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설쳤다. 새벽까지 마신 술 때문인지 잠이 깊게 들지 않았다. 4시간이지만 '자다 깨다'를 수없이 반복한 것 같다. 오늘도 어김없이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조식을 먹으러 갔다. 무열 형, 진호 형, 내가 맥주 3병을 커피잔에 나눠마시며 고수를 잔뜩 넣은 쌀국수와 베이컨으로 해장을 한다. ‘겨우 2.3%인데.’ 우리에게 맥주는 더이상 술이 아니다.

 

오늘이 여강(리장)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리장 다부객잔에서 편안하게 이틀을 보냈다. 오전 8, 짐 정리를 한 후 체크아웃을 한다. 아침이라 기온도 낮고 바람이 스산하게 분다. 나도 모르게 옷깃을 세우고 있다. 버스를 타고 흑룡담공원(黑龙潭公园)으로 향한다. 도로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탄 오토바이와 승용차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흑룡담은 옥룡설산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이 옥수채를 거쳐 이곳에서 호수를 이룬다. 수정같이 맑은 물에 비친 옥룡설산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호수 주변으로 버드나무, 고염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심겨 있다. 오전이라 해가 들지 않는 곳이 많아 쌀쌀했다. 공원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여강(리장)은 티베트로 향하는 차마고도의 시작이다. 옥룡설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여강(리장)은 한눈에 봐도 분지이다. 오른쪽 차창으로 옥룡설산의 모습을 보며 흑룡담에서 버스로 1시간 20여 분을 왔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호도협으로 향한다. 호도협 호랑이 동상 오른쪽으로 금사강이 흐른다. 금사강은 황금색 모래가 있는 강을 뜻한다. 버스로 5분을 더 가면 호도협 입구에 도착한다. 우리는 유료로 이용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고 씩씩하게 계단으로 내려갔다. 옥룡설산도 다녀왔는데 이 정도는 우습다.

 

 

 

협곡에 한걸음 가까워질수록 금사강은 포효하듯 울부짖고 있다. 호도협(虎跳峡)은 포수에게 쫓기던 호랑이 한 마리가 강물 한가운데 바위를 디딤돌로 삼아 단숨에 강을 건넜다 하여 불리게 되었다. 거대한 호랑이 동상이 금사강과 바위를 배경으로 설치되어 있다. 걸음을 멈추고 호도협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굉음 속에서도 이상하리만큼 편안함을 느낀다.

협곡을 뒤로하고 계단을 오른다. 호도협은 옥룡설산(운남)과 하바설산(예전 티벳)을 사이의 거대한 협곡이다. 그 산세가 험해서 설산의 비취색 물이 가파르게 굽이치는 곳이 많아 역동적이며 박진감 넘친다. 물은 아래로 흘러 양쯔강을 흘러간다. 협곡의 전체 길이는 23km이다. 호도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 차마고도의 일부이다. 

 

이제 차마고도로 가자.

 

 

 

 

 

호도협에서 차마객잔까지는 승용차를 이용한다. 차량은 호도협을 출발하여 가파른 비탈길을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코너를 돌 때마다 먼발치에서 자연이 만들어낸 장엄한 협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렇게 20여 분이 지난 뒤 작은 마을에 들어선다. 가파른 설산에 기대어 사는 소수민족 마을이다. 앞에는 기암괴석이 거대한 산맥을 이루는 옥룡설산이 펼쳐지고 뒤로는 하바설산 끝자락에 기대어 선 자그마한 객잔 차마객잔(茶馬客栈)’이 나를 반긴다.

 

차마객잔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전망대로 올라간다.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거대한 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평지보다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가볍게 내리쬐는 햇살도 한여름 직사광선보다 더 뜨겁다. 탁 트인 시야에 끝없이 펼쳐진 협곡, 협곡 사이 벼랑에는 좁은 길의 흔적이 실타래를 늘어놓은 듯 길게 이어져 있다.

어떤 시설도 필요치 않다. 그저 편안하게 앉아 사위를 둘러볼 수 있는 의자 하나면 충분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암벽의 웅장함이 있는 풍경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흐르는 시간을 붙들고 싶다. 우리는 샹그릴라에서 생산된 블랙야크 맥주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차마객잔의 매력은 전망만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한국 사람들의 흔적은 음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토종 닭백숙, 돼지고기 김치 볶음, 마파두부, 오이 등 그 어떤 음식을 내와도 우리 입맛에 맞았다. 맥주를 마시면서 토종닭 다리를 손에 쥐고 뜯어먹는다. 토종닭이라 약간 질기지만 한국에서 먹었던 그 맛이다.

객잔 내부에 가득한 한글로 쓴 낙서의 흔적들. 지금은 사라진 종로 피맛골 어느 주점의 정겨움이 이곳에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마파두부에 밥을 비벼 먹었다. 식당을 나오기 전 옥룡설산이 내다보이는 유리창에 네임펜으로 흔적을 남긴다.

 

하늘그린 차마고도를 오다.

가을비 내리는 날 다시 올게요.

2023. 11. 24.

 

 

 

 

차마객잔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또다시 맥주를 마시며 의자에 앉아 옥룡설산을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유쾌한 시간은 없는 듯하다. 떠나는 아쉬움을 단체 사진으로 마무리하고 차마고도로 향한다. 마당 한쪽에 부겐빌레아가 차마고도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말해주는 듯 빨갛게 꽃을 피우고 있다.

 

 

 

차마고도(茶馬古道)는 티베트와 인접한 쓰촨과 윈난 지역의 차()를 티베트고원의 말()과 물물교환하던 오랜 옛길(古道)을 말한다.

이젠 누구나 경험할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는 차마고도를 걷는다. 차마객잔에서 중도객잔까지 천천히 걸으면 약 2시간이 걸린다. 소수민족 마을을 지나고 설산의 벼랑의 좁은 길을 걷는다. 옥룡설산과 하바설산이 만든 신비한 작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두 눈에 담아둔다. 차마고도를 걷고 있는 이 순간, 깊고 험준한 협곡이 만들어낸 길에서 삶의 처절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길의 음지는 봄, 가을의 서늘함이 있고 길의 양지는 뜨거운 여름의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늘에 닿을 듯한 옥룡설산 위로 더운 한낮의 태양이 마지막 빛을 발산한다. 셔츠를 벗어 머리에 뒤집어쓰고 메리야스만 입은 채 걷는다. 그때 척박한 이곳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를 발견한다. 생명이 있는 곳이라면 어떻게든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길은 종단구배가 거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어느 모퉁이를 돌았을 때 작은 천막이 눈에 들어온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소수민족 할머니가 차, 음료, 맥주 등을 팔고 있다. 모른 척 지나갈 수 없어 캔맥주를 샀다. 냉장고가 없는데도 손에 쥔 맥주는 차갑다. 한 모금씩 나눠마시고 계곡으로 이어진 길을 계속 걷는다. 어느새 중도객잔이 있는 마을에 들어섰다.

 

한 번쯤 걸어보고 싶었던 그 길을 이렇게 걸었다.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를 탄다. 꼬불꼬불 경사진 벼랑길을 빠르게 내려간다. 운전에도 등급이 있다면 운전사는 최소 4단 이상일 것이다. 호도협을 지나쳐 버스로 왔다.

 

 

 

버스를 타고 여강(리장) 시내로 향한다. 아침에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젠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속하고진까지 2시간이 걸렸다. 이곳은 리장고성과 같은 모습이지만, 사뭇 다른 느낌이다. 리장 고성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속하고진은 높은 봉우리 아래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다.

윈난 원두커피를 찾아 인적 드문 골목을 재빠르게 걷는다. 주어진 시간은 40분이지만 커피를 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해외여행을 다닐 때마다 그 나라, 그 지역의 커피나 차는 꼭 사 온다.

 

 

 

순식간에 서쪽 하늘 아래로 해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찾아온 짙은 어둠은 상점의 불빛에 희석되어 엷어지고 있다. 저녁을 먹으러 한식당 백운정(白雲亭)에 왔다.

얼마나 많은 삼겹살을 구웠는지 식당 바닥이 기름기로 미끈거린다. 우리도 이에 질세라 뜨거워진 불판에 삼겹살을 굽는다. 고기 굽는 냄새에 몸이 반응한다. 소맥 한잔 마시고 고기를 가득 넣은 쌈을 먹는다. 물론 공깃밥, 김치찌개, 된장찌개도 덤으로 먹는다. 이번 여행 중 식사 중 이렇게 화기애애한 적은 처음인 것 같다. 특히 볶음밥은 신의 한 수였다.

 

승남아~ 잘 볶았다.’

 

 

 

여강(리장)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버스를 타고 서둘러 여강 산이공항으로 향한다. 오후 1025분 청두(성도)행 비행기의 탑승수속을 마치고 현지가이드와 이별을 했다. 이후 일정은 특별한 것이 전혀 없었다. 자정에 도착한 청두(성도)에서 첫날 숙박했던 천부국제호텔에서 잠깐 잠만 잔 후, 오전 6시에 청두 텐푸공항에 가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어느덧 여행을 다녀온 지 2주가 지났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확실해지는 기억보다 더 정확하게 내 삶을 기록하기 위해 언제나 여행기를 쓴다. 이번 여행기를 쓰는 동안 여행을 되새김질하다 보니 감회가 새롭다. 사람은 삶을 보는 관점과 삶을 사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함께하면서 큰소리로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기에 그 순간이 행복했다. 언제나 함께 웃었던 그 순간의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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