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눈을 떴다. 옆 침대 사람이 알람을 울리는데도 끄지 않아서 내가 흔들어 깨웠다. 이때가 새벽 5시 10분 전이다. 일어나지도 않을 거면서 왜 알람은 맞춰놓은 건지. 잠시 침대에 누워 있다 노트북을 들고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어제의 여행기를 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보다 30분 늦게 아침을 먹으러 갔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줄을 서지는 않았는데 빈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음식을 접시에 담고 나서야 어제 앉았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어제 배운 나이프로 빵 자르기에 도전했다. 단면이 고르지 못하고 어설프게 잘렸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이다. 계속하다 보면 나도 익숙해지겠지.
외출 전에 침대를 옮겼다. 같은 객실이래도 조용한 곳에 혼자 있는 게 편하니까. 오늘은 쾰른에 갈 예정이다. 그곳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기대되는 하루다. 오전 9시 30분쯤 객실 청소가 한창 진행 중인 유스호스텔을 나왔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건너는 다리를 지나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에 왔다.
쾰른행 기차를 기다리는데 넓은 역사 안에서 백파이프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틀림없이 독일인데…. 유로 2024가 내일부터 열리는데 스코틀랜드에서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이 벌써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지금 프랑크푸르트는 유럽 곳곳의 축구광들이 몰려드는 집합장소다. 비록 경기장은 아니지만 운 좋게도 프랑크푸르트 어느 곳에서 개막전을 보게 되었다.
쾰른까지 1시간 30분 걸렸다. 그동안 유튜브도 보고, 음악도 들고, 멍하니 바깥풍경에 시선을 두기도 했다. 기차역을 나오지도 않았는데 유리창 너머로 웅장한 쾰른의 상징건물인 쾰른 대성당 보였다.
쾰른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는 대성당이다. 고딕 양식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당해 여전히 보수 중이다. 직선적이고 창과 출입구 위가 뾰족한 아치를 이루고 있다. 왜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기차역 광장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다. 그중 확연히 눈에 띄는 사람들은 광장 바닥에 여러 나라의 국기를 그리는 이들이다. 한두 번 그려본 솜씨가 아닌 듯 여러 나라 국기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려낸다. 당연히 태극기도 그려져 있다. 어떻게 한국 사람도 헷갈리는 건곤감리까지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대성당 안을 구경하기 전에 성당 외곽을 시계방향으로 걸었다. 대성당 출입구를 기준으로 윗쪽에 루드비히(Ludwig) 박물관이 있었다. 페터 루드비히의 개인 소장품이었던 회화, 도자기, 스케치, 판화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주 우연히 분수가 있는 곳에서 유모차를 탄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고 보기 좋던지. 이 분수와 주변 조각품은 지역에 내려오는 집 요정의 전설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향수 가게를 지나쳐 다시 대성당 입구에 다시 왔다.
입구에는 신부님이 서 계셨다. 안으로 들어서니 어디선가 본 듯한 성당 내부 모습이다. 벨기에 헨트의 성 브라보 성당과 비슷했다. 물론 규모는 천지 차이지만 아마도 기본 내부구조가 성당마다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당을 천천히 둘러봤다. 동방박사 3인의 유골을 모셨다고 전해지는 황금색 함이 이곳에 보존돼 있다
쾰른 하면 떠오르는 두 번째는 향수다. 어슬렁어슬렁 향수 가게를 돌아다녔다. 쾰른에서 유명한 향수 브랜드 4711이다. 향수에 문외한이라 그 이유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봤다.
1709년 이탈리아 조향사였던 조안 마리아 파리나가 쾰른에 살면서 두 번째 고향이란 의미를 담아 오 드 콜론(EAU DE COLOGNE, 쾨른의 물)이라는 향수를 만들었다. 쾰른의 프랑스식 이름이자 영어식 표기가 콜론(Cologne)이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00년 후 쾰른의 상인이었던 빌헤름 뮐헨스가 짝퉁 향수를 만들어 팔았는데 나폴레옹이 이 모조품을 사용하면서 원조보다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군은 쾰른의 모든 건물에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주소를 부여했는데, 모조품 향수를 제조하던 공장 건물의 번호가 바로 4711이다.
향수를 알아보려고 4711 두 곳 매장과 Farina 1709를 갔었다. 나폴레옹 시대로 따지면 전자는 짝퉁 향수이고 후자가 진짜 향수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전자는 거칠고 진한 향이 난다면 후자는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물론 가격 면에서도 후자가 훨씬 비쌌다. 향수매장에 그리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향수 냄새가 온몸에 짙게 스며들었다. 취한다 취해.
골목을 걷다가 결혼식을 준비하는 독일 신부를 봤다. 하늘은 보니 결혼하기 딱 좋은 날이다. 광장을 지나 호엔촐레른 다리로 향했다. 강가에 왔을 때 비눗방울 놀이에 빠진 아이들의 신명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중간에 철도가 지나가고 양쪽으로 인도가 있는데 안전 울타리에 자물쇠가 빼곡하게 달려있다.
쾰른 하면 떠오르는 세 번째는 쾰슈(Kolsch)다. 맥주의 국가 독일에서 오직 쾰른에만 있는 맥주를 말한다. 쾰슈는 에일맥주지만 그만큼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이 진하다. 이는 상면발효(에일)로 만든 맥주를 하면발효(라거) 방식으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거리를 걸어 다니다 보면 쾰슈를 마시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또 마시고 싶어진다.
쾰른 트라이앵글을 지나 라인강 기슭에 있는 산책로에 갔다. 쾰른 대성당을 더 자세히 보려고 멀리 온 것이다.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오후의 망중한을 즐겼다. 내가 마시는 쾰슈의 속도는 라인강의 유속처럼 빨랐다.
라인강을 따라 초콜릿 박물관 방향으로 걸었다. 어느 방향으로 걷든 라인강을 따라 산책하기 좋은 장소다. 박물관 앞에는 관람차가 있고 다리 건너 크레인하우스(Kranhäuser)가 눈에 들어온다. 해가 지면 또 다른 느낌이 들겠지만 나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사과 1개와 캔맥주를 마시는 동안 기차는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어제 못 먹은 짬뽕을 먹으려고 서울푸드(SeoulFood)에 다시 갔다. 들어서자마자 ‘짬뽕 주세요. 공깃밥도 같이요’라고 말했다. 식당에서 한국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여자 직원이 ‘공깃밥이 2.7유로(약 4,000원)인데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아마도 한국 물가를 알기에 나에게 다시 한번 말했던 거 같다. ‘네’ 짧게 대답하고 현금으로 계산을 마쳤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단무지를 서비스로 주셨다. 독일에서 단무지를 맛보다니. 어제의 나를 기억한 사장님이 직접 짬뽕을 만들어 가져다주시며 ‘Takeout 손님 때문에 늦게 드려서 신경을 더 써서 만들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원했던 칼칼한 국물을 수저로 떠먹고 젓가락 신공을 펼치며 면을 먹기 시작했다. 중간에 한 번씩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국물에 적신 후 먹었다. 그래 이 맛이지. 면을 다 먹고 국물에 남은 밥을 말아 한국 스타일의 짬뽕밥까지 만들어 먹었다. 오랜만에 한식이 들어가니 몸 세포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르지만, 배가 꺼지면 또 아쉬우니까 조심스럽게 걸었다.
마치 정해진 코스처럼 오늘도 아이젤너 다리를 건넜다. 인근 마트에서 로제와인을 산 후 호스텔로 돌아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무도 없었다. 대체 다들 어디서 뭘 하는 건지 궁금하다. 물론 그들도 내가 새벽부터 사라지는 이유가 궁금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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