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아이거 북벽이 바라다보이는 그린델발트 아이거 롯지에서 새벽에 눈을 떴다. 조용한 새벽을 혼자 다 즐기는 동안 조식 시간이 되었다. 뷔페식 조식은 빵, 샐러드, 치즈, 햄, 시리얼, 과일, 음료, 커피 등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은 후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까지 즐겼다.
오전 7시 30분경 피르스트(First)를 향해 출발했다.
그린델발트까지는 마을 길을 지나는 오르막이었다. 길가의 식수대에서 물을 담은 후 도로의 인도를 따라 계속 걸었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졌다. 거리가 너무 조용해서 건물에 사람이 사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린델발트 시내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사람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정표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고 본격적인 피르스트 도보여행이 시작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오르막 경사가 급했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차올랐던 숨은 주변 풍경이 내게 주는 놀라움으로 금방 상쇄되곤 했다.
대부분 사람이 케이블카를 타고 피르스트를 올랐다.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바꾼 것이고 나는 오늘 하루를 오롯이 피르스트에 투자하기로 했기에 자연을 몸으로 느끼며 걷고 있었다. 머리 위로 케이블카가 지나가고 만년설을 품고 있는 해발 4,048m의 Gross Fiescherhorn이 알프스산맥 사이에서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이 나를 지치게 했지만, 고개만 돌리면 그 힘듦을 잊게 만드는 자연이 만들어낸 절경이 있기에 힘을 더 낼 수 있었다. 길은 케이블카를 중심으로 지그재그로 올라가고 있었다. 고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더 뜨겁게 내리쬐는 아침 햇살에 그늘이 필요했다. 케이블카가 지나갈 때마다 그림자가 생겨 나에게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고개를 숙였고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는 고개를 쳐들었다.
절반쯤 올라온 것 같았다.
조그만 호수를 지나 아주 짧은 평탄구간을 걸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는 패러글라이딩이 보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것의 쾌감을 알기에 그들의 오늘 하루가 최고의 날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더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길을 돌아가는 게 싫어서 샛길로 접어들었다. 거리가 짧다는 것은 그만큼 경사가 급하다는 의미다. 이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직업병이 발산되었다. ‘뭐…. 이쯤이야 금방 올라가지. 헉헉…. 죽겠다.’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고 얼굴을 흐르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 따가웠다. 저 멀리 폭포가 보였다. 나에게 물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식수대에서 세수하고 물을 마셨다. ‘휴…. 살 것 같다.’
똑같은 풍경이지만 보는 각도가 다르니 새롭게 느껴졌다. 내 발걸음은 저절로 멈췄고 눈은 그 풍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너무 좋다.’ 이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길가에 핀 큰금매화 군락지가 지친 나를 환하게 맞아주었다. 설산과 노란 꽃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빠져 잠시 걸음을 멈췄다. 피르스트가 눈에 보였지만 아직도 남은 거리는 1.5km였다. 눈에 보이는데 길을 돌아서 가야 하니 몸은 더 고대고 마음은 착잡했다.
이번에도 샛길로 들어섰다. 뜨거운 햇살은 나를 말려 죽이려는 듯 내리쬐었고 구름은 그런 햇살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드디어 해발 2,168m 피르스트 케이블카 종점에 올라섰다. 아주 힘들게 올라왔지만, 너무 놀라운 신세계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안나푸르나(ABC)을 포함해 여러 번 외국을 다녀봤지만 피르스트만큼 나에게 찐한 여운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피르스트 클리프 워크(First Cliff Walk)를 걸어 해발 2,200m인 Bergrestaurant First에서 맥주를 마셨다. 나에게 주는 특별한 보상이었다. 언제나 맥주는 첫 모금이 가장 맛있었다. 물론 이곳에서의 맥주 맛은 주변 풍경이 더해져 훨씬 더 풍미가 넘쳤다.
꼭 가보고 싶었던 바흐알프 호수(Bachalpsee)로 향했다. 그곳까지도 먼 거리지만 충분히 다리쉼을 했기에 천천히 움직였다. 설산은 보는 위치가 달라져도 그 매력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그저 얼굴에 울음 꽃이 피었다. 그렇게 쉬다 걷기를 반복하다 바흐알프 호수에 도착했다.
빙하가 아직도 녹지 않고 위쪽 호수에 떠 있었다.
아래쪽 호수에는 Wetterhorn(3,692m)과 Schreckhorn(4,042m)의 설산 풍경이 호수에 비추어져 있었는데 물결의 출렁거림 때문에 선명하지는 않았다. 호수와 설산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앉아 셀카봉을 설치해두고 앉아 있었다. 눈은 연신 호수를 바라보았지만 입은 포도, 사과 등 과일을 먹었다.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면 언제든 사진을 찍을 생각으로 만발의 준비를 했지만 나에게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산을 타는 사람이 가진 직감으로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호수 아래 협곡으로 내려갔다. 길은 엉망진창이지만 설산과는 또 다른 풍경이기에 내 흥미를 끄는데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눈앞의 설산과 물길이 자연의 신비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늘엔 여전히 패러글라이딩하는 사람들이 허공을 맴돌았고 하산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엔 안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걸어도 걸어도 길은 끝나지 않았다. 임도와 숲길을 반복해서 걷다보니 아침에 피르스트를 올라갈 때 지나쳤던 갈림길에 도착했다. ‘휴….’ 한번 지나갔던 길이라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그렇게 30분을 더 내려갔다. 아이거 롯지에 도착했을 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피르스트에서 조금 더 지체했다면 비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샤워하고 난 후 COOP을 다녀왔다.
역시 스위스에서는 우산보다 우비가 감성적이었다. 맥주, 포도주, 라면을 샀다. 비가 오니 뜨끈한 국물이 생각났다. 라면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매콤한 국물이 내 몸을 전율하게 했다. 남은 오후 시간은 포도주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비가 오는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며 소파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저녁이 되어 남은 포도주를 다 마실 때까지 같은 객실 미국인 친구들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어회화를 더 열심히 해야지’라는 반성을 남긴 체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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