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둘레길 - 속세의 경계에서 고개 넘어 굽이굽이 나를 찾아가는 길

 

 

은혜로운 산, 속리산이 있는 보은은 지형적으로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긴 역사의 시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공부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어 간 은혜의 땅이기도 합니다.

속리와 이속이 만나는 보은, 탈속과 속세가 절묘하게 만난 상생의 땅이기도 합니다.

 

 

 

 

걸어가는 곳 어디든 소나무, 단풍나무, 대추나무, 사과나무가 풍유롭게 펼쳐져 있습니다.

속리산둘레길 보은구간은 생태와 사람, 마을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으로 등산로, 마을간 옛길, 마을길, 농로, 제방길, 도로가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지난 11월 27일(금요일) "11월 충청세르파와 함께하는 이벤트 도전행사"로 올해 10월 31일에 처음 개통된 

충청북도 보은군 소재의 "속리산 둘레길" 걷기행사를 개최하였습니다.

흐린날씨에 체감온도가 낮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충청세르파 및 많은 도전자분들께서 친히 참석하시어 행사를 빛내주셨습니다. 

 

 

 

 

 

이번 충청셰르파와 함께하는 이벤트 '속리산둘레길 걷기' 행사에는

권경익(산림청 숲길 자문위원), 송광호 주무관(보은군청), 조정미(속리산둘레길 안내센터장), 추연우 주무관(보은군청)이 함께 자리하셨습니다.

 

사실... 이분들은 제가 인맥을 동원하여 어렵게 모신분들입니다.

보은군청에서는 참가자에게 청청보은 농특산물 선물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또한, 권경익 님과 조정미 님은 속리산둘레길 걷기 행사 중간중간마다 (숲)길과 마을에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들을 해 주셨습니다.

이 글을 빌어 다시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날 충청세르파가 진행한 속리산 둘레길 걷기행사 구간은 [보은길 2코스 : 말티재 넘는길] 입니다. 

장안면 대추홍보관 안내센터에서 속리산면 상판리까지의 약 13.5km의 구간 중 솔향공원에서 대추홍보관까지의 약 11km의 구간만 진행합니다.

 

 

 

 

그러고 보니, 속리산둘레길과 인연을 맺은지도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5년여동안 무수히 많은 고난들을 물리치고 끝내 만들어낸 국내 최초 장거리 도보트레일인 '지리산둘레길'에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및 행사안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속리산 둘레길 걷기 행사를 시작합니다.

둘리공원(둘리의 숲속여행)에서 단체기념촬영 후 말티재 정상으로 향합니다. 

 

 

 

 

2013년 봄으로 기억됩니다.

속리산둘레길 예정노선도를 가지고 수많은 날들을 보은, 괴산, 문경, 상주를 돌아다니면서

예정노선도와 실제의 길이 정말로 속리산둘레길로서 가능한 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길을 찾아다녔고 헤매이기도 했었습니다.

 

 

 

 

 

세심정은 법주사 탐방지원센터에서 약 3.4 km거리에 있는 휴게소이름인데, 

사실 이 세심정이라는 의미는 속리산의 어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심정"이란 단어는 세속을 떠나 산에서 마음을 씻는 정자(터)라는 뜻으로 세속을 떠나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속리라는 의미 즉 세속을 멀리하고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의 속리산은

백두대간의 중심으로서 태백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서쪽을 향해 달리다가 속리산에서 남쪽을 향해 지리산까지 내달립니다.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속리산 천왕봉에서 낙동강, 금강, 남한강으로 흘러내리니 이름하여 삼파수가 만들어지는 한남금북정맥의 시작점이며 백두대간의 허리입니다. 

 

예로부터 세속을 여의고 입산한 곳이 바로 이곳 속리산입니다. 속리산 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곧, 백두대간 민족생태공원의 주축의 기운을 느끼러 가는 것입니다.

 

 

 

 

 

말티재에서 속리산둘레길 안내센터장인 조정미 선생님의 다양한 이야기 보타리를 풀어놓고 계십니다.

 

속리산둘레길 보은길 2구간(말티재 넘는길)은

평지와 산지, 그리고 물의 조화가 가장 잘 어우러진 구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말티재 정상에서 꼬부랑길과 만납니다.

 

한글과 불교의 중심에 있었던 신미대사와 세조의 일화가 곳곳에 녹아 있으며 고개 정상에 오르면 솔향이 상쾌합니다.

 

 

 

 

 

갈목리는 마을 주위에 칡덩굴이 많아 갈목이라 하였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길이 갈라지는 목에 위치한 마을이기 때문에 갈목리라 한다고 합니다.

 

1970년대 화전정리사업이 군청지원으로 진행되면서 펜션이 지어지고 현재 10집이 운영중이며,

갈목삼거리 왼쪽에 주막이 있었고, 북실전투에서 도망친 동학도들이 살았던 집(토담펜션 옆집)이 1980년대 수해때 소실되어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솔향공원 지나서 오른쪽 골짜기에는 희넘이재가 있으며 서원, 장안, 보은으로 가는 옛길과 반대파를 피해 세조가 걸었던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장소입니다. 

 

말티재에서 갈목숲을 지나 대궐터로 향했습니다.

 

 

 

 

 

말티재 정상에서 내려와 장재마을 대궐터로 향하는 길에 발견한 "장재저수지"입니다. 

올한해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수위가 많이 하강한 모습입니다. 우리나라는 잠재적으로 물부족 국가라고 합니다. 

생활 및 농업용수로서 중요한 상수원인 장재저수지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말티고개에서 대궐터로 이어지는 열두 굽이는 단풍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기도 합니다.

 

 

 

 

장재마을 대궐터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대궐터에는 TV드라마에도 소개되었던(공주의 남자)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아들이 서로 좋아하여 결혼을 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속리산둘레길 안내센터장인 조정미 선생님이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계십니다. 


조선 7대왕인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 반대파인 김종서를 처단하고 그 뿌리를 뽑아 후환을 없애고자 김종서의 식솔들을 다 제거합니다.

아버지의 그런 행위에 반대한 수양대군(세조)의 딸(공주의 남자에서는 문채원 주연)이 아버지의 눈밖에 나 쫒겨났고

 그 공주가 은거한 곳이 이곳 장재마을이라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김종서의 아들 중 한명이 한양에서 도망쳐 이곳 장재마을로 들어오고

이곳 장재마을에서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아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자식들을 낳고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세조가 얼굴에 심한 종기로 고생하다 이곳 속리산의 샘물이 효험있다는 이야기에 세조가 속리산을 찾아오는 길 도중에

이 행차를 구경나온 마을사람들 중 특정인이 자신의 딸임을 직감적으로 눈치챈 세조가 조사를 지시합니다.

그때 세조는 자신의 딸이 이곳에 은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딸이 김종서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나중에는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이 장재마을에 큰 대궐을 지어 딸이 잘 살게 도와줬다고 합니다. 

그때 공주는 이 대궐터를 떠나(세조 즉 아버지가 자신이 이곳 대궐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 마을을 떠나 말티재를 넘어 더 깊은 산중으로 숨어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주를 몹시 사랑했고 모든것을 용서한 세조는 공주를 한양도성으로 불러오기 위해 김종서의 아들에게 정이품 벼슬을 주기 위해 그 첩지를 들고 관리를 보냈는데

이 마을을 떠난 공주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속리산 입구에 있는 소나무 아래에 그 첩자를 놓고 갔다고 합니다.

[정이품 첩지를 놓아둔 소나무] 즉 정이품송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그 후 문장대에서 세조는 먼 발치에서 공주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현재 갈목리 솔향공원이 그때 세조의 딸이 살았던 장소라고 합니다. 

갈목리라는 어원의 또다른 이름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세조의 역사적 야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속리산 둘레길도 걷고 해설사님의 해설도 들어면서 아주 의미있는 소중한 시간들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대궐터를 지나 이날 트레킹의 종점인 장안리 대추홍보관으로 향하는 길에 기념촬영입니다. 

즐거운 해설과 함께 걷는 기분이 마치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을 나온 기분입니다. 

 

 

 

 

장재마을 대궐터를 지나 오창마을이라는 장소를 경유합니다.

 

오창리는 오심리와 사창리를 합하여 오심, 사창의 이름을 따서 오창이라고 합니다.

오창1리는 1983년 주택정비사업으로 마을이 깨끗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오심불은 세조대왕이 1464년 속리산에 오는 도중에 계유정란의 일들을 되새기며

 수림이재를 넘어 오던 중 오봉의 기상을 보고 문득 깨달은바 오심(悟心)라고 부른것이 어원입니다.

오창마을은 고개가 많은 지역으로 구수고개, 미륵댕이고개, 수림이재,이여송이 산새가 하도 좋아서 

인재가 나올 것을 두려워하여 잘라낸 장승배기, 목고대, 동녘고개 등이 있는 명소입니다.

 

 

 

 

이곳 오창마을을 지나 이날 걷기 행사의 종점인 장안마을 대추홍보관 방향으로 향합니다. 

이날 걷기 행사도 서서히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입니다. 

 

 

 

 

이날 행사의 마지막 지점인 장안마을입니다.

 

장안마을에서 김장김치를 담그는 주민들의 모습을 목격합니다.

몇포기라고 여쭈어보니 800포기 정도라고 합니다. 

 

예전 제가 어렸을때의 시골마을의 삶의 추억이 떠오르게 하는 장면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포기의 절인배추를 보면서 동네 어르신의 인심좋은 덕담을 듣고 있습니다.

 

 

 

 

이날 속리산 둘레길(보은길 2코스) 걷기 행사를 마무리하고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이 마을의 명물인 수재돈까스 집을 방문합니다. 정육점을 운영하시는 주인어르신께서 최고급 육질의 고기만 엄선하여 직접 만들어 주신

수제돈까스와 구수한 된장찌개, 밥한그릇을 먹으면서 이날의 행사를 마무리합니다.

정도전의 북악산 한양도성 탐방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천도 계획을 명하고,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鄭道傳)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한양도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양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차(약 18.2km)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 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한양도성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여 세종 4년(1422) 12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안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한양도성의 골격이다.

 

  이후 한양도성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한양도성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2015년 10월 중순... 마음이 설레일정도로 화창한 가을날 아침이었다.

북악산 한양도성에 대한 아무런 준비와 정보도 없이 북악산 한양도성을 걷기 위해 창의문안내소를 찾았다.

 

15년전 나의 주 활동무대였던 경복궁역 3번출구를 나와

초록색의 지선버스(1020번, 7022번, 7212번)를 타고 자하문고개에서 하차를 하였다.

 

자하문고개에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등 31명의 침투를

몸을 던져 저지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표석이 마련되어 드높은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었다.

 

 

 

 

'여행은 틈은 만나러 가는 거야'

 

여행때마다 내가 늘 좋아하는 문구인데... 오늘도 틈을 만나게 되었다.

개방시간이 오전 9시부터인데... 난 30분이나 일찍 도착을 한 것이다.

 

 

 

 

철조망이 쳐진 굳게 닫힌문을 압박이라도 하듯이

가방을 그 앞에 내려놓고 천천히 창의문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하였다. 

 

 

 

 

  한양도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四大門), 그 사이에 4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 단장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신청서 작성 - 신분증확인 및 실명인증 - 신청서접수 - 표찰착용 - 탐방 - 도착사무소 표찰반납

 

자율탐방으로 방식이 전환된 2007년 7월 1일부터 출입절차가 간소화되어

인터넷 사전예약없이 신분증을 지참하신 후, 현지에서 신청서만 작성하여 확인절차만 거치면 탐방이 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내가 받은 표찰번호는 1751번이었고

북악산 한양도성 창의문안내소의 오늘 첫 방문자이었다.

 

 

 

 

 

1751번 표찰을 목에 걸고 발걸음을 북악마루로 향했다.

창의문안내소에서 백악마루까지는 끊임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오르막길이다.

 

 

 

 

 

한양도성은 축조 당시의 모습과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왼쪽부터... 향로봉, 비봉, 사포바위, 승가봉, 문수봉, 보현봉, 칼바위능선, 형제봉 등

 

 

 

 

창의문안내소에서 백악마루를 올라가는 한양도성은 북한산 봉우리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평일이라 아무도 다니지 않는 한적한 북악산 한양도성은 마치 내 소유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름답게 펼쳐진 북한산 봉우리를 감상하면서

급경사지의 한양도성을 올라가면 백악산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이 곳은 북한군의 공중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해 1979년 10월 15일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이며 2000년 9월 9일 보다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서 다른곳으로 이전하였다.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일명 백악, 면악산, 공극산 이라고 불렀다. 높이는 342미터로 내사산(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중에서 가장 높다. 이곳을 백악 마루라고 부르는데 '마루'는 정상꼭대기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白岳山 342m' 라는 정상 표지석이 있는데 표지석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북악산이 통제되던 시기에는 대공포 진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처음의 모습으로 복원해 두었다.

 

 

 

 

백악산에서 한양도성을 내려가다보면 1.21사태 소나무를 발견하게 되었다.

소나무의 위치가 좁은 탐방로 바로 옆에 있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주위를 기울여야 볼 수 있었다.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외 30명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한으로 침투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창의문부근에서 검-경 합동 검문에 발각이 되어 대부분이 사살되었고 김신조는 생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최규식 경무관( 당시 종로 경찰서장)과 정종수 경사가 순직하였고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을 당하였다. 1960년대 남북관계는 매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며 우리의 안보의식이 다시한번 재점검되는 사건으로 남게 돠었다. 북악산 한양도성 전면 개방에 맞춰 베일에 쌓여 있던 1.21사태 소나무는 드디어 2007년 전명 개방에 따라 민간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또한 2010년 9월말 KBS 1박2일에 방영되면서 탐방로 구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한양도성의 성벽 돌 중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돌들이 있었다.

 

이 글자는 대개 성벽 축조 당시 천자문 글자에서 따온

공사 구역 표시, 공사 담당 군현 그리고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등이다.

 

 

 

 

어느덧 발걸음이 청운대에 다다랐다.

잠시 청운대에 서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의 천도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청운대는 북악산의 전면 개방을 기념하는 뜻에서 서울의 진산(鎭山)의 북쪽 최정상인 백운대(836m)를 본떠 청운대(293m)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이곳은 북악산에서 경복궁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궁궐의 구성을 위에서 살펴보기란 쉽지 않은데 마치 경복궁의 조감도를 보는 듯 하다. 광화문 대로를 지나 시청까지 도심의 풍경도 비교적 또렷하며 누구든지 청운대에서서 경복궁을 바라보게 되면 푸른 꿈을 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곡장曲墻 또는 치성雉城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로 도성 중 일부를 자연지세에 맞추어 돌출시킨 것을 치 또는 곡성이라고 부른다.

치雉는 생김새가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었다고 해서 붙인 것이며,각이 진 것을 치성이라고 하고 반원형으로 굽은 것을 곡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북촌마을과 남촌마을을 비교해 보면서

풍수학이 현재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되짚어 보면서 한양도성을 걸었다.

 

성벽을 이루는 다양한 돌들에 눈에 들어왔다. 태조, 세종, 숙종때의 성벽이 지금의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었다.

태조때는 큰 메주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고, 세종때는 장방형 돌을 기본으로 하여 사이사이에 잔돌을 섞어 쌓았으며,

숙종때에는 2자*2자의 석재를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튼튼하게 쌓았다. 이는 장정 4명이 들 수 있는 무게에 해당한다.

 

 

 

 

북악산 한양도성의 시간, 공간의 역사적 흐름을 느껴기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당도한 곳이 숙정문이었다.

 

 

 

 

 

 한양도성 사대문(四大門) 중의 하나. 본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한양도성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한양도성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한양도성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게 되었다.

 

 

 

 

 

숙정문을 지나 이내 말바위안내소에 도착을 했다.

1751번 표찰을 반납하고 화장실을 다녀온 후 와룡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바위 안내소를 지나 전망대에서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확 트인 전망대에서 마음의 휴식을 얻고 고요한 도성을 걷노라니 기분이 한층 맑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북악산 한양도성은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침묵은 내 안에 죽어 있었다고 생각했던 감각을 예리하게 뒤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요즘 한참 재미있는 SBS 월하드라마 '육룡의 나르샤' 때문인지는 몰라도

북악산 한양도성이 나에게 새롭게 느껴지지 시작했다. 또한 정도전의 민본정치도....

 

 

 

 

와룡공원을 벗어나 천천히 북촌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조의 '책방무사'에 들리기로, 전날 저녁에 twitter에서 요조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되기때문이다.

대간의 중심에서 일사천리를 탐하다.

 

 

 

 

황악산은 산림청 및 블랙야크 선정 100대 명산이자, 백두대간의 중심에 우뚝 솟아 높이가 1,111m(일사천리)인지라

이산에 오르면, 원하는 바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하여 이를 바라는 염원에 신년산행지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2016년 1월 2일 토요일 오전 7시.

대전시청에서 마모트 랩핑버스를 타고 황악산으로 향했다.

대전토요산악회 분들과 3개월만에 함께하는 2016년 신년산행이다.

 

 

 

 

오전 8시 20분.

금강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우두령에 도착했다.

안전산행을 위해 모두가 모여 신나는 체조의 시간도 가졌다.

 

 

 

 

소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우두령이라 불리는 산행 들머리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우두령은 소백산맥의 대덕산에서 동쪽으로 가야산 방면으로 뻗는 지맥 중의 국사봉과 수도산과의 안부에 위치한다.

남북방향의 고개로 북사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의 상류계곡과 통하고, 남사면은 낙동강의 지류 황강의 상류하곡과 이어진다.

 

 

 

 

오늘 산행은

우두령 ~ 삼성산 ~ 여정봉 ~ 바람재 ~ 신성봉 갈림길 ~ 형제봉 ~ 황악산 ~ 직지사 갈림길 ~ 직지사(주차장)까지 약 14.5km의 코스이다.

 

 

 

 

 

겨울같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주고

등산로 양쪽에 늘어선 노송과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평평하고 완만하며 비단같이 부드러운 등산로를 따라 걷다보니

우두령을 출발한지 1시간도 안되어서 삼성산에 도착을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엷은 미세먼지로 산맥의 풍경이 맑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백두대간의 중심이라는 말이 무색치 않게 서쪽으로 민주지산, 삼도봉, 덕유산, 남쪽으로 수도산과 가야산이 보였다.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석산이 아닌 육산이어서

선두, 중간, 후미가 큰 차이없이 산행속도가 비슷하여 여정봉에 다 함께 모이게 되었다.

 

 

 

 

 

눈길에 넘어지면서도 아무런 사고없이 여정봉을 내려오니 저멀리 황악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발 1,111m 황악산을 중심으로 백운봉, 신선봉, 운수봉이 치솟아 직지사를 포근히 감싸준다.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원래는 황학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높은 봉우리라는 뜻에서 '악(岳)'자를 섰으나, 높은 산임에도 석산이 아닌 육산이어서 흙의 의미를 담은 '황(黃)'자를 붙였다 한다.

 

 

 

 

"아이젠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바람재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모두들 짧은 거리라 그냥 내려가기 시작했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음지라 그런지 생각보다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2016년 안전산행을 위하여..."

 

무사히 바람재에 도착한 대전토요산악회 사람들은

케익과 샴페인으로 신년 기념산행을 자축하는 시간을 가졌다.

 

 

 

 

 

바람재에서 형제봉까지 1.5km이지만

0.7km를 급경사지를 올라가야 하기에 이번 산행코스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코스이다.

 

천천히 가뿐숨을 고르면서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형제봉을 지나 황악산 정상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갔다.

옛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이라고 불렀으나 직지사의 현판 및 택리지에는 황악산으로 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중심인 황악산 정상에서 한동안 말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민족 고유의 지리인식체계이며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에 내가 지금 서 있다.

 

 

 

 

왜 보려고 하는가?

왜 들으려 하는가?

왜 알려고 하는가?

왜 생각하려는가?

왜 입을 열려고 하는가?

왜 주먹을 쥐려고 하는가?

.

.

.

하나를 보면 둘을 보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소리를 들으면 뜻을 알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알게 되면 감정이 격하게 마련이다.

생각을 하면 절규하게 마련이다.

주먹을 쥐면 부수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뛰면 몸을 다치게 마련이다.

 

 

 

 

황악산 정상 옆 헬기장에서

겨울의 따뜻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점심을 먹은 후 생각에 빠졌다.

 

2016년 나의 키워드(key word)는 '희망'이다.

 

'simple life, high thinking'

물질생활을 간소하게 할수록 인간정신은 충족되고 높이 솟을 수 있다.

 

티가 있다는 것은 눈에 티가 끼어 있다는 뜻이며, 밖에 있는 티를 못 보는 것은 마음의 눈에 티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맑으면, 마음의 거울에 티가 없으면, 눈으로 보는 밖의 객체의 아무리 작은 티도 다 보인다.

 

 

 

 

조금밖에 남지 않은 눈쌓인 등산로를 내려와 직지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계절은 눈쌓인 겨울에서 낙엽이 떨어진 가을로 역행하고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참나무 숲과 깊은 계곡에 옥같이 맑은 물,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화가 아름답게만 보였다.

 

 

 

 

 

조선시대 사명대사가 출가하여 득도한 절로 유명한 직지사에 도착을 했다.

겨울이지만 봄날같은 산행이 이렇게 끝났다.

 

 

 

 

2016년 신년산행을 자축하는 즐거운 뒤풀이 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대전으로 출발했다.

 

Happy New Year

2016년 새해에는 행복가득,

사랑가득한 한 해가 되길 희망합니다.

한라산 산행 - 충청 Sherpa와 함께하는 도전

 

 

 

 

 

 

 

 

 

 

 

 

 

 

 

 

 

선발대로 제주에 먼저 도착한 충청세르파 3명(김창현, 문성식, 서정필)이 먼저 서귀포에 도착했습니다.

이중섭 거주지 및 거리, 자구리 해안, 정방폭포, 작가의 산책길 등을 탐방하면서 나른한 오후를 여유있게 보내고 있습니다.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탐방후 숙소인 서귀포수련원 바로 앞에 있는 평화식당이라는 곳에서 전복뚝배기에 한라산 소주한잔 마시면서 일행을 기다립니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충청 Sherpa와 함께하는 도전" 2015년 마지막 이벤트인 한라산 산행을 위해

4인의 충청 Sherpa(김창현, 문성식, 서정필, 이장원)와 6명의 명산100 도전자(김종률, 민경두 ,박정옥, 배순이, 이승희, 정안수)가 서귀포 수련원에 모였습니다.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에서 구입한

회(참방어)

전복

모닥치기

야채와 김

등으로 간단한(??) 만찬을 준비하여 완등 축하파티를 미리 열었습니다.

 

 

 

 

 

 

배순이(98좌), 이승희(99좌) 도전자님은 다음날 명산 100 완주를 백록담에서 하실 예정입니다.

시작을 잘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끝을 잘 맺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명산100 완주자들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12월 16일(수) 6AM.

한라산 산행을 위해 완전군장(??)을 갖춘 10명의 사람들이 새벽부터 서귀포 시내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불꺼진 거리를 헤메는 이유는 단지 아침밥을 먹기 위해서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서 가까운 식당에서 순대국밥으로 아침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 서귀포 동문로터리에서 버스를 타고 성판악에 도착을 했습니다.

산행준비를 하고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간간히 불고 있는 약간 흐린 날씨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았습니다.

 

 

 

 

 

 

산행이 시작되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것보다 훨씬 좋기에 기쁜 마음으로 눈을 맞으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숲속에 들어서니 차가운 바람도 약해지고 몸에서 열도 나고 해서 모두들 두꺼운 겉옷을 벗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이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등산로 주위에 가득한 조릿대는 이미 눈으로 덮여 한폭의 그림이 되어 버렸습니다.

속밭대피소 바로 아래 삼나무군락지를 지날때는 한박눈으로 변해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힘들었습니다.

 

 

 

 

 

 

이윽고 속밭대피소에 도착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한것도 사실입니다.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아이젠을 착용하고 진달래밭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끝없이 쏟아지는 눈들이 그들의 어깨를 누르는 듯

모두의 발걸음이 조금씩 더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꽃을 심어야 꽃밭에 여백이 생깁니다.

오늘은 눈이 내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 여백이 생겼습니다.

 

 

 

 

 

진달래밭에 다달를수록

정면을 똑바로 보기 힘들정도로 차갑고 매서운 바람과 함께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서둘러서 진달래밭으로 향했습니다. 헉헉~ 숨이 차 오릅니다.

 

 

 

 

 

오전 10시 20분.

힘겹게 진달래밭에 도착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상악화로 통제된 것입니다.

물이 홍수가 된다고 물을 나무랄 수 있나?

흙이 무너져 사태가 난다고 흙을 나무랄 수 있나?

 

 

 

 

 

 

진한 아쉬움이 우리의 가슴속에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라산 동능정상으로 발걸음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포기는 우리에게 상당한 힘을 부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상황을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원할때 다시 한라산을 찾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니까요!!!

 

 

 

 

 

 

 

성판악 코스로 다시 하산하면서 새햐안 설산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정상등정을 못한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성판악 탐방센터에 다시 도착하여 이날의 산행을 정리합니다.

서울에서 오신 도전자분들과 여기서 아쉽지만 작별의 인사를 하면서 다음을 기약해봅니다.

충청세르파 4명(이장원, 김창현, 문성식, 서정필)은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서귀포 수련원에 도착합니다.

 

 

  

 

 

저녁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귀포 수련원 근처의 "덕성원"이라는 중국음식점을 방문합니다.

사천짜장, 해물짬뽕, 탕수육 등을 포장하여  숙소인 "서귀포 수련원"에서 충청세르파분 4명이 성대한 만찬과 함께 오붓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울릉도 성인봉 산행 - 나리분지, 알봉분지, 신령수, 성인봉 원시림

 

 

해발 986.7m의 성인봉은 성스러운 성인의 산이라 하여 성인봉이라 일컬어지며

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된 원시림 지역에는 섬피나무, 너도밤나무, 섬고로쇠나무 등 희구수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봄, 여름, 가울, 겨울 각기 다른 천혜의 자연을 선보이며 산악인들을 유혹한다.

 

 

 

 

육로 일주, 성인봉 산행, 해상 일주, 독도 탐방

울릉도를 여행하는 네 가지 방법이며, 이중에서 오늘은 성인봉 산행에 대해 스토리를 쓰려고 한다.

 

 

 

 

성인봉을 오르는 주요 등산코스는

나리분지~성인봉, 대원사~성인봉, KBS울릉중계소~성인봉, 안평전~성인봉 네가지 방법이 있다.

이중 가장 수월한 것은 나리분지에서 출발해 성인봉 정상에 올라선 뒤 대원사 입구로 하산해 곧바로 도동에 도착하는 코스이다.

 

 

 

 

 

[천부-나리분지 버스시간표]
07:35, 08:15, 09:45, 11:20, 12:35, 14:25, 16:15, 17:20, 18:00

 

도동/저동에서 일주버스 탑승하여 천부(종점)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한 후

나리분지행 버스로 갈아타면 쉽게 나리분지에 갈 수 있다.

 

 

 

 

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지인 나리분지는 특이하게도 칼데라(분화구) 안에 자리잡고 있다.

화산 폭발로 생긴 불화구 안에 화산재가 쌓이면서 오늘날과 같은 나리분지가 만들어졌다.

 

나리분지는 동서로 1.5km, 남북으로 2km에 이른다. 울릉도에서 나리분지처럼 넓고 평평한 땅을 찾아볼 수 없다.

울릉도 감찰사 이규원도 “둘레가 40여 리나 되어 몇 천 호의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나리동이 설읍의 적지”라고 보고했다.

 

실제로 울릉도 개척시대에는 93가구 5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한 개척민들은 식량 사정이 열악해질 때면 주변에 흔하게 널린 섬말나리의 뿌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기도 했다.

‘나리’라는 지명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유난히 ‘라도’(전라도) 사람이 많이 들어와 살던 곳이어서 나리동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을 거침없이 달리는 버스는 15분만에 나리분지에 도착을 한다.

 

 

 

 

울릉도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 중 하나로 나리분지에서 알봉분지를 거쳐 신령수까지 이어진 코스이다.

기후와 지형을 극복하며 살았던 서민의 삶과 문화를 함께 담고 있어 울릉도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숲길이다.

 

총 길이는 약 4.5km 정도의 숲길이 잘 보존되어 있고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트레킹 코스이며

흐린 날의 안개 속은 신화 속으로 접어드는 듯 신비롭고, 코 끝에 스치는 피톤치드향이 진정한 힐링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울릉도 유일의 평원지대인 이곳 나리분지에는 각종 희귀멸종위기의 수목들이 즐비하게 원시림을 형성하고 있다.

 

원시림이란 오랜기간동안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없고,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아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숲을 말하는 것으로

울릉도 원시림은 성인봉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울릉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희귀식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서 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솔송나무, 섬단풍, 섬피나무 등 울릉도에서만 분포하는 수종들이 있으며, 섬말나리, 큰노루귀 등이 자생하고 있는 산림의 귀중한 자연이 보존되어 있다.

 

 

 

 

 

 

 

울창한 숲 속 아래 천연기념물 제52호 섬백리향과 울릉국화의 향기가 발걸음 마다 맴돌며 수 많은 희귀 보호식물들이 자생하는 곳이다.

 

  섬백리향은 나무가 우거진 것을 피하여 작은 순군락을 형성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작은 군락을 형성하지만 때로는 섬백리향이 자리잡은 가장자리에서 흔히 군락을 형성하므로 이 두 종류를 한군데서 볼 수 있다.

낮에는 향기를 느끼지 못하지만 밤중에 이 근처를 지날 때는 그 향기의 강함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울릉도 특산의 섬바디가 여기에도 흔히 혼생하고 샘이 터지는 습지에는 고초냉이가 자라지만 근래에는 울릉도의 이곳저곳에 이것을 심고 있다.

 

 

 

 

고요한 나리분지 숲길을 걷는 기분에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신령수까지는 거의 평지코스로 성인봉 등정 뿐만 아니라 원시림 산책으로도 충분한 곳이다. 

 

 

 

 

나리숲길에서 신령수로 향하는 숲길 도중에 투막집이 있다.

 

집은 울릉도 개척당시에 있던 울릉도 재래의 집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투막집으로 1945년 전후에 건축한 것이다.

이 집은 4칸 일자집으로 지붕을 새로 이었으며, 집 주위를 새로 엮은 우데기를 둘러쳤다.

큰방과 머리방은 귀틀로 되었고, 정지를 사이에 두고 마구간도 귀틀로 설치하였다.

일부 벽에는 통나무 사이에 흙을 채우지 않아 틈사이로 들여다 보기 좋고 통풍도 잘되게 한 특징이 있다.

정지는 바닥을 낮게 하여 부뚝막을 설치하고 내굴로 구들을 놓았다.

 

 

 

 

 

통나무를 귀가 어긋나도록 우물 “井”(정) 자 형태로 쌓고, 통나무 사이사이의 틈은 진흙으로 메워 벽체를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귀틀집을 강원도에서는 투방집이라 부른다.

울릉도의 투막집과 일반적인 귀틀집이나 투방집과의 두드러진 차이는 ‘우데기’라는 구조물이다.

 

우데기는 처마 끝부터 땅에 닿는 부분까지 집 둘레에 빙 둘러서 눈과 비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우데기 집은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 집 안의 활동 공간을 좀더 넓혀줄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그늘이 져서 집 안이 시원해진다는 이점이 있다.

반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탓에 집 안이 눅눅하고 어둑하다는 단점도 있다.

 

 

 

 

나리분지에서 알봉분지까지는 너도밤나무, 해송이 뒤섞인 천연림 속으로 완만한 숲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숲 바닥에는 명이, 큰두루미꽃, 털머위 등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 중에서도 명이, 곧 산마늘은 울릉도 개척민들의 목숨을 잇게 해준 고마운 나물이다.

맵싸한 맛을 내는 이 나물은 강정(强精)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울릉도의 명이는 강정제가 아니라 구황작물이었다.

굶어 죽은 사람이 많았던 섬 개척 당시 이 나물이라도 캐 먹은 덕택에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울릉도 주민들이 ‘산마늘’이라는 원래 이름 대신 ‘명(命)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사연에서 비롯된다.

 

 

 

 

 

신령수 샘터는 사람 손으로 가지런히 쌓은 바위들 틈에서 맑은 샘물이 쉼 없이 흘러내린다.

 

나리분지, 알봉분지, 신령수까지 이어지는 숲은 너도밤나무 일색이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너도밤나무 밑동 부분이 하나같이 조금씩 휘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거의 한 해의 절반동안이나 두텁게 쌓인 눈의 무게에 짓눌려 아래쪽이 휘어진 것이다.

 

 

 

 

신령수에서 성인봉으로 향하는 길에서 발견한 섬남성이다.

 

천남성과의 섬남성은 주로 울릉도 그늘에서 서식하는 식물로서 아주 강한 독성이 있는 식물이다.

옛날에는 극약의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피부에 스치면 강한 알러지가 발생한다는 독성식물이다. 

 

 

 

 

신령수 샘터에서 시원한 물 한모금을 마신 후 휴식을 취해 본다.

완만한 숲길의 트레킹은 이제 끝이 났고 급경사지를 오를 일만 남은 셈이다.

 

호흡을 크게 쉬고... 한발 한발 목재테크 계단을 올라 알봉전망대로 향했다.

 

 

 

 

 

알봉은 나리분지의 북서쪽에 위치하는 해발 538m인 작은 이중화산이며 정상에는 분화구의 흔적도 남아있다.

20세기 초, 전라도 사람들이 울릉도에 와서 배를 만들 나무를 구하러 산을 올랐다가 알처럼 생긴 봉우리를 발견하여 이때부터 알봉이라고 불렀다.

 

알봉은 나리분지가 만들어진 후에 형성되었다.

지하에 있던 마그마가 분출하여 화산이 만들어지면서 마그마가 수축하였고, 이로 인해 마그마 위에 있던 화산이 무너져내려 나리분지가 만들어졌다.

그 후 마그마가 나리분지의 틈을 따라 분출 하였는데, 멀리 흐르지 못하고 제자리에 봉긋한 돔의 형태로 알봉을 만들었다.

 

 

 

 

알봉전망대에서 바라본 주변 봉우리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성인봉 북서쪽으로 뻗은 봉우리미륵산(905m), 형제봉(716m), 송곳산(610m)으로 뻗어 추산몽돌해변 인근의 송곳봉으로 향한다.

송곳산 근처에는 예림원이라는 문자조각공원, 가수 이장희가 살고 있다는 울릉천국, 천부항 등이 있는 곳이다.

 

 

다. 

 

 

알봉전망대를 지나면 완만한 원시림의 능선길을 따라 이동하게 된다.

능선길 한편에는 아픈 속살을 다 드러낸 너도밤나무가 굿굿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너도밤나무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아득한 옛날, 울릉도 주민들이 “밤나무 100그루를 심지 않으면 큰 재앙을 내리겠다”는 산신령의 말에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며 고심했다.

밤나무를 99그루밖에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밤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나무를 하나 채워서 100그루를 심었다.

그것을 눈치챈 산신령이 크게 노해서 벌을 내리려는 순간, 무늬만 밤나무인 그 나무가 “나도 밤나무”라고 외쳤다.

깜짝 놀란 산신령이 그 맹랑한 나무에게 되물었다. “너도 밤나무냐?” 이렇게 해서 너도밤나무라고 불리게 됐다는 재미있는 전설이다.

 

 

 

 

 

신령수에서 물 한모금 마시고

성인봉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힘찬 발걸음을 디딘다.

 

 

 

 

 

이 성인봉 정기가 형제봉, 미륵봉, 나리령 등 크고 작은 울릉도 산봉우리로 뻗어간다.

성인봉 정상 아래의 전망대에서는 알봉분지와 미륵봉, 송곳산과 성인봉 북쪽 기슭의 빽빽한 원시림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지만, 가을의 절정이면 오색 단풍 숲으로 탈바꿈한 숲의 바다가 탄성이 절로 터져나오게 만든다.

마가목이 울타리처럼 에워싼 전망대에서는 초록색으로 뒤덮인 수해(樹海)와 쪽빛으로 일렁이는 창해(蒼海)가 눈앞에 펼쳐진다.

 

 

 

 

 

성인봉을 내려와 대원사로 향하는 하산길은 그야말로 원시림의 숲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큰두루미꽃은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10월이면 붉은 옥구슬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성인봉의 등성이와 산비탈에 피고 지는 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것은 섬말나리이다.

 

 

 

 

 

 

도동 대원사로 향하는 숲길은 이정표만 잘 보면 아무런 문제없이 하산할 수 있다.

 

 

 

 

원시림의 숲길을 벗어나 대원사로 향하는 길목에 독도전망대 케이블카와 도동항이 한눈에 들어왔다.

독도전망대는 망향봉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푸른 바다와 도동항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망향봉과 행남봉 사이의 좁은 골짜기를 따라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고

포항과 묵호에서 출발한 관광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곳이며 늘 비좁고 번잡한 곳이라는 뜻의 '도방청'에서 유래된 도동항이다.

 

나리분지~성인봉~대원사로 이어진 울릉도 성인봉 산행이 끝이났다.

근데... 울릉도 성인봉은 무슨산인지??? 여전히 궁금하다.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팔영산

 

 

8개의 봉우리가 남쪽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팔영산은 산세도 험준하고 기암괴석이 많습니다.

그리고 능선에는 팔영산자연휴양림도 조성되어 있어 일년내내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8개의 봉우리 정상에 올라설때면 다도해의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고흥군 전체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블랙야크 마운틴북 대전도전단과 함께 고흥 팔영산 산행을 하였습니다.

대전에서 7시에 출발한 블랙야크 랩핑버스는 쏟아지는 비와 눈을 피해서 무사히 팔영주차장에 도착을 했습니다.

 

사진을 찍고... 화장실을 다녀오니 사람들의 흔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충청도 사람들은 행동이 결코 느리지 않습니다. 겁나 빠릅니다.

 

 

 

 

총거리 8.2km의 팔영산 산행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팔영주차장- 능가사팔영자동차야영장- 흔들바위- 유영봉- 성주봉- 생황봉- 사자봉- 오로봉- 두류봉- 칠성봉- 적취봉- 깃대봉- 탑재-능가사- 팔영주차장

 

 

 

 

팔영산 탐방지원센터에 들려 날진병에 뜨거운 물을 담고서 능가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차피 혼자가 된 이상... 천천히 움직이기로 합니다.

시간이 문제이지... 결국 오르막 경사지에서 제가 다 추월하니까요??

 

웅장한 팔영산의 배경으로 위치하고 있는 능가사 대웅전은 국가 보물 제 1307호로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게 높습니다.

정문격인 사천왕상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로 규모가 전국에서 가장 큰 예술적 가치가 있습니다.

 

 

 

 

능가사 지나 천천히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감나무밭이 풍요롭게 펼쳐져 있고 감을 따지 말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내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전히 같이 온 사람들의 모습은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 절대로 조급하지 않습니다. 탐방객 집계선세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은선 대장이 ABC트래킹에서 인정한 산행실력이 이제부터 빛을 발할 순간입니다.

 

 

 

 

등산로 주변에는 소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등이 주종을 이루는 활엽수림에

때죽나무, 철쭉, 동백나무도 자생하고 있는 아름다운 숲길을 펼쳐집니다.

 

 

 

 

두 눈이 튀어 나올정도로 아름다운 숲길을 천천히 즐기면서

오르막 경사지를 쉼없이 5분여 올라가니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처럼... 뛰어봐야 벼룩입니다.

 

 

 

 

벌써 왔어??

제 모습을 보자마자 모두들 똑같은 말을 하십니다.ㅋㅋ

오르막 경사지를 걸어서 그런지 흔들바위에서 거친숨을 쉬어가기로 합니다

 

마당처럼 꼼짝하지 않는다고 하여 마당바위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흔들바위는

힘센 어른이 밀고 당기고 시름하다 보면 큰 바위가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기에 흔들바위라고 불리고 있답니다.

이게 말이여 막걸리여~!!ㅋㅋ

 

 

 

 

모두들 흔들바위 안내판의 내용이 어의가 없어서

유영봉으로 향하는 오르막 경사지에서는 힘든 줄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팔영산 정상 봉우리 능선에 올라서니

다도해의 절경과 함께 고흥군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랜시간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을 맞으면서도

정말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들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옛 문헌에 의하면, 이 산의 이름은 팔영산 이외에 팔전산, 팔령산, 팔점산 등으로 불리웠으며

산의 정상에 팔봉이 있는데 처째 유영, 둘째 성주, 셋째 생황, 넷째 사자, 다섯째 오로, 여섯째 두류, 일곱째 칠성, 여덟째 적취라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유영봉을 시작으로 8개의 봉우리를 오르고 내려야 할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유영봉

 

유달은 아니지만 공맹의 도 선비례라

유건은 썼지만 선비풍체 당당하여

선비의 그림자 닮아 유영봉 되었노라

 

 

 

 

 

성주봉

 

성스런 명산주인 산을 지킨 군주봉아

팔봉 지켜주는 부처같은 성인바위

팔영산 주인되신 성주봉이 여기로세

 

 

 

 

생황봉

 

열아홉 대나무통 관악기 모양새로

소리는 없지만 바위모양이 생황이라

바람결 들어보세 아름다운 생황소리

 

 

 

 

사자봉

 

동물의 왕자처럼 사자바위 군림하여

으르렁 소리치면 백수들이 엎드리듯

기묘한 절경속에 사자모양 갖췄구려

 

 

 

 

오로봉

 

다섯명 늙은 신선 별유천지 비인간이

도원이 어디메뇨 무릉이 여기로세

5신선 놀이터가 5로봉 아니더냐

 

 

 

 

두류봉

 

건곤이 맞닿는 곳 하늘문이 열렸으니

하늘길 어디메뇨 통천문이 여기로다

두류봉 오르면 천국으로 통하노라

 

 

 

 

 

 

잠시 쉬었다 갈게요~!!!

 

컵라면, 김밥, 케익, 멸치볶음, 매실장아찌, 김장 겉절이 김치 등 풍성한 음식들로

막걸리, 맥주, 복분자, 포조주와 함께 두류봉을 지나 칠성봉에 오르기 전에 아주 배불리 점심을 먹었습니다.

 

어의없게 모두들 팔영산 깃대봉은 안 들리고 하산을 할거라 말합니다. 후후...

그래서 인증을 안한 저만 열심히 다녀왔기에 칠성봉과 적취봉의 함께한 인증사진은 찍을 수 없었습니다.

 

 

 

 

칠성봉

 

북극성 축을삼아 하루도 열두때를

북두칠성 자루돌아 천만년을 한결같이

일곱개 별자리 돌고도는 칠성바위

 

 

 

 

적취봉

 

물총새 파란색 병풍처럼 첩첩하며

초목의 그림자 푸르름이 겹쳐쌓여

꽃나무 가지엮어 산봉우리 푸르구나

 

 

 

 

팔영산은 소백산맥이 서쪽으로 힘에 지친 듯 기울다가

동남으로 고흥반도를 바라보며 점암면 성기리, 강산리, 영남면 양사리 등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산입니다.

엄청난 바람을 뚫고 적취봉을 지나 도착한 깃대봉에 도착을 했습니다.

 

팔봉의 그림자가 멀리 한양에 까지 드리워져서 팔영산이라고 불렀다고 하고,

일설에는 금닭이 울고 날이 밝아 오면서 붉은 햇빛이 바다 위로 떠 오르면 팔봉은 마치 창파에 떨어진 인판과 같다 하여 그림자 영자를 붙였다고 하고,

또한 옛날 중국 위나라 태화연간에 팔봉의 그림자가 멀리 위주의 세수대야에 비추어 왕이 몸소 이 산을 찾아보고 비로소 그림자 영자를 붙여주었다고 전합니다.

 

 

 

 

 

쓸쓸한 인증샷을 찍고 깃대봉을 뒤로하여 하산길 접어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적취봉 아래 갈림길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적취봉에 도착한 일행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자마자 한마디씩 하십니다. 벌써 다녀온거야???

제가 원래 걸음이 빠르잖아요... 혼자서 다니면... ㅋㅋ

 

 

 

 

 

 

 거리이지만... 하산길의 발걸음은 누구에게나 가볍게 느껴지나 봅니다.

중간에 만난 편백숲을 지나 탑재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편백숲이 이처럼 아름답게 느껴진적이 없었습니다.

 

편백나무 숲보다 잣나무 숲에서 피톤치트가 더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만 알려드릴게요...ㅋㅋ

 

 

 

 

웃고, 떠들고 하다보니...

어느덧 숲길을 벗어나야 될 시점까지 하산을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사진을 찍어봅니다.

표정들이 한사람 한사람 살아있습니다. 미디어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습니다.

 

 

 

 

 

 

 

옛날에는 순천의 송광사, 구례의 화엄사, 해남의 대흥사와 함께 호남의 4대 사찰로 꼽혔던 능가사에 다시 도착을 했습니다.

약100평되는 경내의 분위기는 자연수 연못이 있어 주변 환경을 정화시켜 주며 대웅전의 단청은 고색 창연하여 감탄을 하게끔 합니다.

아직 오염되지 않아 자연적인 정취를 맘껏 느껴볼 만 합니다.

 

해가 뜨면 아침 이슬이 마르고, 바람이 불면 붉은 먼지가 일어납니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야 한다라는 뜻을 제대로 알게해 준 팔영산 산행이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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