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일 토요일

계절은 가을이지만 기온은 여전히 여름이었다. 나는 계룡산을 찾았다. 천정골에서 등산을 시작한 후 큰배재, 남매탑, 삼불봉, 자연성릉, 관음봉, 은선폭포, 동학사로 하산을 했다. 주말이라 등산로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숲속 나뭇잎은 여전히 녹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1027일 목요일

날씨가 화창한 가을날이라 오랜만에 다시 계룡산을 찾았다. 자동차를 타면 10분 남짓한 거리이지만 버스를 타도 동학사 종점까지 15분이면 도착한다. 습관적으로 천정골로 등산을 시작했다.

 

10월 8일
버스에서 바라본 계룡산 장군봉
10월 27일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을씨년스럽다.

나뭇잎 떨어진 숲에는 무수한 낙엽들이 뒤엉켜 층을 이루고 있다. 계곡에 떨어진 낙엽은 물길을 가로막고 등산로는 낙엽 밟는 감촉과 함께 부스럭 마른 소리가 났다. 나무의 잎은 누렇고 붉게 점점 물들고 있었다.

 

호흡을 조절했다.

평지를 걷는 것처럼 오르막을 쉬지 않고 걸었다. 오버페이스(overpace)를 하면 호흡이 거칠어지고 힘이 많이 든다.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게 속도를 조절하면 비탈이 심한 등산로도 쉽게 오를 수 있다. 평소보다 2분 늦은 37분 만에 큰배재에 도착했다.

 

천정골
큰배재

 

나무는 월동준비를 시작한다.

늦가을이 찾아오면 나무는 잎을 떨어뜨리려고 더는 물을 보내지 않는다. 가지와 나뭇잎 사이에 떨겨층이 있어 바람에 잎이 쉽게 떨어지게 한다. 떨겨층에 막혀 양분이 줄기로 가지 못하면 햇빛을 받아 만들어낸 녹말(탄수화물)은 쌓이게 되고 엽록소가 파괴된다.

 

단풍 색깔은 수종별로 다르다.

붉은색은 단풍나무, 붉나무, 사람주나무 등이 있고 노란색은 은행나무, 생강나무, 자작나무 등이 있으며 갈색은 고로쇠나무 등이 대표적이다.

 

단풍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단풍이 들 수 있는 조건이 충분하다.

가을 단풍은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커야 하지만 영하로 내려가면 안 되고 일사량이 많아야 한다. 또한, 너무 건조하지 않은 적당한 습도가 유지돼야 한다.

 

사진을 찍을 때를 제외하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붉고 누르게 변한 나뭇잎은 눈을 호강하게 하고 솔솔 부는 가을바람은 이마의 땀을 식혀줬다. 남매탑을 지나면서 물을 마시고 자두 맛 사탕을 입에 물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돌계단과 철제계단에 영상처럼 상영되었다. 종아리 근육이 조금 땅겼고 발걸음이 조금 늦춰졌지만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10월 8일 남매탑
10월 27일 남매탑
10월 8일 돌계단
10월 27일 돌계단

 

산은 매일 조금씩 변해간다.

변화는 관심을 가지고 볼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인 공간에 마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사라질 것 같아 핸드폰을 들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굳게 닫혀 있던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나니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엔 산과 구름과 바람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삼불봉에 올랐다.

삼불봉에서 바라보던 계룡산 주 능선의 모습이 내 방만큼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다. 각양각색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계룡산의 가을 풍경은 아름다움을 살펴 찾는 나의 안목을 충족하기에 그만이었다.

 

10월 8일
삼불봉

 

계룡산의 매력은 많은 조망에 있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맥은 시선을 확장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다. 삼불봉에서 내려다볼 때 불쑥 솟아오른 굴곡진 능선, 주름치마 같은 산맥의 주름, 저수지를 둘러싼 황금 들녘은 계절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게 만든다.

 

가을 낮의 햇살이 산뜻하게 농촌의 들녘에 쏟아져 내린다.

들녘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농촌 들녘을 바라보는 나의 머릿속에 풍성함평화로움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산맥, 호수, 들녘이 이토록 융화되는 농촌 풍경은 흔하지 않다.

 

계룡산 주능선
들녘

 

등산로는 암반을 피해 능선 좌우로 연결된다.

도시의 가로수와 다르게 생긴 나무들이 나를 맞는다. 나무껍질, 줄기, 잎사귀가 도시에서 보던 나무들과는 다르다. 나무는 공간여행을 하지 못한다. , 여름, 가을, 겨울 시간을 통해 여행한다. 지형이 험할수록 생명력이 더욱 강해진다. 나무는 시간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능선은 뾰족한 암반들로 이루어져 있다.

등산로는 흙길, 암반, 목재계단이나 철제계단에 따라 폭이 좁아졌다가 넓어지면서 때론 넓어졌다가 좁아지면서 자연성릉까지 이어진다. 안전울타리 너머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 아래의 광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저 멀리 동학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숲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연성릉
동학사

 

하늘에 설레고 땅에 평온함을 느낀다.

이 능선을 넘어가면 하늘과 닿고 저 능선을 넘어가면 땅과 닿는다. 하늘이 땅을 품고 땅이 또 하늘을 보듬는다. 나는 하늘을 붙잡고 땅을 붙잡아서 오늘 하루를 즐기고 있다.

 

자연성릉에서 관음봉으로 올라가는 철제계단은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동학사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나뭇잎들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가을에 나무가 잎을 떨구는 건 봄에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해서다.’ 나는 언젠가는 가지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나뭇잎을 뒤로한 채 아쉬운 마음을 간직하고 관음봉에 올랐다.

 

철제계단
관음봉

 

많은 사람이 산을 오른다.

각자 다른 길을 통해 산을 오르지만, 목적지는 같다. 각자 관심 있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여 바라볼 뿐이다. 같은 산을 오르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수많은 발자국이 산에는 교차한다.

산을 오른다는 건 발자국을 산에 남기는 것이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내 발자국이 남는다. 내 머릿속에 그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매번 그 발자국을 난 글로 남기려고 노력 중이다.

 

이번엔 동학사가 아닌 연천봉을 거쳐 갑사로 하산할 생각이다.

 

문필봉과 연천봉
연천봉에서 바라본 문필봉, 관음봉, 천왕봉

 

가을이라도 똑같은 단풍은 없다.

저 멀리 나무와 바위 사이로 색의 물결이 흐른다. 가을엔 흐르지 않는 숲은 없다. 오늘 나는 색의 물결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숲속을 거닌다. 숲에 쌓인 단풍이 내 발자국을 적신다. 떨어진 낙엽에서 바짝 마른 잎 냄새와 가을바람의 선선함을 느꼈다.

 

틈을 발견했다.

한낮인데도 나무 지붕이 햇빛을 막아 숲은 어둠이 내려앉은 듯 고요하다. 다른 식물들과 공존해가며 숲에 활력을 더하는 여백의 공간이며 채움의 공간인 계곡엔 물이 흐르고 있다. 가을바람에 우듬지를 흔들며 갈참나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어느새 고로쇠나무, 고욤나무, 팽나무도 합세한다. 나는 자연이 만들어낸 가락에 장단을 맞추며 갑사로 하산을 했다.

 

계곡

계곡물

갑사

[황정산 자연휴양림 - 석화봉]

 

편의점 커피를 마신 후 차에 탑승했다.

황정산 자연휴양림으로 목적지를 설정했다. 차는 단양을 벗어나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대강면을 지나 황정리에 들어섰다. 대흥사를 지나 구불구불한 숲속 도로를 천천히 운전 중이었다.

 

눈으로 확인된 것은 두 마리였다.

머리는 검은색이고 가슴 주변으로 금빛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한 마리는 산 경사지의 콘크리트 축대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도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멸종위기 야생동물 급인 담비였다.

 

 

나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량 소리에 놀랐던지 단비는 혼비백산하여 숲으로 달아났다. 나는 지금까지 단비를 5번 정도 목격했다. 모두 다 깊은 산속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도로변에서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비를 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의 흥분된 감정은 내 머릿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단비를 두 눈으로 봤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운아인 셈이다.

 

 

황정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단비의 흔적을 뒤로 한 체 석화봉으로 향했다. 휴양림에서 석화봉까지는 길이 나 있다. 세 군데이고 모두 등산로이다. 나는 C 코스로 접어들었다. 이 등산로는 찾기가 쉬웠다. 계곡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등산로는 점점 넓어지고 경사는 완만해졌다.

 

때죽나무, 신갈나무도 있지만, 대부분은 굴참나무였다. 굴참나무는 굵고 곧게 뻗어 있었다. 말라 비틀어진 숲에도 노란 꽃을 피우며 존재를 과시하는 나무가 있었다. 굴참나무 아래로 샛노란 연둣빛 꽃을 피운 생강나무였다. 아직 만개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올해 처음 생강나무꽃을 본 것이다.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다채로운 꽃과 열매를 맺는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다.

 

 

숲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낙엽은 먼지처럼 숲에 쌓여있다. 생명력을 읽은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오랫동안 켜켜이 숲에 쌓인 것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스럭부스럭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내게 알리느라 분주했다. 나는 그 소리가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색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추겨 줄 뿐이었다.

 

낙엽은 그냥 버려진 것이 아니다.

생명을 잉태한 어머니 자궁 같은 곳이다. 두껍게 쌓인 낙엽 속에서 땅은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고 추운 겨울 동안 씨앗은 얼지 않고 땅속에서 견딜 수 있다.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투구꽃

 

점점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등산로는 계곡 끝에서 능선과 연결되었다. 그 지점에서 하얗게 말라버린 투구꽃 열매를 발견했다. 화려한 꽃만 보다가 이런 모습을 보고 매우 당황스러웠다. 능선은 가팔랐다. 굴참나무가 주를 이루는 계곡과 달리 소나무가 점점 많아졌다. 등산로 주변으로 사방오리도 몇 그루 자생하고 있었다.

처녀치마를 발견했다.

처녀치마는 낙엽에 덮여 있었다. 얼핏 봐서는 처녀치마인지 아닌지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손으로 낙엽을 치우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고 녹색의 잎만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꽃망울이 꽃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처녀치마

 

숲이 노래했다.

양지바른 곳에는 햇빛이 노래했고 가파른 능선에선 바람이 노래했다. 바람의 노래에 화답하듯 소나무 우듬지가 부드럽게 춤을 추었다.

 

일종의 풍경놀이를 시작했다.

그저 말없이 정상에 올라 숲의 기묘한 형태를 바라봤다. 맑은 하늘,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구름, 아직 겨울이라고 말하고 있는 눈 덮인 소백산 연화봉 정상,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산맥들과 그 속의 기암괴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석화봉

 

항상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오랜 시간 풍파를 견뎌낸 소나무가 서 있다. 척박한 곳에서도 숲의 포용력과 충만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숲은 아름다움과 끔찍함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다. 숲은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나는 숲을 관찰하지만, 숲은 나를 관찰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숲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다. 오늘 난 석화봉을 오르내리면서 숲이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소백산 산행 - 벼르고 별렸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등산복을 입는 것은

도전을 입는 것이고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오르는 것은

도전을 신는 것이다.



사진출처 : 블랙야크 명산 유성도전단 밴드



셰르파와 함께하는 명산산행

블랙야크 명산 유성도전단들과 함께

소백산을 찾았다.


도전이라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


고맙습니다.





느린 발걸음은

주변을 보다 자세히 보고

관찰하는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빠른 발걸음은

온몸이 땀으로 젖어

노폐물이 분비될 때 시원함을 느낀다.


처음엔 느린 발걸음으로 시작했지만

부지불식간에 빠른 발걸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내가 걸어 들어온 숲에

자연이 숨죽이며 깨어나고 있다.


내 시선은

나뭇가지 사이의

허공을 향하고 있지만


내 평화로운 마음은

숲속을 향해 열려 있다.


마음으로 자연을 느껴본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연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눈을 보면 즐겁고

상고대를 보면 기쁘고

멋진 설경을 보면 그냥 행복하다.


산을 오르는 동안 내가 힘들지 않게

솜사탕 같은 흰 눈의 달콤한 속삭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보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했던 상고대가 시작되었다.


첫사랑은 사랑이 처음이라 감정 표현에 서툴다

산을 오를 때마다 내 서툰 첫사랑은 내 가슴을 앓게 만든다.


내 안에 첫사랑의 감정이 없다면

자연의 신비에 설레이지 않을 것이다.


앞 사람의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조용히 포개며 걸었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멈췄다고 산행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가지를 벋은 나무가

다른 나무를 껴안고 있다.


가지 사이에 상고대 터널이 만들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되야 한다.

흔들려야지만 꺾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바람과 함께 나무는 춤을 춘다

춤을 춰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정상에 올라 가뿐 호흡을 내쉰다.

지구도 같이 호흡을 해서 바람을 내게 보내줬다.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곳에 서 있다.


흰 눈으로 둘러쌓인 정상은

구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상에 올라섰을 때의 느낌은

결코 올라서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감싸고 돈다


내 체취를 실고

먼 유량의 길을 떠난다.


비로소 나는

바람과 하나가 되었다.


걸음을 멈췄다.


먼 곳을 돌아온 바람을

다시 이곳에서 만났다.


바람이 나부끼는데로

가벼운 모든 것들이 방향을 바꾼다.


정상석을 곁에 두고 다시 길을 찾는다.

이제 하산할 준비를 해야 한다.







소백산 정상에서

칼바람속에 내동댕이 쳐졌다.


칼바람의 고통도

견딜 수 있을때까지가 고통이다.


바람을 마주하고 서면

바람은 오장육부를 훑으며 분다.


최대한 체온유지를 해야한다.


바람을 등지고 서서

최대한 바람과 맞섰다.


어찌 된 일인지

칼바람속에서도 따뜻함을 느꼈다.






눈 덮힌 산을 보고

춥다고 생각하는 사람


백색의 세상이 눈부실정도로

맑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은 자연을 바라보지만

각자가 느끼는 감정은 정반대일 수 있다.





겨울이 오기를

눈이 내리기를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벼르고 별렀다.


모진 추위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꽃봉오리처럼 피어난 상고대, 순백의 그림자가

눈부신 슬픔으로 내 가슴에 스며든다.


이제 겨우 모습 보였는데

벌써 안녕이라고 인사한다.


차가원진 내 손끝에

상고대의 속울음이 느껴진다.





상고대의 옷을 입은 나무 앞에 섰다.


비밀 대화를 나누는 연인처럼

나무와 나 사이는 아주 가까웠다.


나의 시선은 늘 서럽고 애달픈 것들을 향해 있다.


차가운 칼바람이 흘러 들어와

내 몸을 식히고 쿨하게 사라져 버렸다.





해를 등지고 어의곡으로 하산을 했다.


눈을 뒤집어 쓴 채 서 있는 나무

눈을 이고 늠름하게 서 있는 나무


나무 위에 쌓인 흰 눈은

살짝 구겨진 흰 눈이다.


세월이 지나면이 멋진 풍경도 사라져 버리겠지

사라져 간 모든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한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만이

등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등산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낮은 곳으로

내려오려고 올라가는 것이다.


어색한 침묵의 순간처럼

오늘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칠갑산 산행 - 어느 화창한 날



어젯밤, 달이 떴다.


토끼가 방아 찧는

어릴적 그 달은 아니다.


달에 인간이 발을 디딘후부터

날의 신비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른 아침

두개의 해가 떴다.


하늘에 뜬 해

저수지에 비친 해


삭막한 도심을 벗어나

따뜻함이 느껴지는 천장호에 왔다.


아무도 오지 않은 출렁다리를

걷는 것처럼 기분 좋은 게 없다.






아래서 위를 올려다 본다


칠갑산 정상

내가 가야할 곳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다.


아래서 올려다 보는 것보다

즐거움이 더 크다.






공기는 햇빛에 반짝거리고

햇빛은 감미롭게 다가온다.


높은 것에 대한 도전의지가 필요하다.

남이 반할 만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가야산(충남) 산행 - 바람 부는 날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좋다.


주체적인 삶을 살면

자연처럼 평화로운 상태에 놓인다.





흙 냄새와 어우러져

낙엽 냄새가 향긋하다.


우연히 찾아온 가야산(충남)이

우울했던 감정을 즐겁게 바꿨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흔들려야지만 꺾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나무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춘다

춤을 춰야만 세상을 살 수 있다.






비가 왔었다.

어제와 내일사이에서


한겨울 해가 저물면

그 자리에 서서 오는 밤을 바라본다.


빗방울은 흙과 바위사이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채 얼어버린다.


길쭉한 고드름이 되었다.


해를 향해 기도하는 물빛

고드름마다 그 색깔이 다르다.


빗방울이 고드름을 데려왔다.

고드름 빛이 숲속에 은은하게 퍼진다.







오늘 하루는

죽어라고 바람이 분다.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아무 생각없이 걷고 있다.


눈을 감고

바람소리를 듣는다.


바람이 몇번이나

잎 떨어진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흔적없는 바람의 날에 베여

내 마음까지 쓰리고 아프다.


어색한 침묵의 순간처럼

오늘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나무의 아름다움은

숲에 의해


숲의 아름다움은

산에 의해


산의 아름다움은

명산도전으로 정상에 섰을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된다.

덕유산 산행 - 움직이지 않는 구름은 구름이 아니다



새벽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입김이 어둠속에 하얀 자국을 남겼다.


찬 바람도 불고 있다.

몸을 움츠리고 잰 걸음으로 움직였다.





대전복합터미널에서 구천동행 첫 차를 타고 왔다.

나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은 덕유산을 찾은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이곳이 더 추웠다.


장갑을 끼려고 보니 왼손장갑이 없다.

아무래도 차에다 놓고 내린 듯 하다.






구천동 계곡을 따라 걸었다.


봄에는 산뜻해서 좋고 여름에는 싱그러워 좋고

가을에는 풍요로워 좋고 겨울에는 총명함이 좋다.


내 인생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물소리의 차가움만큼

장갑을 끼지 않은 내 왼손이 시렵다.


겨울이다.

추위에 떨지 마라

점점 봄은 다가온다


추운 겨울에도

봄이 온다는 것이 감동적이다

봄이 오기도 전에

난 그 봄을 맞이하고 싶다


봄아!

넌 지금 어디쯤 오고 있니?





백련사를 지나 향적봉으로 향했다.

흰 눈을 밟을수록 더운 단단해지는 눈 길을 만들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한다.

체온이 10도는 올라간 것 같은 기분이다.


고통이 극에 달하는 극한 상황에서 묘한 충동을 느꼈다.





눈밭에 벌러덩 드러눕고 싶다.

순간의 감정, 충동이라 그런 것이다.


숲에 흩어져 쌓여버린 눈들이

가장 완벽한 자연을 만들었다.


눈은 솜이불처럼 포근하다.







이 산능선을 넘어가면 하늘과 닿고

저 산능선을 넘어가면 땅과 닿는다.


하늘이 땅을 품고 땅이 또 하늘을 보듬는다.


하늘에 설레고 땅에 평온함을 느낀다.

하늘을 붙잡고 땅을 붙잡아서 지금 이순간을 살아간다.







자연은 홀로 있는 사람에게만 가슴을 연다.


세월과 함께 망각되는 것도 있지만

자연과의 추억은 세월과 함께 아름다운 기억이 짙어진다.


찾아오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사람과의 만남처럼 산이 정답게 느껴진다.


농익은 자연풍경이 계절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슬프도록 푸르고 싶은 하늘을 바라보며 다짐한다.

자연과 사귀기 위해 이곳에 홀로 머물러야겠다.









구름 밑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나는

희고 다양한 모양의 구름을 무심히 올려다 본다.


움직이지 않는 구름은 구름이 아니다.

자국을 남기지 않는 구름은 구름이 아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또 올려다 본다.

구름사이로 해가 나를 엿보고 미소 짓는다.

2020년 신년산행 - 계룡산 삼불봉



한해가 지나고 2020년이 시작되었다.


새해의 첫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절대로 두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계룡산으로 향했다.

랜턴으로 어둠을 물리치면서 삼불봉으로 향했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새해 첫 해돋이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삼불봉 주변이 구름의 장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 마음속 해에게 다짐을 한다.

2020년 나의 한단어는 '인내심'이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합니다


늘상 마음속으로 되내이는 말들이다.

올해의 나의 작은 바램도 외쳐본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닌다.

매일 글을 쓴다.

언제나 즐겁게 산다.

치과치료를 마친다.

매일 명상을 한다.






산은 구름에 기대어 살고

구름은 바람에 기대어 산다.

기대어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아갈만한 곳이다.


산, 구름, 바람도 서로 기대어 사는데

상처받은 이 세상에 내가 기댈곳은 어디인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나는

따뜻한 내 가슴에 기대어 본다.





겨울은 흙에서 난 것들이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계절이다.


가진 것보다 못 가진 것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아무렇지 않게 느낀 내 감정이 나의 말을 빌려 표현되니

나 같은 사람도 시인이 되게 만든다.





구름사이로 고개를 내민 햇빛은

남매탑에 영광의 빛을 비추며 구름을 타고 계룡산을 넘어가고 있다.


남매탑 주변을 돌며 다짐한다.


남들과 비교하여 우쭐하거나 낙담할 필요 없이

확고한 나 자신의 삶을 앞으로 살아가자.





오늘 내가 본 하늘은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이

파도처럼 바람에 출렁이는 맑은 하늘이다.


오늘도 난 사고의 자유를 꿈꾸고 있다.

한라산 등산(어리목~영실)



어제 오랜만에 한라산 산행을 했다.

평소보다 무리한 탓에 종아리가 심하게 뭉쳤다.


가볍게 마사지를 해 보지만

뭉친 근육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어리목으로 왔다.

숙소에서 잠깐 망설이다 바로 결정을 내렸다.


풀잎은 이슬을 무서워하지 않기에

새벽마다 이슬이 앉았다 사라진다.






산행으로 뭉친 근육은

산행으로 풀어야 한다


경험은 자신과 비슷한 입장이 된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려주는 가이드가 된다.


결코 좋고 나쁨이 아니다.








아주 느리게 걸었다.

간혹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빛이 흐른다.


계단에서 계단으로

사제비동산에서 만세동산으로

만세동산에서 백록담 북벽으로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면 가장자리가 환하다.







한라산 북벽이 어둠을 쓸어내리고

주변 풍경이 햇빛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혀로 맛보는 기쁨

배로 느끼는 만족감

마을으로 누리는 뿌듯함


어리목 대피소에서 라면을 먹었다.

양달을 깔고 앉은 한때는 이내 응달이 된다.








이제는 뭘 해야 하지?


까마귀가 나를 보고 뭐라 그런다.

'선문대 할망'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문대 할망은 몸집이 큰 거인이었다.


앉아서 쉴 곳을 마련하기 위해

치마폭에 흙을 가득 담아 제주도 한가운데 부었다.

그렇게 한라산이 생겼다.


치마폭 사이로 흘러내린 흙덩어리들은 오름이 되었다.





구상나무는 한 곳을 오래 바라보다

이곳에서 달려오는 생을 온 몸으로 막았다.


다가오는 흰 계절의 감옥이 지나도

구상나무는 그대로 그곳에 서 있을 거다.






기억은 종종 기억을 버리고

기록이 되는 쪽을 택한다.


나는 내 기억을 버리고 지금 기록을 남긴다.


종이 위에 글을 쓰지 않고

구름, 나무, 계곡, 바위 등 자연의 수 많은 지면위에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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