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니 유럽 2탄 - 19일차(6/14), 프랑크푸르트~하이델베르크 가기, 하이델베르크여행
오늘은 하이델베르크를 가는 날이다. 그런 나를 시기라도 하듯 하늘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야외 라운지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가 조식을 먹으러 갔다. 내가 먹는 음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익숙해진 음식이다. 오전 10시 10분까지 객실에 머물다가 우산을 챙겨 호스텔을 나왔다.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부지런히 걸어 지하철을 타고 중앙역에 왔다. 오늘은 기차가 아니라 버스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다. 중앙역 인근 버스 타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이슬비가 내렸다. 우산을 펼칠 정도는 아니어서 잰걸음으로 그냥 걸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타고 보니 주변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내 앞, 뒤 그리고 통로 옆 좌석에도 한국인이었다. 이번 여행 중 한 곳에서 한국 사람과 가장 오래 있는 순간이 버스가 되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동안 버스는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빠르게 달리는 차들은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오토바이도 다니고 있어 그 모습이 생경하기만 했다.
1시간 30분이 지나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구글맵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길을 걸었다. 중심지까지는 걸어서 40분 거리지만 내가 향한 곳은 메리어트 호텔이었다. 호텔 앞에는 네카어강이 흐르고 인근 다리에서 도심지를 바라본 풍경을 찍을 생각이다. 도로를 건너가느라 배가 오는 풍경은 놓쳤지만, 배가 되돌아가는 풍경은 찍을 수 있었다.
37번 버스를 탔다. 비스마르크 광장을 지나고 하이델베르크 구교에서 하차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Schlangenweg(뱀 길)를 따라 철학자의 길로 향했다. 헤겔이 걸었다는 철학자의 길은 내가 이곳을 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의자에 앉아 하이델베르크 중심지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처음엔 그냥 비를 맞고 있었는데 먹구름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우산을 썼다.
비가 오니 풍경에 운치가 더해졌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없어 혼자서 조용하게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사람이 나와 가까워졌을 때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브뤼셀 호스텔에서 같은 객실을 사용한 한국인 동생이었다. 어찌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의자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짧게 나눴다. 그러는 동안 비는 더 거세졌고 이 친구의 왼쪽 어깨와 나의 오른쪽 어깨가 다 젖었다. 이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또 이름을 안 물어봤다는 것이 떠올랐다.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지. 그때 물어보지 뭐.
맥주를 마시면서 한참을 더 앉아 있다가 철학자의 길을 따라 숲속을 걸었다. 임도처럼 넓은 길에는 오두막도 있었다.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되돌아올 걱정에 아쉬움은 마음속에 담아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나라 전원주택 단지 같은 골목을 내려왔다. 네카어강과 마주했을 때 배들이 수문을 통과하는 과정을 20분 동안 지켜보았다. 소강상태였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을 쓰고 하이델베르크 성에 올랐다. 물론 정문이 아닌 곳이었는데 야크처럼 보이는 소들이 풀을 뜯으며 나를 쳐다봤다.
오르막을 따라 걷다 보니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는 정원 전망대(Scheffelterrasse)가 보였다. 이곳은 구도심은 물론 멀리 신도심까지 조망할 수 있는 장소였다. 구도심의 고풍스러움과 신도심의 현대적인 분위기가 대조를 이루는 풍경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금 전에는 철학자의 길에서 하이델베르크를 봤는데 지금은 성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보는 곳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보인다. 여유롭게 정원을 둘러보면서 성에 가까이 다가갔다.
성의 내부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외곽만 둘러봐도 충분했다. 단체 여행을 온 한국인 여행객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30분 후에 버스에서 볼게요’ 가이드의 말이 들린다. 성에서 버스까지 가려면 최소 10분 이상이 걸리는데…. 그들과 거리를 두느라 계단이 많은 경사지를 따라 내려갔다.
발길 닿는 데로 하이델베르크 대학도 보고 번화가도 거닐었다. 비 오는 날 나만의 감성 여행은 음식까지 이어졌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갈 생각이다.
오후 5시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하는 슈니첼 맛집(Weinstube Schnitzelbank)에 10분 전에 갔다. 직원들이 야외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어 식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야외 테이블은 예약이 끝났고 실내에선 가능하다고 했다. 난 원래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아쉬운 척 실내에서 먹겠다고 말했다.
내가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조금만 늦었어도 곤란한 상황에 빠질 뻔했다. 원래 먹으려던 마늘 슈니첼 말고 오늘의 특선 후추 슈니첼을 주문했다. 물론 맥주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니까 빠지면 서운하겠지.
맥주를 마시는 동안 샐러드가 나왔다. 슈니첼을 주문하면 샐러드가 함께 나온다. 10분쯤 지났을 때 제일 먼저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접시 크기만큼 양도 많았다. 칼로 자른 슈니첼 조각을 소스를 듬뿍 묻혀 입안에 넣는 순간 역시 예상대로 돈가스 맛이 났다. 작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먹은 슈니첼과는 맛이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레몬을 뿌린 후 그냥 먹지만 독일은 우리가 돈가스 소스를 찍어 먹듯 여러 소스에 찍어 먹는다.
분주한 손놀림이 계속되었다. 중간에 휴지로 입을 닦고 맥주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접시를 닦듯 소스까지 깨끗하게 다 먹은 후 요금에 10% 팁을 더해 계산했다. 식당을 나오면서 화장실에 들렸다. 제일 먼저 식당에 들어가 45분 만에 음식을 먹고 제일 먼저 나왔다. 내 뒤에 들어온 사람들은 메뉴를 고르느라 주문이 늦었는데 내가 나올 때 음식이 나왔다.
배가 부른데 입안에 느끼함도 살짝 남았다. 걸어가는 대신 기차역까지 트램을 타고 갔다. 이곳에 올 때는 버스를 탔지만 갈 때는 기차를 탄다. 하지만 예정된 시각보다 50분이나 지연되었다. DB 앱으로 확인했더니 독일 밖에서 지연되었다고 뜨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지연된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온다. 자세히 살펴보니 독일 기차가 아니고 오스트리아 기차(OBB)였다.
천천히 맥주를 마시는 동안 프랑크푸르트역에 도착했다. 유스호스텔로 돌아가려다 아이젤너 다리로 향했다. 오늘 유로 2024 독일 대 스코틀랜드의 개막전이 오후 9시부터 열린다. 인근 도로는 통제되었고 거리 응원을 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다들 손에 술을 들고 있어 나도 맥주를 마시며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경기 시작 10분 전까지는….
몰려드는 인파를 더는 견딜 수 없어 조심스럽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유스호스텔로 돌아와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 인터넷으로 확인하니 전반전이 끝났는데 3:0으로 독일이 앞서고 있다. 오늘 저녁은 거리가 아주 시끄럽겠는걸. 오늘도 역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객실에서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혼자 있다. 노트북을 켜서 사진을 내려받고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독일이 5:1로 이긴 것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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