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마트 가는 날이 밝았다.
새벽에 홀로 깨어 아이거 북벽을 바라봤다. 거대한 암벽의 웅장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도 첫 기차를 타기 위해 아침 도시락을 받아들고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내의 모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조용한 터미널에 나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여행용 가방을 끌고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사흘 동안 잠깐씩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 정도만 나눈 30대 한국인 처자였다. 오늘 취리히에서 런던으로 간다고 했다. 새벽 첫 기차라서 탑승객도 없고 둘이 멋쩍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체이고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나이 또래에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때론 가볍게 때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차가 스피치(Spiez)에 도착한 후에서야 이야기는 끝이 났다.
피스프(Visp)에서 다시 체르마트(Zermatt)행 기차로 갈아탄 후에야 아침을 먹었다. 어제도 마신 페트병에 들어있는 음료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협곡 풍경을 두 눈에 담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협곡을 달린 기차는 한 시간이 지난 후 체르마트역에 도착했다.
스위스는 화장실이 무료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을 다녀왔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거지만 이제까지 거쳐온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등 거의 모든 유럽국가는 돈을 내고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가?’
역을 벗어나 COOP으로 갔고 맥주를 샀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마터호른이 잘 보이는 장소에서 마실 생각이다. 체르마트 시내에서도 마터호른이 보였다. 정상부에 구름이 있어 완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처음 본 마터호른의 모습이라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수네가(Sunnega)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로 갔다.
큰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들은 보았는데 어디까지 가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나와 방향은 같은데 저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급경사지 산을 오를 수 있을는지 의문이 들었다. 도심 언덕을 올랐다. 체르마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터호른은 높은 곳에 오를수록 더 잘 보였지만 여전히 구름이 정상부를 감싸고 있었다.
언덕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오르막이지만 비교적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렇게 15분을 올랐을 때 의자를 발견했고 그 앞에 커다란 나무 십자가가 있었다. 십자가 뒤로 마터호른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을 몰래 쳐다보는 것처럼 마터호른을 흘깃 쳐다봤다.
다시 산행이 시작되었다. 숲속에 넓은 분지가 있었고 조그만 오두막 옆에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Great see you(반가워요).’ 바로 위쪽 이정표에는 수네가까지 1시간 50분이 걸린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 시간이면 올라가겠는걸…. 임도를 만난 후 바로 숲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힘겹게 오르막을 올라 숲길을 벗어나니 탁 트인 공간이 내 앞에 펼쳐졌다.
스키장이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 보니 스키장 슬로프로 올라가면 바로 수네가였다. 급경사지 슬로프를 올라가다 산악자전거 타는 사람을 만났다. 비수기의 스키장이 이렇게 이용되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종아리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내 몸을 조여왔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마터호른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구름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눈 앞에 펼쳐진 설산은 또 다른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힘겹게 수네가에 도착했을 때 마터호른이 한결 가깝게 느껴졌다. 날씨도 맑고 바라도 시원하게 부는데 구름은 왜 움직이지 않고 훼방을 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네가에서 마터호른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역시 첫 모금은 예술이었다. 수네가는 5대 호수 트레일이 있는 곳이고 바로 아래에 레이호수(Leisee)가 있었다. 호숫가 의자에서 마터호른을 바라보고 계신 사람들을 봤다. 저 사람들도 구름이 원망스럽겠지. 한적한 곳에서 마터호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았다.
호수 주변에는 많은 야생화가 피어있었다. 나는 등나무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눈은 마터호른을 바라봤고 입은 맥주를 마셨다. 저 구름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보자.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지만 구름은 변함없이 마터호른을 감싸고 있었다. 호수에 발을 담그고 개들이 뛰노는 모습도 바라보면서 호수에 조금 더 머물렀다. 아무래도 이번엔 못 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을 했다. 올라왔던 곳이 아닌 직선으로 내려가는 급경사지로 내려갔다. 멈춰설 수 없을 정도로 서 있으면 몸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아무런 사고 없이 30분 만에 체르마트 도심지로 내려왔다. 언덕을 내려오기 전 다시 한번 마터호른을 쳐다봤다. 더 많은 구름이 마터호른을 에워싸고 있었다.
체르마트 시내는 쾌적했다. 전동차 이외에는 어떤 화석연료 차량도 운행할 수 없었다. 현지인보다 관광객이 더 많은 체르마트 도심 거리는 다양한 외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기차를 탔다. 아침에 탔던 역순으로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인터라켄을 걸었다.
서역에서 내린 후 도심지와 아레강을 걸었다. 빙하가 녹은 물인 에메랄드빛의 아레강은 동네 꼬마들의 수영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영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수영복만 입었어도 나도 뛰어들었을 텐데. 한동안 의자에 앉아 아레강을 바라봤다.
동역까지 걸어온 후 COOP에서 포도주와 통닭을 샀다. 다시 기차를 타고 그린델발트로 돌아온 후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었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합류했고 늦은 시각까지 대화는 이어졌다. 이곳에서의 저녁은 늘 만찬이고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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