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배가 먼바다로 나오니 떨림의 강도는 조금씩 세졌다. 이층침대의 잔잔한 떨림은 꼭 안마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어컨의 바람 소리와 어긋나게 아래층 남자의 코 고는 소리도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괴상한 소리의 화음이 6인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6인실을 밖으로 나왔다.

동해의 해는 이미 떠 있었다. 흰빛의 둥근 해는 수줍은 듯이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 위로 제 몸을 일으켰다. 하늘과 구름과 바다 사이를 해가 구멍을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울릉도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갑판 위로 올라가 점점 가까워지는 울릉도를 바라보았다.

 

일출
울릉도
크루즈
크루즈 갑판

 

배의 떨림은 점점 사라져갔고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하선 안내방송이 있고 난 뒤 나는 울릉도에 첫발을 디뎠다.

오랜만이군

7년 만에 다시 울릉도에 온 것이다. 일기예보와는 반대로 약간 흐리기만 했지 비는 내리지 않았다. 새벽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여기는 울릉도 사동항이다.

강한 바람에 먼지가 사방으로 날리듯 배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적 끊긴 사동항 관광센터에서 버스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고요하고 아늑한 항구를 자유자재로 활공하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나도 울릉도를 자유롭게 다니고 싶어졌다.

 

사동항
하선

 

 

울릉 일주 버스를 탔다.

버스는 울릉도를 시계방향으로 이동하는 버스였다. 울릉도 서쪽 해안과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20여 분만에 학포에 도착했다. 경사진 마을 길을 걸어 학포야영장에 도착했다. 학포야영장은 선착순으로 자리 배치를 하고 있었다. 운이 좋게 두 번째로 도착하여 벚나무와 양버즘나무가 울창한 한정한 자리에 야영지를 구축했다. 집처럼 편안한 텐트 야영지에서 복분자 원액에 물을 타 마시며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수다는 계속되었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수다는 이번 울릉도 여행의 들뜬 분위기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 K는 몇 모금의 희석된 복분자에도 얼굴이 버찌가 익어가듯 울긋불긋 달아올랐다.

 

울릉도 버스시간표

2021_버스운행시간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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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버스
학포마을 입구
학포야영장
테크 9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학포야영장에서 오르막길을 올라 다시 일주 버스를 타고 현포로 왔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라본 현포항은 고즈넉했다. 그 어디에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방파제로 둘러싸인 항구는 아늑하고 평화롭게 보였다.

항구에서 바라본 노인봉과 칼바위가 웅장했다.

일주도로를 따라 등대 방향으로 걷다가 보니 그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칼바위가 웅장하게 보이더니 노인봉에 가까워질수록 노인봉의 주상절리에 감탄하여 버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노인봉과 칼바위
코끼리바위와 송곳봉
현포항과 현포마을

 

여행의 묘미는 머무름과 걷기에 있다.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멈춰 서는 것은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없다. 현포항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송곳봉과 코끼리 바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코끼리 바위가 나에게 말을 거는 듯 코로 물을 내뿜었다. 송곳봉을 보고 있으니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울릉도에서 첫 끼는 홍합밥이었다.

홍합을 많이 넣어 돈을 더 받아야 하는데

식당 주인은 의도적으로 우리 들으라는 듯 말끝을 흐렸다. 15,000원 하는 홍합밥을 20,000원은 받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우리가 마주한 홍합밥에는 당근만 가득하고 홍합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홍합 향만이 이 음식이 홍합밥인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홍합밥을 놓고 식당 주인과 손님의 동상이몽은

잘 먹었습니다

라는 말 한마디로 일단락되었다.

 

홍합밥

 

무작정 길을 걸었다.

오후가 되니 바람도 잔잔해지고 날씨가 맑아지기 시작해 더욱 후텁지근해졌다. 점심을 먹은 후 H 마트에서 시원한 캔맥주와 호박 막걸리를 구매했다. 일주버스를 타고 내려온 도로를 걸어가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가팔랐다. 30분쯤 오르막을 오른 후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부는 현포전망대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차가운 캔맥주를 마셨다.

누가 먼저 마시자고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캔맥주에 손이 갔다. 정자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현포항과 현포마을 풍경을 두 눈에 담으며 한 손으로는 캔맥주를 마셨다. 내가 집을 짓는다면 이런 장소에 짓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맨발로 전망대 이곳저곳을 서성이며 떠나기 아쉬워하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현포전망대

 

자동차를 얻어 탔다.

울릉도에서의 첫 번째 행운이었다. 현포전망대에서 만난 3인의 여성분들이 태하까지 차량으로 태워주셨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들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았다. 고부간에 여행은 정말 쉽지 않은데 시어머니와 딸, 그리고 며느리의 관계였다. 태하에 도착한 후 대풍감 모노레일 탑승장에서 감사 인사를 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해안 절벽을 걸었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해안 길을 따라 대풍감에 올라갔다. 황토굴의 흔적을 보고 해안 절벽을 올랐다. 모노레일보다는 느리지만, 자연을 감상하며 걷는 것이 더 중요한 순간이었다. 해안 길이 끝나는 지점에 숲속으로 숲길이 나 있었다.

 

황토구미
대풍감 해안산책로

 

전망대가 있었다.

7년 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전망대가 두 곳이나 있었다. 대풍감 제2 전망대와 제1 전망대였다. 전망대에서는 울릉도 북쪽 해안의 깎아지른 해안 절벽, 파도가 만들어낸 하얀 물거품, 산맥이 형성한 기암괴석, 그곳에 자리한 마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는 그 절경을 다 담을 수 없어 오랜 시간 그곳에서 머물며 가슴에 담고 있었다. 몇 분만 더, 1분만 더.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에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대풍감에서 내려왔다.

태하 H 마트에서 냉동 대패삼겹살을 샀다. 태하에서 학포로 다니던 옛길을 통해 고개를 넘어 학포야영장으로 향했다. 그 옛길은 태하마을과 학포마을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삶의 길이며 생활 길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울릉도 옛 사람들의 고된 삶과 삶의 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대풍감 전망대
대풍감
태하-학포 옛길

 

짧았지만 긴 하루를 보냈다.

호박 막걸리에 냉동 대패삼겹살을 안주 삼아 울릉도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있었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학포 해안에서 파도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숲속의 새도 사연이 있는 듯 이야기 좀 들어나 보라며 밤새도록 울부짖기 시작했다. 우리가 듣지 않는 것 같으면 울부짖음을 그치고 우리 곁을 낮게 활공하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별은 여기에 다 있었다.

고개를 들어 무심히 바라본 하늘에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이 밤하늘에 가득했다. 북두칠성도 보이고 카시오페이아도 보였다. 까만 도화지에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이곳저곳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을 따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별은 항상 내 가슴속에 있으니까! 울릉도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괭이갈매기
학포마을
학포해변
학포야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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