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니 유럽 2탄 - 21일차(6/16), 프랑크푸르트~뷔르츠부르크 가기, 뷔르츠부르크여행
아주 잘 잤다. 평균 수면시간보다 한 시간을 더 잤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1시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야 자려고 객실의 불을 끈 상태였다. 화장실을 한번 다녀온 후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 시간은 더디 지나갔다. 열린 창문으로는 거리의 소음이 끊이질 않고 들렸다. 다시 자려고 노력할수록 이상하게 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냥 뜬 눈으로 침대에 누워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새벽 4시 30분쯤 노트북을 들고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언제나 이 시간이면 나만의 공간이 된다. 여행기를 한동안 쓰고 있는데 머리가 멍해졌다. 왜 이러지.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객실로 돌아가 조식을 먹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벌써 5일째 똑같은 구성의 조식을 먹고 있다. 다른 구성은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는다. 어찌 되어 건 커피도 두 잔씩 마시고 배가 부를 만큼은 먹고 있다.
외출준비를 마치고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방식으로 중앙역에 왔다. 일요일 아침이라 거리와 기차역은 평소보다는 훨씬 사람이 없었다. DB 앱으로 뷔르츠부르크(Würzburg)행 기차를 검색했다. 틀림없이 8번 플랫폼이었는데 출발 3분 전에 4번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고 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유럽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언제나 방심은 금물이다.
오랜만에 기차에서 표 검사를 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Deutsch-Ticket 바코드를 보여줬다. 기차는 내가 모르는 낯선 장소로 나를 데리고 갔다. 오늘도 10분 이상 지연되어 도착했다. 일요일이라 거리는 한적했다. 트램을 타고 이동하려다 그냥 걸어갔다. 역에서 궁전까지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먼저 온 사람들을 따라 정원에 들어갔다. 궁전과 조금 떨어진 외곽으로 돌다가 의자에 앉았다. 에코백에서 와인을 꺼내 마신 후 오렌지 껍질을 깠다. 오늘의 점심인 셈이다. 유럽의 궁 정원은 대부분 무료로 개방되어 있고 음식을 먹는 건 당연하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수도 있다.
어제 마시다 남은 와인을 다 마실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조식으로 챙겼던 오렌지가 지금에 와서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다. 일주일이 지나서 그런지 신맛이 전혀 없고 달았다. 한 개 더 남아 있는데 오늘 저녁에 먹어야겠다.
다시 정원 외곽을 돌다 성벽 아래 놀이터를 발견했다. 성벽 때문에 내려갈 수가 없어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정원에 심어진 수종이 다양하지만 내가 아는 나무도 많았다. 피나무가 터널 같은 그늘을 만들고 분수 주변에는 원뿔 형태의 주목이 늘어서 있다. 내가 그동안 가본 다른 궁전의 정원에 비하면 작은 편이다. 쉼터이자 만남의 장소인 분수에서 우연히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남편 출장에 같이 와서 렌터카를 타고 잠시 여행 중이라고 했다. 15분쯤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마리엔베르크 요새를 가기 위해 알테마인교로 향했다. 직선으로 길게 뻗은 성당 큰 거리에는 이곳이 번화가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있는 알테마인교는 체코 프라하의 카를교와 비슷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손에 아이스크림, 젤라토, 맥주나 와인 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요새로 올라갔다. 요새 주변이 공원처럼 꾸며져 있어 크게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역시 숲을 보려면 멀리 떨어진 높은 곳에서 바라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성벽에 앉아 주변 일대, 알테마인교,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이곳에서 야경을 보며 포도주를 마시면 멋지지 않을까? 마인츠를 가려다 갑자기 찾아온 이곳, 뷔르츠부르크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게 여행의 또 다른 묘미 아니겠는가?
요새를 내려온 후 트램을 타고 기차역에 왔다. RB 기차는 만원이었지만 운 좋게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공식적으로 여기서 마무리할 생각이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면 DM과 마트에 가서 몇 가지 물품을 사려고 생각 중이다. 다만, 오늘이 일요일이라 문을 열었을지가 의문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 남역에 내렸다. 거리상으로 중앙역보다는 유스호스텔과는 훨씬 가깝다. 거리를 걸으며 구글맵으로 검색을 해 봤는데 모든 곳이 문을 닫았다. 오늘 저녁에 마실 맥주도 없다. 예상은 했는데 막상 현실이 그러니 당황스럽다. 일단 유스호스텔로 돌아와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니 어딘가 찾아보면 하나쯤은 문을 연 곳이 있을 것이다.
30분쯤 지났을 때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발걸음은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니 뭔가 있을 거란 기대를 했다. 우연히 발견한 태국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솔직히 내가 무슨 음식을 시켰는지 모른다. 100가지가 훨씬 넘는 것 중에서 그림만 보고 98번 음식을 주문한 것이다. 국물이 짜서 접시의 한쪽을 에코백으로 받쳐 놓고 음식을 먹었다. 짠 것을 제외하고는 대만족이었다.
일부 소형 마트가 열려 있었는데 맥주 가격이 세배나 비쌌다. 저녁을 먹었으니 일단은 유스호스텔로 다시 돌아갔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노트북을 켠 후 여행기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마지막 밤인데 이대로 잘 수는 없지 않은가?
오후 8시가 지나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가까운 곳에 술집들이 즐비했고 유로 2024 축구경기를 보느라 술집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뭐든지 있는 범, 골목을 걷다 발견한 마트에서 병맥주를 살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객실보다 강변에서 마시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아 그곳으로 이동했다. 목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맥주는 내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은 다 좋은데 이런 순간이 오면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늦은 밤, 대충 짐을 정리해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았지만 너무 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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