피운 야생화를 본 적이 있는가? 야생화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생명력을 유지하고 저마다의 색깔로 활짝 피어난다. 나는 야생화가 활짝 핀 숲속을 거닐고 있다는 것에 대해 신비함을 느낀다. 계절은 정해진 절기로 순환하면서 쉼 없이 변화하고 있다. 숲은 분주히 깨어나는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 나 또한 숲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자연에서 자유를 느낀다. 가장 원초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느낌과 감각에 자극을 주어 현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늘 변화를 원한다.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정체되어 있지 않은 자연에서 봄의 새싹, 야생화 등 역동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자연을 보고 진리 탐구를 하기보다는 미적 탐구를 통해 감성적으로 느껴야 한다. 자유를 꿈꾸는 사람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찾아야 한다.

 

적당한 무관심

 

곰배령에 올라서면 평화로운 자연풍경이 펼쳐진다. 우뚝 솟아있는 나무 아래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점 길어진다. 산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지키려면 적당하게 무관심해야 한다. 너무 지나친 관심은 자연에 고통을 줄 뿐이다. 쓱 스쳐보면서 마음속으로 감탄해야 진정으로 자연을 위한 것이다.

큰 산맥은 여러 갈래의 지맥을 품고 있다. 웅장한 산봉우리는 호주머니의 송곳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산이 어느 산의 봉우리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작은 봉우리가 없으면 큰 산맥도 없는 것이다. 곰배령에서 점봉산, 설악산 중청과 대청을 바라본다. 마음은 소박해지고 사사로운 욕심은 어느새 사라지게 된다.

 

아름다운 기억

 

세월과 함께 잊히는 것도 있지만 자연과의 추억은 세월과 함께 아름다운 기억이 짙어진다. 찾아오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사람과의 만남처럼 산이 정답게 느껴진다. 농익은 자연풍경이 계절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슬프도록 푸르고 싶은 하늘을 바라보며 다짐한다. 자연과 사귀기 위해 이곳에 홀로 머물러야겠다. 자연은 홀로 있는 사람에게만 가슴을 연다.

 

누구나 유토피아, '이 세상에 없는 장소'를 꿈꾸며 세상을 살고 있다. 현실 상황이 복잡하고 힘들수록 이상에 대한 염원을 끝없이 추구하려고 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 즐거워지려면 마음과 상반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 속에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나 좋을 대로, 자유와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면 어디에도 없는 곳과 만나는 순간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떠돌이 여행자

 

봄의 산뜻함이 좋고 여름의 싱그러움이 좋다. 가을의 풍요로움이 좋고 겨울의 총명함이 좋다. 내 인생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었다. 인생은 떠돌이 여행자다.

나는 가끔 도보여행하면서 경험주의자가 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것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가장 멋진 하루를 살아가는 방법은 마음의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훌쩍 떠나온 인제 여행이 기쁘다. 공기가 바람에 녹아 솜사탕같이 달콤한 한밤 공기는 싱그러운 냄새를 품고 있다. 지금 이곳은 흐르는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다.

 

숙취

 

간밤에 마신 알코올의 취기가 아직 남았는지 머리가 무겁다. 술이 덜 깼는데 날씨가 화창해 왠지 슬픔이 몰려온다.

함께한 상대와 분위기에 따라 주량은 달라진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되지만 많이 마시면 마약과 같은 것이다. 숙취가 주는 지속적인 머리의 통증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을 주고 있다. 아침에 먹은 막국수의 소화되지 않은 것들을 원대리 야산의 급경사지에서 쪼그리고 앉자 비워내야만 했다.

 

숲을 보다

 

숲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미세하게 자라고 있는 나무의 생명력이다. 숲속으로 더 들어가니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생명줄을 놓아버린 전도된 나무와 부러진 나무들이 있었다. 본시 아름드리나무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폭설에 그 기상이 꺾이고 만 것이다.

숲의 햇빛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더욱 밝은색으로 지면을 비춘다. 바싹 말라버린 낙엽 사이에서 생명력을 키워낸 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숲에 들어왔던 햇빛은 다시 반사되어 숲을 빠져나간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변해 버린다.

 

천상의 화원

 

내가 돌단풍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올망졸망 제각각 놓여 있는 돌들 사이에서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작은 생명체 같은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을 거로 생각하는 장소에 생명의 씨앗을 키웠다. 나는 움직일 수 없는 자연의 피사체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찍었다. 그것은 내가 본 백만 송이 돌단풍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돌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돌단풍은 돌이 삶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한낮의 태양은 하늘 높이 떠 있고 내린천은 미세한 거품을 일으키며 찰랑찰랑 흘러간다.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는 반대편 강기슭, 물에 빠지더라도 열정적으로 건너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봄날의 내린천은 돌단풍의 보금자리이고 물소리의 힘찬 외침 속에서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내린천

 

내린천은 물길이 트면 그 방향으로 흐른다. 어떤 가식적인 치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내린천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고 있다. 계절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기적과 흐르는 물로 인한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물살이 주는 공포 때문에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오랜 산행으로 세숫대야에 찬물을 받아놓고 족욕을 하듯 그냥 발을 내린천에 담그고 싶었다.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바위에 철퍼덕 앉았다. 물이 주는 시원함에 잔뜩 취해서 세수도 했다. 오 맙소사. 1분도 안 지났는데 발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서리치며 얼른 물에서 발을 뺐다.

흐르는 물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물에 반사된 내 머리가 보인다.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내린천의 흐르는 물속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매우 친밀하고 떨어질 수 없는 친한 물고기와 물의 사귐인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사자성어처럼 그걸 말로 표현하려 노력했지만,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인생

 

시간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세월은 흐르는 내린천처럼 쉬지도 않고 계속 흘러간다. 때로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완만하게, 때로는 급류를 만난 성난 강물처럼 거침없이, 마치 폭포수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릴 뿐이다. 인생은 물처럼 흐르기 위해 사는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어느새 거대한 바다와 마주하게 된다. 바다는 물이 더해져도 흘러넘치지 않는다.

오늘도 내 인생은 내린천처럼 흐른다.

 

 

비 오는 제주, 갈 곳이 없어지고 할 일도 없어졌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문득 그런 날이 있다. 공기에 비 냄새가 섞여 있지만 내 마음을 적시기에 아직 양이 부족하다.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날씨라는 약간의 결핍이 필요하다.

안개에 물들고 싶은 새벽이다. 어둠을 바라보며 난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새벽부터 한라산 산행을 시작한다.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익숙함에 곧 안도감을 느낀다. 이 순간도 조만간 지나가겠지.

 

괜찮은 사람

 

세상에서 가장 짙은 어둠을 내 뒤에 두고 열심히 산을 오른다. 걸음에 집중하다 보니 먼동이 떴고 어느새 편백 숲이다. 위풍당당한 발걸음에 신이 절로 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평범하다, 특별하다'란 말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품 안에 자연을 담을 수 없지만, 마음속에는 나만의 자연이 존재한다. 숲을 지키는 나무는 하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준다. 숲은 인간의 본보기다. 나무는 홀로 살지 않고 이웃 나무들과 숲을 이룬다.

아직 익지 않은 과실처럼 숲의 냄새도 풋풋하다. 절기는 입춘을 지났지만, 조석으로는 겨울을 실감하게끔 쌀쌀하다. 한낮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한없이 높기만 하다. 산 정상에 오르면 하늘에 닿을까? 바다같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나룻배처럼 떠다닌다. 나뭇가지 사이로 맑고 투명한 햇빛이 대지에 닿으면 유릿가루처럼 빛을 낸다.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면 풋풋한 숲에서도 상큼한 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구상나무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고사한 구상나무지만 죽은 나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한라산의 아침은 평화롭고 구상나무는 싱그럽다. 푸른 색채에 빛나는 나뭇결무늬가 무성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얼어 있던 상고대가 녹아 무성한 숲으로 빛을 발산하며 스며든다. 한라산은 높지만 그윽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쉬고 싶을 때는 언제나 그곳으로 찾아가 내 보금자리를 만든다. 자연의 의연한 기상과 늠름함에 매료된 순간이다. 기분 좋다.

산은 구름에 기대어 살고 구름은 바람에 기대어 산다. 기대어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다. 오늘 내가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파도처럼 바람에 출렁이는 맑은 하늘이다.

한라산만 52번째

 

눈부시게 맑은 날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을 쳐다본다. 한반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보다 더 청량한 세상의 첫 공기를 마신다.

세상의 주인은 자연이다. 한 생명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세상을 자연으로부터 빌려 한평생을 사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소유욕은 자연을 황폐화한다. 끊임없는 소유욕은 언젠가 화마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자연이 원금이라면 자연이 사계절 동안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은 이자다. 세상 이치가 이자로 먹고살아야 한다. 원금으로 먹고살기 시작하면 금세 황폐해지고 만다. 물질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을 정복하려고만 한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고 어느 등산가의 욕망도 무궁무진하다. 구름으로 뒤덮인 날, 비바람이 부는 날,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 비록 환상적인 풍경을 못 보고 허공을 향해 고함만 지르다 가도 그저 좋았다. 복 받게도 오늘은 청량한 봄 날씨다. 나는 오늘의 한라산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1997년 나의 첫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약 1달 동안 하노이를 중심으로 베트남 북부여행을 다녀왔다. 2000,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10개월 동안 인도와 네팔을 여행했다. 낯선 곳에서 지낸 그때의 삶의 교훈은 인생의 여행자로서 삶에 초석이 되고 있다.

한 달 이상의 장기 여행이 좋은 이유는 여행이 일상이 되고 그 일상 속에 모험을 즐긴다는 점이다. 장기 여행은 정해져 있지 않은 불확실함과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불확실한 순간과 만남은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인생과 세계관을 변화시킨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준비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 일상을 벗어나면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내 일상이 된다.

 

딱하다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마음대로 해외여행을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땀 흘려 일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듯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녔던 그 날들이 그립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날씨와 상관없이 우울한 습기가 느껴진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소중하다. 한번 흘러간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여행자로서 확실한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자유로운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할수록 어느 장소이든 간에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한 줄기 바람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밤에 떠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노는 맛

 

1년 전, 나는 제주에 있었고 정확히 오늘 추자도로 향했다. 자연을 직접 보지 않고서 어떻게 글을 쓴단 말인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나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하늘은 맑아졌지만 바람은 멈추지 않아 파도가 심하다. 여행에 있어 파도가 심하게 출렁거리는 게 심각한 걱정거리는 아니다. 멀미로 고생한 여행이라도 보람과 살아있음을 느낀다. 퀸스타 2호 실내공기에 바닷냄새가 섞여 있다.

강풍이 휩쓸고 간 후 하늘도 땅도 그저 좋은 봄날이다. 바닷바람이 등을 떼밀어 추자도 숲길을 즐겁게 걷는다. 온전히 나를 보고 자연을 보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이 순간을 누릴까?

사람의 자취가 거의 없는 곳으로 바람을 피해 이곳에 왔다.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연장하고 싶어 나바론 절벽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추자도에 온다면 그때는 지금의 추자도는 아닐 것이다. 지금 난 차갑게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길에서는 나라는 사람의 꼬리표를 항상 떼고 다닌다. 유유자적 걷는 방랑의 삶도 참 멋지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봄 하늘, 흰 구름이 떠다닌다. 구름의 이동만큼 세월의 흐름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내 젊은 날의 자취가 구름과 함께 사라진다. 어떤 여행을 하든 간에 경험이 써 내려가는 삶의 드라마는 찬란하게 눈부시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여행은 부자유를 거부하고 세상을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다. 일에 얽매여 삶이 지쳤을 때는 현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휴식과 삶을 찾아 떠나야 한다. 낯선 곳을 여행하면 할수록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엉켜있던 생각의 끈이 실타래처럼 막힘없이 풀리게 된다. 바람의 방향에 자신을 맡기면 자연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다.

 

신체 리듬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보통 자정에 잠을 자고 오전 6시에 일어난다. 널리 알려진 수면 주기는 1.5시간이다. 나는 이 단위의 4배인 6시간을 잠을 잔다. 일과의 규칙성을 살펴보면 이는 이미 습관으로 자리 잡은 시간의 흐름 속 행동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생산활동, 유지활동, 여가활동으로 보낸다.

 

일주일 168시간을 기준으로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126시간이다. 직업의 종류가 다르고 근무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생산활동에 투입되는 시간은 40시간(표준근로시간)이다. 나머지 86시간은 이동, 식사 등 유지활동과 취미, 휴식 등 여가활동이다.

보통 여가활동은 TV 시청, 스마트폰 사용, 운동이나 영화감상 등이 대부분이다. TV보다 더 중독성이 강한 것이 스마트폰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스마트폰에 무아지경으로 빠진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스마트폰을 통해 자극적이고 얄팍한 정보를 눈으로 읽는 것에 불과하다.

주위에 기상천외하고 색다른 자극을 주는 것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 자극을 주는 모험을 찾아다녔고 거기서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자기계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이 하루하루 더해지면 큰 시간이 허공의 안개처럼 형체 없이 사라질 뿐이다.

 

내 인생을 걸고 가장 해 볼만한 일은 독서다.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전하지 않거나 너무 어려운 책을 선택하여 독서를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다수가 속하는 특별하지 않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유지활동과 여가활동의 시간을 잘 활용하면 삶이 알찰 수 있다. 나는 하루 6시간, 일주일에 42시간을 규칙적으로 책 읽기에 사용하고 있다.

누군가 정해 놓은 방식은 내 것이 아니다. 독서 시간도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기가 정한 시간과 목적이 뚜렷해야 독서에 몰입을 더할 수 있다.

 

독서는 놀라울 만큼 특별한 능력은 아니다.

 

지적 호기심은 끊임없이 두뇌를 발전시킨다. 읽고자 하는 열의만 있다면 나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질은 헤지거나 망가지면 내 버려지지만 읽어서 몸에 익은 것은 죽는 날까지 함께 한다.

독서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계속 흐르기만 하면 큰 바다가 될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두뇌를 썩혀야 하겠는가? 독서에 있어 졸업은 없다. 졸업은 곧 바보로 전략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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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들뜸으로 인한 부산스러움은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시간에 쫓기어 변화되어 가는 차창 밖의 흐름도 외면한 채 길을 재촉했다. 조금만 더 여유로웠더라면 인제에 잠시 들러 막국수 한 그릇의 즐거움을 위장에 담아 갔었을 텐데 그날도 초행길인 양 낯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두 주일 전쯤 그렇게 진부령에 발을 디밀었다.

 

대관령의 넉넉함이나 미시령의 더딘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르게 진부령은 늘 시리게 서럽다. 향로봉을 향해 백두대간의 걸음을 더는 옮길 수 없어서인지, 고성전망대에서 바라본 갈 수 없는 해금강의 아름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부령은 오늘도 서럽게 나를 맞는다.

오랜만에 흘리에 들렀다. 흘리는 넉넉해야만 한다. 백두대간 위에 선 그 만큼의 넉넉한 땅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허나, 흘리도 여전히 쓸쓸한 풍경으로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다. 아직은 겨울 끝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바람도 잦아들고 날도 많이 풀려 봄바람을 기다리는 때다. 곧 겨울을 밀어낸 움틈이 시작되면 진부령이나 흘리나 연둣빛 웃음으로 이웃을 맞을 것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선유실리로 이어지는 임도에 들었다.

 

넓게 펼쳐진 임도를 따라 늘어서 있는 나무들은 손짓으로 인사하며 우리 일행을 반기고, 저만큼 보이는 탑동리 너머 간성의 바다는 코발트 빛으로 어서 오라고 수작을 한다. 간성의 바다는 금강산 아래 해금강과 연이어 있다. 그리움 한 조각을 바람에 실어 간성의 바다에 보내본다. 혹여 바다의 흐름이 남쪽으로 향하는 때면 어떻게 하나라는 쓸데없는 걱정이 머리를 조여온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녀석을 밀어버렸다.

오늘은 이만큼으로 좋다. 시리게 서러운 진부령에도 연둣빛 움틈이 봄바람을 타고 올 때쯤이면 따스해 지리라.

 

다음날 평창의 발왕산에 올랐다. 초입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가슴팍을 후비는 냉기에 덕지덕지 옷을 겹쳐 입고, 장갑에, 모자에 정신이 없었다. 스키장 입구는 많은 이들의 걸음으로 분주하다. 추워질수록 행복한 그들은 리프트를 타기 위한 긴 줄 앞에서 마냥 즐거워한다.

잠깐의 절차를 마치고 곤돌라를 타고 발왕산에 오른다. 넉넉한 걸음으로 오르는 곤돌라 아래 여러 개의 활강코스가 눈에 들어온다. 날렵한 맵시를 뽐내며 활강하는 그들에게 발왕산은 온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사방을 할퀴면서도 앓는 소리조차 없이 몸을 맡기고 누워있는 발왕산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스키를 타본 경험은 없지만, 굳이 스키장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늘 그렇듯이 할퀴어진 세상을 보는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것도 삶의 한 방향이라고 되뇌며 발왕산에 도착했다.

 

영하 19.7, 발왕산이 이방인을 맞는다. 칼바람까지 더해진 정상은 체감온도 영하 30도 이하다. 즐거운 걸음을 하던 이방인들은 앙칼진 발왕산의 외침에 스카이워크 아래 대피소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내빼기 일쑤다.

옷깃을 여미고, 모자를 눌러쓰고 발왕산을 맞이한다. 백 년의 세월을 살아낸 나무들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산을 지키고, 산 아래 군상들은 오늘도 올망졸망 제멋으로 삶을 산다.

발왕산의 하늘은 푸르다. 발아래 흰 눈을 덧대어 그 푸르름이 더 하겠지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발왕산은 늘 푸르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칼바람을 타고 가슴으로 온다. 옆구리 한쪽에 그 큰 생채기를 안고 살면서도 의연하게 푸르른 발왕산에도 연둣빛 움틈이 곧 올 것이다.

 

어제 진부령의 봄이 66.9cm의 눈에 묻혔다는 소식이 바람을 타고 온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는다. 그 두꺼운 눈 이불 속에서 연둣빛 움틈은 봄을 재촉하고, 곧 나는 진부령으로 따스한 봄을 맞이하러 갈 것이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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