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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유럽 2탄 - 4일차(5/30), 영국 코츠월드(Cotswolds)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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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뷔인가? 오늘도 새벽에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상 시각이 30분 늦어진 점이다. 잠결이지만 어둠 속 누군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어젯밤에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맞은편 위쪽 침대의 사람이 바뀌었다. 다른 사람들도 잠을 설치는지 연신 뒤척이고 있다. 4시간은 평소 수면시간이지만 오늘은 왠지 개운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들고 로비로 나갔다. 보이스톡으로 경익 형과 통화를 했는데 동서트레일 야영장 부지 협의차 태안 흥주사에 가는 길이란다. 외국에 오면 전화를 잘 않는데, 어제 6월은 금주의 달이라는 카톡을 보고 연락한 것이다. 소가 풀을 끊을 일이니까.

누나와도 통화했다. 갑작스레 전화해서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세 번의 시도 끝에 연결이 되었다. 여행에 관련된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누었다. 런던은 새벽 2시이고 한국은 오전 10시다. 이쪽은 잘 시간이고 저쪽은 한참 활동한 시간에 전화통화를 하니 기분이 묘했다.

노트북을 켜고 어제의 여정을 기록했다. 긴 여정이지만 그동안 쌓아온 내 나름의 기법으로 글발을 살려 써 내려갔다. 내 블로그 관리자 계정에 접속이 안 되었다. 해외 IP 접속 차단을 설정해 둔 것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페이스북에 첫날의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

 

 

 

오전 6시가 지나서 외출준비를 했다. 달라진 점은 별로 없는데 오늘은 한결 여유로운 아침을 맞는 기분이다. 사과 한 개를 먹고 호스텔을 나와 패딩턴 기차역까지 걸었다. 1시간 정도 걸렸는데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거리라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도중에 비가 내려 우산을 썼다. 엊그제부터 느낀 건데 런던의 출근길에는 러너들이 많다. 한적한 공원을 놔두고 복잡한 도심을 신호도 지키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차 시간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참고 있었는데 오늘은 한잔해야 할 것 같았다.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커피를 샀다. 대부분 커피 판매소에는 아메리카노라는 메뉴는 없지만 ‘Can I get a Americano without milk?’라고 말하니 만들어 줬다. 커피를 받고 보니 이탈리아 브랜드의 커피였다. 어찌 되어 건 뜨겁고 쌉쌀한 커피 한 모금이 그동안 망각하고 있던 뇌세포를 건드렸다. 그래 이 맛이지!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계속 전광판을 주시했다. 이제 10분도 안 남았는데 플랫폼 번호가 나오지 않았다. ‘으음결국, 지연(Delayed)되었다. 작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베네치아 갈 때 2시간 연착된 순간이 떠올랐다. 천만다행인 것은 지연은 딱 10분이었다.

인파에 뒤엉켜 기차를 탔다. 하늘은 곧 비를 뿌릴 듯 잔뜩 찌푸리고 있다. 달리는 기차에서 글을 썼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치 과음한 다음 날 체한 것처럼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와중에 사무실에서 카톡이 왔다. 하늘처럼 나도 미간을 찌푸린 체 어서 빨리 모레톤--마시(moreton-in-marsh)에 도착하길 손꼽아 기다렸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스톡으로 사무실과 통화를 했다. 급한 일이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통화하는 동안 시원한 바람이 불어 어지러움이 한결 해소되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801번 버스를 탔다. 코츠월드(Cotswolds)는 구릉 지대에 있는 마을을 총칭하는 말로 내가 방문하려고 하는 이곳도 그중의 하나다. 영국에서는 은퇴 후 거주지로 유명한 곳이다. 버튼---워터(Bourton-on-the Water)까지는 40여 분이 걸린다. 이곳이 오늘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윈드러시 강을 따라 걸었다. 영국의 베네치아라 불린다고 하는데 내가 작년에 베네치아를 가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말만 강이지 수위는 내 무류에도 못 미치는 개울 수준이었다.

해가 뜨지 않아 조금 쌀쌀했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벌써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강기슭에는 가족, 친구, 연인 등 삼삼오오 모여 물 위를 헤엄치는 새들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고즈넉한 초록의 목장, 돌담에 핀 야생화, 집 사이의 작은 길까지도 평온함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린다. 우산을 쓰고 흠뻑 젖은 거리를 얼마 걷지 않았는데 언제 그래었냐는 듯 어느새 비가 그쳤다. 공기는 비 내음을 먹어서 한 층 보습감이 느껴지는데 얼굴에 미스트를 뿌린 느낌이다.

 

 

 

 

 

 

 

 

마을에는 Public Footpath가 있다. 좁은 골목의 오래된 돌담길도 있고, 전호가 흐드러지게 흰 꽃을 피운 숲길도 있고, 드넓게 펼쳐진 고즈넉한 초록의 목장길도 있다. 정처 없이 걷다가 마을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Greystones Farm을 발견했다. 이곳은 약 6,000년 전에 인류가 유럽에 처음 정착한 장소 중 한 곳이라고 한다.

동영상을 찍으며 안으로 천천히 걸었는데 인기척이 있었다. ‘Hello’ 이곳의 해설사분인데 모닥불을 피우는 와중에도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다른 분들이 들어왔고 곧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의 역사, 집의 형태, 지붕 재료, 벽의 구조, 벽화 등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관광객들은 전해 다니지 않는 길인데 직업병이 도진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임플란트를 안 했으면 꿈도 꾸지 못할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길을 걸었다.

 

 

 

오후 2시쯤 L'anatra라는 이탈리아 음식점에 갔다. 파르마 피자와 로컬 에일맥주를 주문했다. 이번 여행의 첫 외식인데 영국에서 이탈리아 피자를 먹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는 이탈리아 브랜드의 커피를 마셨는데. 작년 로마에서 먹었던 피자보다 훨씬 맛이 좋았고 맥주와의 궁합이 환상적이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너무 맛있는 피자라 순식간에 그 많던 피자를 다 먹었다.

 

 

 

 

 

 

 

배도 부르니 이젠 신선놀음을 즐길 순간이다. 개울 같은 강에서 꼬마 아이가 물장구를 치고 꼬마보다 덩치가 큰 개가 물로 뛰어들며 놀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 물에 들어갔다. 맑고 투명한 물은 보는 것과 달리 물살이 빨랐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 모델이 되었다.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즐겁고 여유로운 순간이다.

 

 

 

안 가본 골목까지 천천히 걸어본 후에 오후 415분 버스를 타고 모레톤--마시로 돌아왔다. 한 시간 정도 마을을 둘러본 후 런던행 기차를 탔다. 기차가 옥스퍼드를 지나고 나서 멈춰섰다. 전기 문제라는 데 철로 위에 덩그러니 버려진 고철덩이 신세가 되었다. 전원이 꺼지자 승무원이 생수를 나눠줬다. 덥다, 더워. 전원이 다시 켜졌지만 출발한 기미는 없었다.

30여 분이 지나 기차가 출발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결국, Reading 역에서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한참 늦게 패딩턴 기차역에 도착했다.

 

 

 

호스텔에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도시의 불빛은 순식간에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어둠에 꼿꼿하게 저항했다. 이제 겨우 나흘이 지났는데 호스텔에 돌아오니 집에 온 듯 편안했다. 오후 10시가 넘어 늦은 저녁을 먹고 샤워를 했다.

영국 여행에 기대치 대비 만족도가 훨씬 높아질수록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내일은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동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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