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두 번째 방문이다.
오후 3시 40분, 보름 만에 다시 단양을 향해 출발했다. 맑은 하늘 아래를 달리던 차는 어느새 비구름 속에 갇히고 말았다. 포세이돈의 삼지창이 대지를 때린 듯 하늘의 수문이 열렸다.
오늘의 맑음은 어제의 비로 대체되었다.
비는 창문 표면으로 한두 방울씩 떨어졌고 와이퍼를 느린 속도로 작동시켰다. 제천을 지날 때는 많은 비가 내렸다. 비의 양에 비례해 와이퍼 속도를 빠르게 또는 느리게 조절했다. 와이퍼는 비를 닦고 되돌아오면서 창문을 조금씩 흐리게 만들었다. 2시간 후, 차는 고속도로를 달려 북단양IC를 지나쳤다.
비는 내리고 또 내렸다.
단양에 도착했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봄비는 겨울 가뭄에 바싹 메말라 죽어가던 대지를 촉촉이 적셨다. 대지는 봄비로 인해 생명수를 얻은 셈이다. 단양에 올 때마다 숙박하던 그라다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빗속을 뚫고 찾아온 벗이 반가웠나 보다. 단양에 사는 지인과 삼겹살에 술잔을 마주 잡았다. 계산 없는 즐거움이 술자리에 가득 찼다. 비 오는 밤이라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밤은 점점 깊어졌다.
비로 인해 어둠이 더욱 까맣게 변했다. 남한강과 소백산과 하늘의 경계가 없어졌다. 남한강을 비추던 조명은 어둠 속에서 한층 더 선명해졌다. 비는 조명에 취한 듯 멋진 야경을 부러워하며 남한강으로 떨어졌다. 남한강도 이내 조명에 불타고 말았다.
흰 구름이 소백산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오전 7시, 아침을 먹으려고 모텔을 나왔다. 상상의 거리에서 남한강 건너 소백산을 바라봤다. 어제 보았던 소백산의 풍경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고요함을 배우고 한가로움을 훔쳤다.
내 마음에 틈이 있어야 빛이 스며들 수 있다. 내 마음이 넓어지니 구름 덮인 산을 보고도 그 매력을 빠져 고요함을 즐기게 되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이 나의 한가로움이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아침을 먹으려고 단양시장 내 ‘충청도순대’에 갔다. 백종원의 3대천왕에 나왔던 식당이다. 그동안 단양에 올 때마다 각기 다른 음식을 먹었다. 아침에는 주로 황태해장국을, 점심에는 자장면을, 저녁에는 마늘 소고기, 마늘 떡갈비, 장어, 삼겹살, 쏘가리 매운탕을 먹었다.
편의점 커피를 마신 후 차에 탑승했다.
황정산 자연휴양림으로 목적지를 설정했다. 차는 단양을 벗어나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대강면을 지나 황정리에 들어섰다. 대흥사를 지나 구불구불한 숲속 도로를 천천히 운전 중이었다.
눈으로 확인된 것은 두 마리였다.
머리는 검은색이고 가슴 주변으로 금빛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한 마리는 산 경사지의 콘크리트 축대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도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멸종위기 야생동물 Ⅱ급인 담비였다.
나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량 소리에 놀랐던지 단비는 혼비백산하여 숲으로 달아났다. 나는 지금까지 단비를 5번 정도 목격했다. 모두 다 깊은 산속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도로변에서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비를 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의 흥분된 감정은 내 머릿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단비를 두 눈으로 봤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아인 셈이다.
황정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단비의 흔적을 뒤로 한 체 석화봉으로 향했다. 휴양림에서 석화봉까지는 길이 나 있다. 세 군데이고 모두 등산로이다. 나는 C 코스로 접어들었다. 이 등산로는 찾기가 쉬웠다. 계곡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등산로는 점점 넓어지고 경사는 완만해졌다.
때죽나무, 신갈나무도 있지만, 대부분은 굴참나무였다. 굴참나무는 굵고 곧게 뻗어 있었다. 말라 비틀어진 숲에도 노란 꽃을 피우며 존재를 과시하는 나무가 있었다. 굴참나무 아래로 샛노란 연둣빛 꽃을 피운 생강나무였다. 아직 만개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올해 처음 생강나무꽃을 본 것이다.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다채로운 꽃과 열매를 맺는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다.
숲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낙엽은 먼지처럼 숲에 쌓여있다. 생명력을 읽은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오랫동안 켜켜이 숲에 쌓인 것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내게 알리느라 분주했다. 나는 그 소리가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색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추겨 줄 뿐이었다.
낙엽은 그냥 버려진 것이 아니다.
생명을 잉태한 어머니 자궁 같은 곳이다. 두껍게 쌓인 낙엽 속에서 땅은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고 추운 겨울 동안 씨앗은 얼지 않고 땅속에서 견딜 수 있다.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점점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등산로는 계곡 끝에서 능선과 연결되었다. 그 지점에서 하얗게 말라버린 투구꽃 열매를 발견했다. 화려한 꽃만 보다가 이런 모습을 보고 매우 당황스러웠다. 능선은 가팔랐다. 굴참나무가 주를 이루는 계곡과 달리 소나무가 점점 많아졌다. 등산로 주변으로 사방오리도 몇 그루 자생하고 있었다.
처녀치마를 발견했다.
처녀치마는 낙엽에 덮여 있었다. 얼핏 봐서는 처녀치마인지 아닌지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손으로 낙엽을 치우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고 녹색의 잎만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꽃망울이 꽃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숲이 노래했다.
양지바른 곳에는 햇빛이 노래했고 가파른 능선에선 바람이 노래했다. 바람의 노래에 화답하듯 소나무 우듬지가 부드럽게 춤을 추었다.
일종의 풍경놀이를 시작했다.
그저 말없이 정상에 올라 숲의 기묘한 형태를 바라봤다. 맑은 하늘,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구름, 아직 겨울이라고 말하고 있는 눈 덮인 소백산 연화봉 정상,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산맥들과 그 속의 기암괴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오랜 시간 풍파를 견뎌낸 소나무가 서 있다. 척박한 곳에서도 숲의 포용력과 충만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숲은 아름다움과 끔찍함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다. 숲은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나는 숲을 관찰하지만, 숲은 나를 관찰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숲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다. 오늘 난 석화봉을 오르내리면서 숲이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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