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렸다.
이런…. 언제나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깼는데, 재빨리 알람 해제를 한 후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서둘러 객실 밖으로 나와 양치와 세수를 했다. 롯지나 호스텔 공용침실(Dormitory)의 단점은 이런 점일 것이다. 이른 새벽에 움직여야 할 때 소란스러운 부스럭거림이 언제나 발생한다. 미리 부탁한 아침 도시락을 받고 롯지를 나섰다. 오늘도 고요함이 내 혈관을 통해 몸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린델발트 터미널에서 6시 20분 첫 기차를 탔다.
엊그저께 올라왔던 그 길을 기차는 다시 내려갔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다시 루체른행 기차로 갈아탔다. 오른쪽 차창으로 보이는 에메랄드빛 브리엔츠 호수에 낮게 깔린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차가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풍경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사진을 찍으려는 내 노력이 무색하게 얻어지는 성과물은 형편없었다.
오전 9시가 전에 루체른에 도착했다.
루체른 역은 매우 혼잡했다. 입구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니 바로 앞이 유람선 선착장이 있었다. 표 검사를 하지 않아 그냥 배에 탑승했다. 배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2층은 일등석이라 올라갈 수 없었고 배 엔진이 훤히 보이는 중앙 나무의자에 앉았다. 견학이라도 가는지 초등학교 아이들과 중학교 학생들이 많았고 그만큼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배는 언제 출발했는지 엔진이 작동하면서 큰 소음을 냈다.
배는 호수를 가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배가 베기스(Weggis)에 도착했을 때 이 혼잡에서 벗어나려고 무작정 배에서 내렸다. 배는 다시 비츠나우(Vitznau)로 출발했고 나는 그 모습을 선착장에서 바라보았다. 다시 루체른으로 돌아갈 때 비츠나우에서 다시 타야 할 테니까. 지금은 잠시 이른 이별을 했을 뿐이었다.
베기스는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도심 거리를 걸어 리기 칼트발드(Gigi Kaltbad)행 케이블카 탑승장까지 왔다. 그러고 보니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와 있었다. 잠시 탑승 차례를 기다린 후 미국에서 온 대학생들, 스위스 초등학생들과 함께 케이블카를 탔다. 5분여간의 케이블카 탑승은 초등학생들의 계속되는 비명 때문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후 나는 걷기 시작했다. 산악기차를 타면 손쉽게 리기산에 오르겠지만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오르막이라 발이 무겁게 느껴졌다. 어제 피르스트를 다녀온 후 완전히 몸이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았다.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니 탁 트인 풍경 속에 철길 옆으로 길이 시작되었다. 추크호수(Zugersee)와 도심지가 눈에 보였는데 미세먼지 때문인지 희뿌연 하게 보였다.
리기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바로 옆이 철길인데도 아무런 안전시설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나의 이목을 끌었다. 우리나라는 중대재해법 때문에 철길 옆 걷는 길들이 폐쇄되고 있는데 말이다. 혼자서, 부부끼리, 때론 단체로 길을 걷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철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리기산이 눈에 들어왔다. 지그재그 오르막을 힘겹게 올랐더니 시원한 바람이 내 젖은 옷을 말려줬다.
저 멀리 알프스 설산들이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제 피르스트에서 엄청난 경험 때문에 리기산이 평범하게 느껴졌다. ‘이게 뭐야? 겨우 이 정도 풍경인데 다들 그렇게 좋다고 말했나?’ 사람 마음이 이럴 때 보면 참으로 간사하다.
리기산 정상 주위를 돌면서 주변 풍경을 바라봤다. 알프스 설산에 감동하는 다른 사람들을 뒤로하고 12시에 출발하는 산악기차를 타고 비츠나우로 내려왔다.
유람선을 탔다. 배는 아침에 탔던 배보다는 작았다. 배에 앉을 자리는 없었고 그냥 한 시간가량을 서서 루체른으로 갔다. 다행인 것은 멋진 장면을 목격해서 사진을 찍느라 그럭저럭 시간을 잘 보냈다.
햇살이 뜨거웠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카펠교로 향했다. 1,300년대 목조다리에 들어섰는데 17세기 미술품으로 장식된 대들보와 석조로 만든 물의 탑이 눈에 들어왔다. 루체른 하면 카펠교를 떠올릴 만큼 대표적인 상징물이지만 나는 그저 그늘이라 좋았다.
빈사의 사자상으로 가면서 COOP에서 맥주를 샀다. 사자상 주변은 복원작업 중이었다. 사자상이 보이는 나무 그늘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그래, 이 맛이지!’
다시 무제크 성벽까지 걸었다. 한낮에 도심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무제크 성벽은 오래된 성벽이었고 망루에도 오를 수도 있었지만, 창문을 모두 막아놓아 비지땀이 쏟아졌다. ‘왜 창문은 모두 막아놓은 거야? 더워 죽겠네.’ 투명한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로이스강을 건너 도심을 걸었다. 이국적인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왔고 사진을 찍으면서 다시 카펠교를 지나 루체른역으로 왔다.
인터라켄행 기차를 탔다.
맥주를 마신 후 잠이 들었다. 한참이 지나 잠에서 깨었을 때는 브리엔츠였는데 차창으로 비가 내렸다. 오후가 되면 비가 내리고 한두 시간 지나면 또다시 해가 떴다. 브리엔츠 호수를 보니 수영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기차가 인터라켄에 도착했을 때 비는 폭우로 바꿨었다. 인터라켄 여행을 내일로 미루고 그린델발트행 기차로 바로 갈아탔다.
오늘은 밥을 먹을 생각이다.
COOP에서 치킨커리, 라면, 맥주, 포도주를 샀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 전자레인지에서 4분간 데운 치킨커리의 냄새가 내 식욕을 자극했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라면과 치킨커리를 먹었다. 식사하면서 지인들에게 사진과 동영상을 보냈다.
갑자기 롯지의 마스코트 검은 고양이가 내 곁에 앉았다. 고양이가 매개체가 되어 여러 사람이 모이게 되었고 술자리가 벌어졌다. 홍콩, 폴란드, 한국인들과 영어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11시쯤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전날의 용사들(같은 객실 미국인 3인방)이 술을 마시고 있어 다시 그들과 합류했다. 오늘 무엇을 했고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남은 술을 다 마실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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