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까지 마신 포도주 때문에 술이 깨지 않았다.
새벽에 침대 밑으로 핸드폰이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벽 구석으로 떨어진 핸드폰을 손으로 끄집어내려고 한참을 부스럭거렸다. 공용객실(Dormitory)이라 불을 켤 수가 없었다. 도저히 꺼낼 수가 없어 손전등을 찾으려고 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열려있던 가방에서 포도주병이 떨어져 깨졌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깨진 병 조각을 치웠고 바닥을 걸레로 깨끗하게 닦았다. 핸드폰이 다시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한편의 코미디 영화를 나 홀로 찍었다.
흰 구름이 산을 집어삼켰다.
비가 내린 그린델발트의 새벽은 맑은 낮보다 주위 색감이 한층 짙어졌다. 주변 풍경을 다시 한번 두 눈에 넘치도록 담은 뒤 터미널로 향했다. 오늘도 오전 6시 20분 첫차를 탔다. 5박 6일 동안 절반을 첫차를 탔고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 그린델발트를 떠났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기차를 갈아탔고 스피츠까지 왔다.
이탈리아 밀라노행 기차는 40여 분 후에 출발할 예정이다. 튠호수를 바라봤다. 산보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에메랄드빛 호수가 내 마음을 헤아리는 듯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카페에서 커피와 이름 모를 파이를 사서 먹었다. 역에 있는 조그만 카페인데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쓴 커피와 달곰한 파이를 번갈아 가며 맛있게 먹었다.
오전 8시 5분 밀라노행 기차를 탔다.
기차의 의자 간격이 좁았다. 선반에 배낭을 넣을 수 없어 앞으로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기차는 스위스 지역을 달리다 도모도쏠라(Domodossola)에 직전에서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갑자기 확 달라진 건축물들이 내가 지금 이탈리아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30여 분이나 연착해서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했다. 밀라노 중앙역은 거대한 건축물 그 자체였고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만남의 장소였다. 어느 곳이나 사람들로 북적였고 불쾌하고 시끄러운 소리와 눅눅한 더위가 숨이 막힐 정도였다.
베네치아행 기차를 타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전광판에 플랫폼 정보가 뜨지 않았다. 연착이 55분에서 40분으로 바뀌었는데도 플랫폼이 표시되지 않았다. 아무도 연착에 대해 역무원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내가 더 이상하게 느낄 정도로 기차연착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혼돈의 도가니 속에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던 손이 저렸다. 정오 12시 35분 기차를 오후 1시 30분에 탔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넓은 좌석에 콘센트, 에어컨이 가동되어 실내가 시원하다 못해 서늘했다. 기차에서 이틀 후에 갈 베로나(Verona)행 Flixbus를 예약했다. 결국, 베네치아에는 예정시간보다 55분 늦게 도착했다.
여행 전 베네치아 메스트레(Mestre)역과 가까운 호스텔을 예약했다.
주택가 한편에 있는 호스텔은 아주 큰 건물이었고 그만큼 내부시설도 다양하고 좋았다. ‘호스텔이 이 정도로 좋다니….’ 배정받은 공용침실의 객실과 침대에 다시 한번 놀랐다. 통창으로 바라보이는 전망과 싱글침대가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대충 짐 정리를 하고 주택가 골목을 걸었다. 모든 집의 창문에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가리는 덮개 창문이 있었다. 여행 중 우리나라와 다른 점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을 난 무척이나 좋아하고 즐긴다. 주택가는 이탈리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인 것 같았다.
구석진 골목에서 COOP을 발견했다. 물, 음료, 맥주, 샐러드, 요구르트 등을 샀는데 5유로도 안 나왔다. ‘어쩜, 이렇게 쌀까?’ 관광지를 살짝 벗어났을 뿐인데 가격이 반값 정도였다. 더더욱 스위스에 있다가 오니 물건값이 훨씬 저렴하게 느껴졌다.
캔맥주를 마시며 골목을 걸었다. 우연히 발견한 한자를 보고 식당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이 없던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름이 식백미(食百味)라는 중국 음식점이었고 식당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실내장식이 최신식이고 깨끗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메뉴판의 음식을 손으로 가리켰다. 밥과 매콤한 국물이 있는 면을 먹고 싶었다. 고수, 파, 매운 고추에 중국 간장을 넣은 소스를 만들어 면과 함께 먹었다. 비가 점점 세차게 내리듯 내 입에도 매콤함과 고수의 향이 가득 퍼졌다. 볶음밥도 수저로 중간중간 떠먹었다. ‘오늘 배불리 먹어보자’ 처음엔 다 못 먹을 것 같았는데 매콤한 국물 때문인지 결국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때마침 식사가 끝났을 때 비도 멈췄다.
호스텔로 돌아와 샤워하고 잠을 잤다.
이상한 진동과 소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11시였다. 객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데 건물이 흔들렸다. 계단을 통해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의 한쪽 공간이 나이트 장으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 모든 숙박객과 허락된 일부 외부인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그런 광란의 파티장으로 변한 것이었다. 야외 테라스도 조용한 파티가 열렸지만 메스꺼운 냄새와 담배냄새가 섞여 도저히 내가 서 있을 수 없었다. ‘나도 이젠 늙었구나’
호스텔 밖으로 나갔다. 호스텔 앞 공원에서도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포도주, 맥주 등을 마시면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호스텔처럼 시끄럽지는 않았다. 한쪽 구석에는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도 뛰어놓고 있었다.
금요일 밤이면 이런 파티들이 열리는가 보다. 잠깐 살펴본 늦은 밤 도로변은 어둠의 그림자가 엄습한 듯 파티하는 곳과 분위기가 달랐다. 왜 이탈리아에서 늦은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는 줄 이해가 되었다. 다시 호스텔로 돌아왔다. 지인들에게 사진과 동영상을 보냈고 자정 넘어 도착한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의 부산스러운 소리를 귀로 흘려보내며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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