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베트남 여행]-3일차(12/10), 앙코르 투어(앙코르와트, 앙코르 톰, 쁘레아 칸, 네악뻬안, 타 솜, 동 메본, 타 프롬, 프놈 바껭 등)
별빛이 흐르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렇게 많은 별을 본지가 대체 언제였던가? 한국에서는 이런 광경을 좀처럼 보기 쉽지 않기 때문에 한동안 숙소를 나와 계단으로 향하는 테라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새벽 공기마저 나를 취하게 했다.
앙코르와트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4시 40분부터 자전거를 타고 어둠 속을 달렸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 뜻하지 않게 부족했던 단백질 공급도 받았지만, 낮과 달리 새벽 공기는 시원하고 상쾌했다. 어둠 속에서 스쳐 지나간 모든 것들이 내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입장권 검사를 마치고 자전거를 앙코르와트 서문 해자 무지개다리 앞 입구 공터에 주차했다. 오토바이는 주차장에 주차해야 하지만 자전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해자 무지개다리 입구까지 타고 다닐 수 있고 인근 공터에 주차할 수도 있다.
아직 어둠이 짙은데 세계 각지에서 온 많은 사람이 앙코르와트 일출을 보려고 왕의 문과 참배로 걸어 남쪽 연못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날씨가 흐려 원하던 일출은 못 보았지만, 연못에 반사되는 앙코르와트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어스름이 사라진 이곳에 내가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원을 이루었고 버킷리스트 중 또 하나를 지우게 되었다. 아마도 올해는 새로운 버킷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곳을 방문하기에 앞서 임헌갑이 쓴 ‘천년의 신화 앙코르와트를 가다’를 여러 번 읽었고 다큐멘터리 영상을 여러 개 찾아봤다. 벽면 부조를 그냥 보는 것도 좋지만 그 의미를 알고 보면 조금 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12세기 초 크메르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사원 앙코르와트를 건설했고 국력은 동남아시아를 압도했다. 그 주역은 위대한 건설자 수리야바르만 2세였다. 처음엔 힌두교 사원이었다.
벌써 24년이 흘렀다. 뉴밀레니엄 시대가 열린 2,000년도 초부터 1년 가까이 인도에 살았는데 힌두교와 힌두사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앙코르와트의 정문이 서쪽에 있는 이유도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 때문이다.
명예의 테라스를 지나 1층 회랑에 들어서자 반시계방향으로 돌며 마하바라타(쿠루 평원 전투), 수리야바르만 2세, 천국과 지옥, 우유 바다 젓기, 비슈누의 승리, 크리슈나의 승리, 신과 악의 전투, 라마야마(랑카의 전투) 부조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각 면에는 2개씩 총 8개의 신화 이야기가 펼쳐진다.
십자 회랑을 지나고 2층 회랑을 돈 후 밖으로 나오면 인간 세상에서 신의 세상으로 들어오게 된다. 인간이 신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이곳에 오르는 계단은 엄청나게 가팔랐다. 앙코르와트의 마지막 3층 회랑을 돌다가 한참 동안을 그곳에 앉아 신들의 산, 수메르를 우러러봤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앙코르 톰으로 향했다.
앙코르와트에서 북쪽으로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힌두교의 천지창조를 묘사한 석상이 있는 나가 교를 지나 남문을 통과하니 정면에 바이욘 사원이 보였다. 참파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톤레사프 전쟁의 회랑부조를 볼 수 있는 곳이며 이곳은 불교사원이다.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수리야바르만 2세와 더불어 크메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 자야바르만 7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직 오전 9시도 되지 않았는데 햇살이 성깔을 부렸다. 그때 갑자기 찾아온 복통으로 서쪽 공용화장실로 부리나케 이동했다. 속이 편안해지고 나서야 주변 숲에 서식하는 야생원숭이 무리가 보였다. 사람들이 접근해도 익숙한 듯 피하지는 않았다. 일주일 후 호치민에서 껀저 원숭이 섬에 갈 예정이었는데 안 가도 될 것 같다.
연신 차가운 물과 음료를 골고루 마시며 최대한 그늘을 통해 천천히 주변을 걸어 다녔다. 바푸온 사원, 피미언아까, 문둥왕 테라스, 코끼리 테라스를 둘러보고 다시 자전거가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다시 북동쪽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불편한 안장 때문인지 엉덩이가 아팠다. 10여 분이 흐르고 신성한 칼이라는 뜻의 쁘레아 칸에 도착했다. 식당 앞 공터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사원을 향해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수많은 나무와 초목 사이에서 폐허로 남아 있던 사원은 여전히 복원이 진행 중이었다. 이미 앙코르와트와 앙코르 톰을 둘러보았기에 다른 사원들이 허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놀람이나 감동이 밀려들기보다는 허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각 사원만의 독특한 특색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앙코르 유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건축물과 유사한 곳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와 통로 사이의 문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
이번에는 동쪽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사원인 네악뻬안,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양으로 인공섬에 만들어진 사원이다. 자야호수에 설치된 다리를 따라 사원으로 들어가며 자야호수는 자야바르만 7세가 도시에 안정적인 물 공급을 위해 건설한 것이다.
다리 좌우로 자야호수에 떠 있는 연꽃과 수생 나무들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여 발걸음을 붙잡았다. 핸드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보지만 두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사진이 찍히지 않아 아쉬웠다.
태양을 마주 보고 길을 따라 걸었다. 연못 중앙에 중앙 성소가 있었고 동서남북에 작은 연못이 배치되어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돌다가 숲에 가려 그늘이 된 남쪽 연못 의자에 앉아 한국에서 가져간 간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시원한 음료를 목구멍 깊숙이 들이부으며 보이스톡을 이용하여 경익 형과 통화를 했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로 접어들었고 힘차게 페달을 밟아 타 솜에 도착했다. 정문 역할을 하는 고푸라는 앙코르 톰 사면 상 고푸라와 같고 전체적인 모습은 해자만 없지 쁘레아 칸과 닮은 듯 보였다.
다른 곳과 다르게 선명한 압사라 부조가 눈에 띄었지만 세밀하게 정교하지는 않았다. 사원을 감싸고 있는 나무는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 되었지만 줄기 부분이 잘린 채 사면 상 고푸라와 마주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날씨는 무더워졌다. 남쪽을 향해 페달을 밟아 동 메본에 도착했을 때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한참 동안 뭉친 근육을 풀려고 손으로 마사지를 했다. 10분쯤 지나고 근육이 풀렸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나도 모르게 내 쉬었다.
동 메본은 10세기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 건설된 것으로 원래 저수지 위에 세워진 수상사원이지만 현재에는 저수지 물이 말라 평탄한 육지처럼 보였다. 각 모서리에 있는 코끼리 상은 땅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했다.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건축된 사원은 시간이 흘러 독특한 질감으로 변형되었다.
남쪽으로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아 쁘레 룹을 지났다. 우회전한 후 서쪽으로 페달을 밟으면서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저수지인 스라스랑이 왼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저수지를 지나면 사원과 주변 나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반테이 끄데이(Banteay Kdei) 사원을 지나게 된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타 프롬에 도착했다.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세운 불교사원이다. 동쪽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나무 둘이 울창한 밀림 속을 걸어 들어갔다. 동쪽 탑 문에 가까워질수록 사원을 감싸고 있는 스퐁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영화 툼 레이더의 앤젤리나 졸리 모습이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 보던 그곳에 내가 지금 서 있다.
돌과 나무의 사원은 오랜 세월 동안 떨어질 수 없는 애인 사이다. 사원의 돌이 하나씩 허물어지고 그 허물어진 돌에 푸른 이끼가 가득하다. 돌이 무너질 때마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프놈 바껭에서 일몰을 보는 것이다.
새벽부터 쉼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오후 4시 20분쯤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우고 중앙에 우뚝 솟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숲길은 임도처럼 넓고 그리 경사가 심한 편은 아니다. 첫 번째 전망대에서 박세이 참크롱 사원을 볼 수 있고 두 번째 전망대에서는 서 메본과 저수지를 볼 수 있다.
프놈 바껭은 시바를 모시는 힌두사원이지만 ‘부처의 발’처험 불교의 흔적이 공존한다. 총 7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12개의 사암으로 만든 탑이 있다. 중앙 성소 안에는 시바의 상징 링가를 안치하였다. 중앙 성소 동남쪽 대각선으로 앙코르와트 중앙탑이 보였다.
일몰 시각 한 시간 전에 이곳에 왔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하는 일몰을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으로 바뀌었고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
앙코르와트를 지나는데 벌써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랜턴을 켠 후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순식간에 어둠으로 휩싸인 도로는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으로 밝아졌다가 이내 어둠으로 회귀했다.
시내에 도착했을 때 긴장이 풀려 또다시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젠장. 오늘 너무 무리하긴 했지. 열심히 마사지해서 근육을 풀고 조심스럽게 숙소로 돌아왔다. 긴 여정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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