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쯤 서천의 벗으로부터 문득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벗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본래에도 자신만만하고 활달한 벗이긴 하나, 그날의 목소리는 더욱 기운찼다.

서천에 한번 와야것다.”

그려

그렇게 오랜만에 벗을 만난다. 그 잘난 전화기 덕분에 목소리로만 간간이 인사치레를 하다가 정말 오랜만에 벗을 본 것이다.

왔어, 현장에 가봐야 할 거 아녀?”

그려

그렇게 찾은 곳이 종천면에 있는 치유의 숲이다. 치유의 숲 입구에 저수지가 있고 그 둘레를 따라 무장애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본래의 업무인 유아숲 체험시설은 뒷전으로 밀리고 오랜만에 만난 벗은 노린재나무의 가치며, 저수지 옆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신갈나무 고목의 삶터며, 저수지 주변에 살고 있는 수달 이야기며, 끝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 그의 말 끄트머리에 주석을 달 듯 그대의 이야기가 옳으며, 저 정도 크기의 노린재나무면 족히 수십년의 삶을 살아냈을 법하고 또 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하여, 신갈나무 고목의 옆에서 무심한 듯 졸고 앉아 있으며 좋겠다는 이야기며, 수달이 살고 있는 이 삶터가 얼마나 중요성이 있는지 등속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내고 있었다.

오십을 넘은 중년의 두 사내는 마술에 걸린 듯 그렇게 끊임없는 수다를 풀어내며, 오후 시간을 저수지 위에 드리워진 산 그림자에 던지고 있었다.

세시쯤인가 사무실에 도착한 그가 묻는다.

막걸리 할 껴, 소주 할 껴?”

소주

그렇게 우리 둘은 서천특화시장 2층에 자리를 잡았다. 활어회와 쭈꾸미가 상 위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서로의 술잔을 채우기 바빴다. 그렇게 바삐 오가는 술잔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허공으로 유영을 한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기거나 오랜만에 만나니 정말 반갑다는 등의 이야기는 없다. 그저 수다스럽게 변한 두 중년의 남정네는 활어회가 남을 만큼의 수다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오랜만의 낮술은 기어이 해를 서쪽 바다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며칠 후 다시 인제 내린천에 들었다. 원대리 입구의 원대교에서부터 피아시까지 내린천의 비탈을 따라 걷은 걸음이었다. 인제의 산들은 여지없이 뒤축을 잡아당기고, 폭설에 부러진 고목들과 가시덤불들은 좀 쉬었다 가라고 옷소매를 당긴다.

얼마쯤이나 갔을까, 기어이 나타나서 길을 막는 암벽에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늘 길 아닌 길을 걸으며 쏟아내는 한숨같은 소리를 오늘도 결국은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있었다. 결국 나무와 바위에 구걸을 하며 겨우 내린천으로 내려왔다. 거만하게 곧추선 암벽에 그만 기가 죽어 천변에 지천으로 깔린 너럭바위에 주저 앉았다. 여울목인 그곳은 무심히 흐르는 내린천이 아니었다. 물이 많지않은 시기인데도 내린천의 노여움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한 만큼의 소리를 내며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비 오는 제주, 갈 곳이 없어지고 할 일도 없어졌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문득 그런 날이 있다. 공기에 비 냄새가 섞여 있지만 내 마음을 적시기에 아직 양이 부족하다.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날씨라는 약간의 결핍이 필요하다.

안개에 물들고 싶은 새벽이다. 어둠을 바라보며 난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새벽부터 한라산 산행을 시작한다.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익숙함에 곧 안도감을 느낀다. 이 순간도 조만간 지나가겠지.

 

괜찮은 사람

 

세상에서 가장 짙은 어둠을 내 뒤에 두고 열심히 산을 오른다. 걸음에 집중하다 보니 먼동이 떴고 어느새 편백 숲이다. 위풍당당한 발걸음에 신이 절로 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평범하다, 특별하다'란 말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품 안에 자연을 담을 수 없지만, 마음속에는 나만의 자연이 존재한다. 숲을 지키는 나무는 하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준다. 숲은 인간의 본보기다. 나무는 홀로 살지 않고 이웃 나무들과 숲을 이룬다.

아직 익지 않은 과실처럼 숲의 냄새도 풋풋하다. 절기는 입춘을 지났지만, 조석으로는 겨울을 실감하게끔 쌀쌀하다. 한낮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한없이 높기만 하다. 산 정상에 오르면 하늘에 닿을까? 바다같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나룻배처럼 떠다닌다. 나뭇가지 사이로 맑고 투명한 햇빛이 대지에 닿으면 유릿가루처럼 빛을 낸다.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면 풋풋한 숲에서도 상큼한 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구상나무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고사한 구상나무지만 죽은 나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한라산의 아침은 평화롭고 구상나무는 싱그럽다. 푸른 색채에 빛나는 나뭇결무늬가 무성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얼어 있던 상고대가 녹아 무성한 숲으로 빛을 발산하며 스며든다. 한라산은 높지만 그윽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쉬고 싶을 때는 언제나 그곳으로 찾아가 내 보금자리를 만든다. 자연의 의연한 기상과 늠름함에 매료된 순간이다. 기분 좋다.

산은 구름에 기대어 살고 구름은 바람에 기대어 산다. 기대어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다. 오늘 내가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파도처럼 바람에 출렁이는 맑은 하늘이다.

한라산만 52번째

 

눈부시게 맑은 날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을 쳐다본다. 한반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보다 더 청량한 세상의 첫 공기를 마신다.

세상의 주인은 자연이다. 한 생명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세상을 자연으로부터 빌려 한평생을 사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소유욕은 자연을 황폐화한다. 끊임없는 소유욕은 언젠가 화마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자연이 원금이라면 자연이 사계절 동안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은 이자다. 세상 이치가 이자로 먹고살아야 한다. 원금으로 먹고살기 시작하면 금세 황폐해지고 만다. 물질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을 정복하려고만 한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고 어느 등산가의 욕망도 무궁무진하다. 구름으로 뒤덮인 날, 비바람이 부는 날,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 비록 환상적인 풍경을 못 보고 허공을 향해 고함만 지르다 가도 그저 좋았다. 복 받게도 오늘은 청량한 봄 날씨다. 나는 오늘의 한라산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금산 인제 금산 인제 금산. 쳇바퀴치고는 좀 긴 걸음들을 무시로 옮기고 있었다.

 

인제에 들어 처음 찾은 곳은 상남면 미산동이다. 미산약수교 앞에 서서 개인약수를 품은 계곡을 바라본다. 올라가는 길이 눈에 선하고, 마음은 이미 저 앞으로 가고 있었다.

동행한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내린천에서 솟구치는 날카로운 바람에 흠칫 놀라 벌써 저만큼 나아간 정신을 끌어당긴다. 지역과 사람과 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아직은 찬 바람 속을 날고, 급히 한마디 보태느라 개인약수는 잊은 지 오래다. 그렇게 소개인동이며, 의식동 등을 돌고 돌아 인제의 짧은 걸음을 마쳤다.

다음날 곰배령을 찾아들었다. 기린면의 골짜기며 산봉우리들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림들이다. 오랜만에 스쳐 가는 그리운 풍경들, 방동리와 진동리의 골짜기들은 가만히 웅크린 채 숨죽여 봄을 준비하고, 곧추선 봉우리들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겨울을 무심한 듯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설피 마을까지만 겨우 걸음 하였다. 더 갈 수 없는 곰배령은 진부령 너머 해금강처럼 다음에 오라고, 좀 더 따스한 날에 걸음 하라고, 그렇게 그리움 짙은 손짓을 한다.

또 그리움이야! 허허허.’

 

다시 찾은 인제는 여전히 겨울을 털어내지 못하고, 제 죄인 양 새색시 걸음을 하는 내린천의 흐름은 시리게 곱다.

북사면에 기대어 사는 나무와 바위들은 여전히 추위에 떨며 봄을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도 따스한 볕이 드는 남사면 나무들의 허물을 벗듯 허연 기운을 가지 끝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래 얼마 남지 않은 게야!’

내린천을 따라 걸었다. 길 아닌 길을 걷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의 틀 안에서, 그 길이 결국 길벗들의 길이 되리라는 소망으로, 그렇게 그날도 거친 걸음을 하였다. 그래도 내린천을 곁에 두고 걷는 걸음이, 호위무사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변곡점마다 곁에 서서 지친 걸음을 다독여주는 인제의 봉우리들과 함께 걷는 걸음임에, 그날도 걸음만큼 행복했었다.

 

금산에 들었다.

천내리며, 길곡리며, 신안리며, 산안리 등을 돌고 돌았다. 제법 온기를 품은 볕이 골짜기마다 내려앉고, 삶터마다 작은 연둣빛 생명을 밀어 올리고 있다. 물론 잠깐 이는 바람 곁에는 아직도 찬 기운이 동행한다.

금산의 산들은 인제의 산들을 닮았다. 그 풍채와 상관없이 곧추선 봉우리들은 어깨를 으쓱대며 제 자랑질이 한창이다. 곧추선 만큼 깊은 것이 골짜기요, 그 걸음은 한없이 거칠어진다.

때론 한 걸음을 앞쪽에 놓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가 있다. 그 정도쯤 인제와 금산은 거칠게 닮았다. 그 길 아닌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길벗들의 길을 본다.

 

머지않은 날에 인제에 들 것이다.

이미 곰배령이며 백두대간의 걸음을 예정해 놓은 것으로 묶인 걸음의 서운함을 달래는 중이다. 작년 봄에 걸음 하였던 방태산의 가식 없는 선물 보따리들이 눈에 선하다. 얼레지, 바람꽃, 박새, 모데미풀, 연영초 등속은 기어이 백만 송이의 꽃으로 고운 화원을 그려내었다.

그만큼이 아니라도 좋다. 연둣빛 움틈이 시작되는 날 인제의 봄을 마중하러 갈 것이다. 오늘 금산에서 노란 첫봄을 보았다. 이미 남쪽에서 물밀 듯 밀려드는 봄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신안리 고운동 골짜기에 핀 생강나무꽃은 올해 나의 첫봄이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1997년 나의 첫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약 1달 동안 하노이를 중심으로 베트남 북부여행을 다녀왔다. 2000,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10개월 동안 인도와 네팔을 여행했다. 낯선 곳에서 지낸 그때의 삶의 교훈은 인생의 여행자로서 삶에 초석이 되고 있다.

한 달 이상의 장기 여행이 좋은 이유는 여행이 일상이 되고 그 일상 속에 모험을 즐긴다는 점이다. 장기 여행은 정해져 있지 않은 불확실함과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불확실한 순간과 만남은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인생과 세계관을 변화시킨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준비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 일상을 벗어나면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내 일상이 된다.

 

딱하다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마음대로 해외여행을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땀 흘려 일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듯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녔던 그 날들이 그립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날씨와 상관없이 우울한 습기가 느껴진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소중하다. 한번 흘러간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여행자로서 확실한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자유로운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할수록 어느 장소이든 간에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한 줄기 바람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밤에 떠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노는 맛

 

1년 전, 나는 제주에 있었고 정확히 오늘 추자도로 향했다. 자연을 직접 보지 않고서 어떻게 글을 쓴단 말인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나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하늘은 맑아졌지만 바람은 멈추지 않아 파도가 심하다. 여행에 있어 파도가 심하게 출렁거리는 게 심각한 걱정거리는 아니다. 멀미로 고생한 여행이라도 보람과 살아있음을 느낀다. 퀸스타 2호 실내공기에 바닷냄새가 섞여 있다.

강풍이 휩쓸고 간 후 하늘도 땅도 그저 좋은 봄날이다. 바닷바람이 등을 떼밀어 추자도 숲길을 즐겁게 걷는다. 온전히 나를 보고 자연을 보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이 순간을 누릴까?

사람의 자취가 거의 없는 곳으로 바람을 피해 이곳에 왔다.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연장하고 싶어 나바론 절벽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추자도에 온다면 그때는 지금의 추자도는 아닐 것이다. 지금 난 차갑게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길에서는 나라는 사람의 꼬리표를 항상 떼고 다닌다. 유유자적 걷는 방랑의 삶도 참 멋지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봄 하늘, 흰 구름이 떠다닌다. 구름의 이동만큼 세월의 흐름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내 젊은 날의 자취가 구름과 함께 사라진다. 어떤 여행을 하든 간에 경험이 써 내려가는 삶의 드라마는 찬란하게 눈부시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여행은 부자유를 거부하고 세상을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다. 일에 얽매여 삶이 지쳤을 때는 현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휴식과 삶을 찾아 떠나야 한다. 낯선 곳을 여행하면 할수록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엉켜있던 생각의 끈이 실타래처럼 막힘없이 풀리게 된다. 바람의 방향에 자신을 맡기면 자연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다.

 

여행의 들뜸으로 인한 부산스러움은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시간에 쫓기어 변화되어 가는 차창 밖의 흐름도 외면한 채 길을 재촉했다. 조금만 더 여유로웠더라면 인제에 잠시 들러 막국수 한 그릇의 즐거움을 위장에 담아 갔었을 텐데 그날도 초행길인 양 낯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두 주일 전쯤 그렇게 진부령에 발을 디밀었다.

 

대관령의 넉넉함이나 미시령의 더딘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르게 진부령은 늘 시리게 서럽다. 향로봉을 향해 백두대간의 걸음을 더는 옮길 수 없어서인지, 고성전망대에서 바라본 갈 수 없는 해금강의 아름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부령은 오늘도 서럽게 나를 맞는다.

오랜만에 흘리에 들렀다. 흘리는 넉넉해야만 한다. 백두대간 위에 선 그 만큼의 넉넉한 땅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허나, 흘리도 여전히 쓸쓸한 풍경으로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다. 아직은 겨울 끝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바람도 잦아들고 날도 많이 풀려 봄바람을 기다리는 때다. 곧 겨울을 밀어낸 움틈이 시작되면 진부령이나 흘리나 연둣빛 웃음으로 이웃을 맞을 것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선유실리로 이어지는 임도에 들었다.

 

넓게 펼쳐진 임도를 따라 늘어서 있는 나무들은 손짓으로 인사하며 우리 일행을 반기고, 저만큼 보이는 탑동리 너머 간성의 바다는 코발트 빛으로 어서 오라고 수작을 한다. 간성의 바다는 금강산 아래 해금강과 연이어 있다. 그리움 한 조각을 바람에 실어 간성의 바다에 보내본다. 혹여 바다의 흐름이 남쪽으로 향하는 때면 어떻게 하나라는 쓸데없는 걱정이 머리를 조여온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녀석을 밀어버렸다.

오늘은 이만큼으로 좋다. 시리게 서러운 진부령에도 연둣빛 움틈이 봄바람을 타고 올 때쯤이면 따스해 지리라.

 

다음날 평창의 발왕산에 올랐다. 초입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가슴팍을 후비는 냉기에 덕지덕지 옷을 겹쳐 입고, 장갑에, 모자에 정신이 없었다. 스키장 입구는 많은 이들의 걸음으로 분주하다. 추워질수록 행복한 그들은 리프트를 타기 위한 긴 줄 앞에서 마냥 즐거워한다.

잠깐의 절차를 마치고 곤돌라를 타고 발왕산에 오른다. 넉넉한 걸음으로 오르는 곤돌라 아래 여러 개의 활강코스가 눈에 들어온다. 날렵한 맵시를 뽐내며 활강하는 그들에게 발왕산은 온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사방을 할퀴면서도 앓는 소리조차 없이 몸을 맡기고 누워있는 발왕산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스키를 타본 경험은 없지만, 굳이 스키장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늘 그렇듯이 할퀴어진 세상을 보는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것도 삶의 한 방향이라고 되뇌며 발왕산에 도착했다.

 

영하 19.7, 발왕산이 이방인을 맞는다. 칼바람까지 더해진 정상은 체감온도 영하 30도 이하다. 즐거운 걸음을 하던 이방인들은 앙칼진 발왕산의 외침에 스카이워크 아래 대피소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내빼기 일쑤다.

옷깃을 여미고, 모자를 눌러쓰고 발왕산을 맞이한다. 백 년의 세월을 살아낸 나무들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산을 지키고, 산 아래 군상들은 오늘도 올망졸망 제멋으로 삶을 산다.

발왕산의 하늘은 푸르다. 발아래 흰 눈을 덧대어 그 푸르름이 더 하겠지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발왕산은 늘 푸르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칼바람을 타고 가슴으로 온다. 옆구리 한쪽에 그 큰 생채기를 안고 살면서도 의연하게 푸르른 발왕산에도 연둣빛 움틈이 곧 올 것이다.

 

어제 진부령의 봄이 66.9cm의 눈에 묻혔다는 소식이 바람을 타고 온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는다. 그 두꺼운 눈 이불 속에서 연둣빛 움틈은 봄을 재촉하고, 곧 나는 진부령으로 따스한 봄을 맞이하러 갈 것이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출장을 좋아하는 직장인이 있을까?

나는 대전을 벗어나는 출장을 종종 여행으로 생각한다. 출장은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게 해 주고 지역의 맛 난 음식도 먹을 기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출장을 다닌 만큼 돈도 벌 수 있다는 점이다.

 

출장의 동반자가 여행의 동반자다

 

2009년 지리산 둘레길부터 그와 함께 출장을 다녔다. 내 모든 출장의 90% 이상이 그와 함께였다. 악연일까? 필연일까?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를 만난 지도 벌써 만30년이 되었다.

일요일 오후,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만났다. 여행은 아무 생각 없이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다. 즉흥적이든, 계획적이든 떠난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매일을 살아가는 명랑함으로 나만의 여행을 즐기자. 여행은 그곳에 스며드는 것이다.

 

도담삼봉과 도담행복마을

 

원주에서 단양으로 숙박지가 변경되었다.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감싸고 돈다. 내 체취를 싣고 먼 유랑의 길을 떠난다. 비로소 나는 도담삼봉을 바라보며 바람과 하나가 되었다.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한다. 먼 곳을 돌아온 바람을 다시 이곳에서 만났다.

강물과 인접한 산은 가파르고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햇빛을 받아 흰빛을 띤다. 마을 앞 강변은 세월의 색을 머금은 엄숙하고 냉담한 자연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강 건너서 이곳을 바라보면 많은 사람의 자취가 엉성하게 얽혀 있다.

마음을 꺼내어 보여줄 수 없듯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눈의 잣대로 잴 수 있겠는가?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내 마음도 감정에 따라 변하지만, 자연은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존재한다.

겨울은 견디는 계절이다. 해가 질 무렵이라 그런지 단양은 한층 추위가 느껴진다.

 

술한잔

 

단양은 누구나 꿈꾸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다.

얼어붙은 남한강에 반해 소주 한잔, 고독한 순간에 찾아와준 벗이 좋아 맥주 한잔,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막걸리 한잔, 한잔하다 그만 취하고 말았다. 세상은 아름답다.

겨울밤, 문밖을 서성이는 달은 고요히 우리를 엿듣고 있다. 이 밤이 새도록 공중에서 빛나며 어느 슬픈 영혼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날 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세상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느 슬픈 영혼의 가슴에 희망의 줄기가 트였다.

 

원주 백암산

 

등산은 외로움을 달래고 마음을 단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

등산의 목표가 높은 봉우리를 오르는 것이라면 진정한 기쁨은 비탈을 오르는 과정에서 얻게 된다. 평지와 달리 산은 굴곡이 있기에 육체적 고통은 피할 수 없으나 감정의 희열을 폭넓게 느낄 수 있다. 산의 굴곡은 가파른 비탈을 숨겨 놓고 나를 기다린다. 비탈에 올라서면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환상적인 풍경과 더불어 살 떨리는 아찔함을 동시에 느낀다.

하늘을 떠다니는 흰 구름, 창공에 몸을 싣고 하늘을 나는 새, 눈 쌓인 깊은 산속을 헤매며 먹이를 찾는 짐승들, 아무도 나를 가두지 않았는데 갇혀 있는 느낌이 든다.

산은 탁 트인 능선에서 보아야 먼 산도 잘 볼 수 있다. 남의 손에 던져질 돌멩이보다는 웅장한 산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바위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높은 하늘 아래 웅장한 능선에 서 있다. 나는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다. 산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산봉우리는 산행 경로의 일부에 불과하다. 대지와 산이 연결되고 산과 산이 이어져 있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끝없이 퍼져나간다. 그 경로의 끝은 어디인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기에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스로 경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가능에 도전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된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의 시작은 설렘이고 여행의 끝은 아쉬움이다.

 

그 아쉬움이 있어 여행에서 느낀 모든 감정이 간절한 그리움으로 남게 된다. 그리움이 더해지고 새로운 날이 밝아오면 예전처럼 떠날 것이다. 여행의 맛은 이런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동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공간을 지배하는 계획은 기어이 지친 몸뚱어리를 아무렇게나 삶 속으로 밀어 넣는다.

늦은 일요일 오후 결국 길을 나섰다. 월요일에 보기로 한 벗에게 전화를 해 보지만 대답이 없다. 어느 곳으로 길을 잡아야 하나!

 

식이와 만난 후 또 다른 일행과 약속한 곳으로 차를 몰았다. 조금 늦어지는 일행과 여전히 불통인 벗과 기다림 속에 지쳐가는 커피와 함께 일요일 오후는 나른하다. 나머지 일행이 막 약속 장소에 다다를 무렵 벗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막 지친 몸뚱이를 일으켰단다. 모두 나른한 오후, 그나마 갈 곳이 정해졌으니 다행이려니 하며 단양으로 길을 잡았다.

 

북단양 요금소를 지나 단양 쪽으로 얼마쯤을 가는데 식이가 도담삼봉을 강 건너편 도담마을에서 보자고 한다. 사실 도담삼봉을 처음 보기도 하거니와 강 건넛마을이 궁금하기도 하여 가던 길을 돌려 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시린 겨울날 도담삼봉과 첫 대면을 했다. 뭍에서 섬으로 사는 바위산은 제법 의좋게 서 있기도 하거니와 그 도도함은 자못 큰 산 못지않았다. ‘좀 더 따스한 날에 올걸다만 아쉬움을 도담마을에 묻어두는 것으로 서운함을 대신했다.

단양에 들었다. 얼어붙은 남한강이 먼저 인사를 한다. 단양의 곧추선 산들이야 일찍이 안면을 튼 사이지만 오늘도 그 의연함은 여전하다. 곧이어 벗이 오고 반가움의 표현이 서툰 우리는 그저 손 한번 맞잡은 것으로 일 년여의 세월을 대신했다. 몇 순배 돌아가는 술잔에 녹슨 담장 같은 추억들이 허공으로 유영을 하고, 불콰해진 얼굴 위에 새겨지는 주름들은 술자리만큼 늘어만 간다.

 

십수 년 전 내포문화숲길을 한참 기획하던 때쯤, 내포의 이 선생과의 술자리가 길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묻는다. “내포의 길은 우리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준비하여 별걱정이 없는데, 당신과 나의 길은 도대체 무엇이오?” 잠시 뜸을 들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 지금 이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한 곳을 함께 바라보는 마음이 우리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벗과 함께 길을 물었다.

 

신림면 황둔리에서 감악산으로 들었다. 능선길로 시작되는 첫걸음부터 급경사가 시작되고, 조금 완만하다 싶다가도 금방 곧추선 능선은 발 뒷굽을 챈다. 그렇게 겨우다 올라왔느냐는 환상에 젖어 들 때쯤 나타난 암벽은 낯선 여행자의 기대를 철저히 꺾어 놓았다.

식이가 밥이나 먹고 하잖다. 미리 준비한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마련하고는 살얼음이 가득한 찬물과 함께 억지로 위장에 욱여넣었다.

암벽을 기어오르고, 옆으로 돌아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고, 다시 암벽을 오르고, 다시 돌아가고, 기어이는 감악산 정상에 섰다. 오히려 올라오다가 만난 암벽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훨씬 경쾌할 만큼 정상은 오히려 평범하다. 정상에서 만난 작은 돌탑이 위로한다. ‘그만큼이 삶이지 않은가!’

첫걸음을 내디디고, 시간의 흐름 속에 떠밀려 공간을 유영하는 하루는 그리 보람차거나 희망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하루하루가 삶의 조각이자 좋든 싫든 미래에 그려질 내 인생의 초상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감악산에 그려놓은 한 조각의 삶을 조심조심 여미어 주머니에 넣고는 산에서 내려가며, 오늘도 괜찮았어라고 되뇌어 본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길 위에 인생이 있다.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비가 온 후 맑게 갠 기분 좋은 아침이다. 세 번째 여권갱신을 한 후 벌써 1년이 지났다. 20, 30대에는 먹고사는 현실적인 경제문제에 부딪혔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해외여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길 위에 인생이 있다. 나에게 길은 여행이다. 내 인생의 최대 승부처인 여행에 이제는 시간제한을 두고 싶지 않다. 아직은 40대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지만, 한국 나이로는 벌써 50대에 접어들었다.

마흔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분기별로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다. 문득 생각나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린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면 더 좋겠지만 직업은 직업일 뿐이다. 직업이 되었을 때 더는 좋아지지 않는다. 현실은 취미로 하는 것과 직업으로 하는 것은 다르다. 난 여전히 여행이 취미다.

 

여행은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남겨둔 것에 대해 고민하지도 미련을 두어서도 안 된다. 여행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면 마음 닿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 여행은 사무치게 외로울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달콤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여행지에서는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닌다. 지나치게 빠른 이동보다는 느린 속도로 공기 온도를 느끼는 그런 여행이 좋다. 속도가 느린 만큼 감성의 온도는 높아진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

아름다운 경치는 내 눈과 적당한 거리에 위치해서 내 눈길을 머물게 하는 풍경이다. 여행의 즐거움은 흘깃 쳐다본 낯선 장소에 상상력을 더하는 것이다. 어느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면서 마음에 평온을 찾는 것이다.

 

여행은 삶의 일부분이다.

 

특별한 목적을 두지 않는다. 여행 그 자체가 좋을 뿐이다. 지금은 어떤 나라나 도시를 마음에 두고 꼼꼼히 여행을 준비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장소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다. 떠나고 싶은 장소가 있고 떠나고 싶은 순간이 오면 어느새 그곳에 내가 가 있다.

여행은 인생의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바람의 물결이 흐른다.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은 맑게 갠다. 나그네처럼 세상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한다. 정처 없이 한 곳에 갔다가 정처 없이 그곳을 떠난다. 거친 세상이지만 절대 서러워하지 않는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을 떠난다. 어떤 경험을 한 여행이든 추억은 남는다. 여행 중에 불쑥 뭔가를 깨닫게 되고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기쁨을 느낀다.

 

여행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두 가지를 통해 이룰 수 있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여행을 통해 능력의 한계를 계속 넓혀 자아실현을 이루고 있다.

약간의 들뜸, 낯섦, 힘듦, 감탄. 여행은 언제나 한밤의 꿈처럼 짧게 느껴지고 풍요롭고 다채롭다. 행복에 대한 시각은 여행을 다닐수록 달라진다. 내 앞에 펼쳐질 여행지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닌 여행 중에 발견되는 것이다.

 

지금도 망설이고 있다면

 

여행을 가느냐, 그냥 이대로 있느냐에 대해 자문해 보라.

뭘 보기 위해 여행을 가느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낯선 곳의 짙은 땅 냄새, 초목 냄새,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고 눈부신 파란 하늘을 보기 위해 떠난다.

여행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여행한 곳은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여행은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처음을 경험하러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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