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에 있어 대역죄인이다. 자유로운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불법 활동으로 자연이 훼손되었으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유전자 보호구역을 무단 침입하여 야생화를 짓밟고 쓰레기를 내버렸다. 자연에 피해를 준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기적인 자신의 욕구 충족이 우선이고 진정한 자연의 돌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연과 우리의 위치를 바꾸어 자연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인간은 무시무시한 파괴자로 보일 것이다. 자연은 해의 흐름에 따라 하루를 살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루를 산다. 자연은 언제나 그곳에 평화롭게 있었는데 인간이 갑자기 다가가니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위치를 바꾸어 생각함으로써 자연을 어떻게 보존해야 훼손을 덜 하게 될지를 알게 된다. 인식의 기준을 잠시 바꾸어 보아야 진정한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곰배령 가는 길

 

곰배령으로 향하는 길은 닫혀 있다. 오직 허가받은 사람만이 강선마을을 지나 좁은 숲길과 계곡을 따라 걸어갈 수 있다. 노루귀, 괭이눈, 바람꽃, 개별꽃, 모데미풀, 제비꽃, 현호색, 미나리아재비, 한계령풀, 얼레지 등 숲에서 발견한 야생화는 경이롭다. 겨우내 숨어 지내던 식물들이 봄소식에 깨어나 생명의 빛을 발산하고 있다. 숲길은 좁고 자연은 시련에 훼손되었지만 완전한 만족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이 길을 따라 걷는다. 오랜 세월 버텨온 야생화가 만들어낸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 그 길에 있다.

맑은 날,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숲에 끝없이 펼쳐질 때 활짝 꽃을 피운 야생화를 본 적이 있는가? 야생화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생명력을 유지하고 저마다의 색깔로 활짝 피어난다. 나는 야생화가 활짝 핀 숲속을 거닐고 있다는 것에 대해 신비함을 느낀다. 계절은 정해진 절기로 순환하면서 쉼 없이 변화하고 있다. 숲은 분주히 깨어나는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 나 또한 숲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자연에서 자유를 느낀다. 가장 원초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느낌과 감각에 자극을 주어 현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늘 변화를 원한다.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정체되어 있지 않은 자연에서 봄의 새싹, 야생화 등 역동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자연을 보고 진리 탐구를 하기보다는 미적 탐구를 통해 감성적으로 느껴야 한다. 자유를 꿈꾸는 사람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찾아야 한다.

 

적당한 무관심

 

곰배령에 올라서면 평화로운 자연풍경이 펼쳐진다. 우뚝 솟아있는 나무 아래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점 길어진다. 산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지키려면 적당하게 무관심해야 한다. 너무 지나친 관심은 자연에 고통을 줄 뿐이다. 쓱 스쳐보면서 마음속으로 감탄해야 진정으로 자연을 위한 것이다.

큰 산맥은 여러 갈래의 지맥을 품고 있다. 웅장한 산봉우리는 호주머니의 송곳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산이 어느 산의 봉우리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작은 봉우리가 없으면 큰 산맥도 없는 것이다. 곰배령에서 점봉산, 설악산 중청과 대청을 바라본다. 마음은 소박해지고 사사로운 욕심은 어느새 사라지게 된다.

 

아름다운 기억

 

세월과 함께 잊히는 것도 있지만 자연과의 추억은 세월과 함께 아름다운 기억이 짙어진다. 찾아오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사람과의 만남처럼 산이 정답게 느껴진다. 농익은 자연풍경이 계절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슬프도록 푸르고 싶은 하늘을 바라보며 다짐한다. 자연과 사귀기 위해 이곳에 홀로 머물러야겠다. 자연은 홀로 있는 사람에게만 가슴을 연다.

 

기린에서 길을 들자면 방동리도 멀다. 도시의 삶이 익숙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더 가야 방동리가 나오나? 할 것이다.

진동리는 그다음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동네가 진동리다. 초입에 들어서 한참을 가다 보면 아침가리계곡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온다. 여기인가 싶지만 어림도 없다. 오늘 가야 할 지표는 설피 마을, 부지런히 페달을 가속한다. 마치 군 경계 하나쯤을 넘었을까 하는 지루함이 몰려들 때쯤 조침령터널을 마주하며 좌회전을 한다. 설피 마을의 초입이다. 그렇게 깊은 골을 품고 사는 마을이 진동리다.

 

진동호를 돌고 돌아 말안장으로 훅 들어선다. 백두대간이다. 오늘은 단목령으로 길을 잡는다. 이렇게 부드럽고 두터운 대간이 있을까! 늘 대간은 가파르고 곧추서고 칼 능선으로 길잡이 노릇을 한 터였다. 너무 낯선 두터운 대간을 걷는다. 우뚝 선 나무들도 있지만 역시 대간이다. 제멋에 겨운 군상들이 대간을 호위한다. 제멋대로 생긴 그들은 나름, 모두가 백 년의 세월 동안 백두대간을 지키는 장군들이다.

대간은 이제 막 첫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다. 박새, 한계령풀, 노랑제비꽃 그리고 얼레지. 사이사이에 노루귀도 얼굴을 내민다. 아직은 이른 봄을 준비하는 대간을 따라 단목령에 들었다. 훅 들어서 미안한 마음으로 나선 길에 두터움으로 다가오는 대간을 벅차게 안고 도는 하루가 간다. 대간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양양의 바다는 덤이다.

 

다음날 다시 들어선 진동호의 산허리, 오늘은 조침령이다. 역시나 두텁고 평활한 산맥이 길라잡이로 나선다. 1000고지에서 삶터를 본다. 얼마쯤인가 걸음을 하였다. 대간을 호위하는 군상들은 제모습을 감추고, 겨우 살아낸 못생긴 나무들이 열병식을 한다. 그들의 삶터는 틈이 없다. 얽히고설키고, 내가 살아있음을 선포해야 하는 그들은 만 가지 모양으로 대간을 지키고 있다. 그렇게 허리를 감고 도는 바람을 벗으로 삼아, 아직은 서늘한 대간은 꿈을 꾼다. 왼쪽으로 보이는 양양의 바다는 오늘도 덤이다.

 

일주일 후에 다시 든 진동리, 오늘은 곰배령이다. 모두 '천상의 화원'이란다. 사실은 늘 꿈꾸었다. 곰배령, 곰배령, 곰배령. 탐방센터를 지나 계곡을 따라 길을 나선다. 초입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속새, 얼레지, 바람꽃, 투구꽃, 개별꽃, 애기괭이눈, 한계령풀 그리고 모데미풀. 사실을 고백하자면 알 수 없어 부르지 못하는 이름이 수백 가지다. 아직은 봄의 초입인 진동리에는 준비하는 봄의 무게가 더 깊다. 알 수 없어 부르지 못하는 그대들의 품에, 미안하지만 오늘도 걸음을 한다.

곰배령을 지나 능선에 든다. 고운 생명의 움틈을 발아래 두고 아직은 시린 거친 걸음을 걷는다. 머리가 시릴 만큼 진동리 능선의 4월의 바람은 거칠다. 얼마를 걸었을까, 저만큼에서 설악산 대청봉이 사람 좋은 웃음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래 설악산이구나, 네가 설악인 거야!‘

오랜만에 방동리 너머 진동리의 삶을 산다. 거친 산들의 아래에, 그렇지만 초라하지 않게 두터운 삶을 살아내는 진동리. 백두대간도 진동리를 지날 때면 거친 걸음을 멈추고 따스하고 두터운 품에 잠시 숨을 쉰다. 그 품속에서 우리는 함께 숨을 쉰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누구나 유토피아, '이 세상에 없는 장소'를 꿈꾸며 세상을 살고 있다. 현실 상황이 복잡하고 힘들수록 이상에 대한 염원을 끝없이 추구하려고 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 즐거워지려면 마음과 상반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 속에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나 좋을 대로, 자유와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면 어디에도 없는 곳과 만나는 순간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떠돌이 여행자

 

봄의 산뜻함이 좋고 여름의 싱그러움이 좋다. 가을의 풍요로움이 좋고 겨울의 총명함이 좋다. 내 인생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었다. 인생은 떠돌이 여행자다.

나는 가끔 도보여행하면서 경험주의자가 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것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가장 멋진 하루를 살아가는 방법은 마음의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훌쩍 떠나온 인제 여행이 기쁘다. 공기가 바람에 녹아 솜사탕같이 달콤한 한밤 공기는 싱그러운 냄새를 품고 있다. 지금 이곳은 흐르는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다.

 

숙취

 

간밤에 마신 알코올의 취기가 아직 남았는지 머리가 무겁다. 술이 덜 깼는데 날씨가 화창해 왠지 슬픔이 몰려온다.

함께한 상대와 분위기에 따라 주량은 달라진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되지만 많이 마시면 마약과 같은 것이다. 숙취가 주는 지속적인 머리의 통증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을 주고 있다. 아침에 먹은 막국수의 소화되지 않은 것들을 원대리 야산의 급경사지에서 쪼그리고 앉자 비워내야만 했다.

 

숲을 보다

 

숲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미세하게 자라고 있는 나무의 생명력이다. 숲속으로 더 들어가니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생명줄을 놓아버린 전도된 나무와 부러진 나무들이 있었다. 본시 아름드리나무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폭설에 그 기상이 꺾이고 만 것이다.

숲의 햇빛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더욱 밝은색으로 지면을 비춘다. 바싹 말라버린 낙엽 사이에서 생명력을 키워낸 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숲에 들어왔던 햇빛은 다시 반사되어 숲을 빠져나간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변해 버린다.

 

천상의 화원

 

내가 돌단풍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올망졸망 제각각 놓여 있는 돌들 사이에서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작은 생명체 같은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을 거로 생각하는 장소에 생명의 씨앗을 키웠다. 나는 움직일 수 없는 자연의 피사체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찍었다. 그것은 내가 본 백만 송이 돌단풍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돌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돌단풍은 돌이 삶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한낮의 태양은 하늘 높이 떠 있고 내린천은 미세한 거품을 일으키며 찰랑찰랑 흘러간다.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는 반대편 강기슭, 물에 빠지더라도 열정적으로 건너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봄날의 내린천은 돌단풍의 보금자리이고 물소리의 힘찬 외침 속에서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내린천

 

내린천은 물길이 트면 그 방향으로 흐른다. 어떤 가식적인 치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내린천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고 있다. 계절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기적과 흐르는 물로 인한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물살이 주는 공포 때문에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오랜 산행으로 세숫대야에 찬물을 받아놓고 족욕을 하듯 그냥 발을 내린천에 담그고 싶었다.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바위에 철퍼덕 앉았다. 물이 주는 시원함에 잔뜩 취해서 세수도 했다. 오 맙소사. 1분도 안 지났는데 발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서리치며 얼른 물에서 발을 뺐다.

흐르는 물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물에 반사된 내 머리가 보인다.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내린천의 흐르는 물속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매우 친밀하고 떨어질 수 없는 친한 물고기와 물의 사귐인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사자성어처럼 그걸 말로 표현하려 노력했지만,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인생

 

시간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세월은 흐르는 내린천처럼 쉬지도 않고 계속 흘러간다. 때로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완만하게, 때로는 급류를 만난 성난 강물처럼 거침없이, 마치 폭포수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릴 뿐이다. 인생은 물처럼 흐르기 위해 사는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어느새 거대한 바다와 마주하게 된다. 바다는 물이 더해져도 흘러넘치지 않는다.

오늘도 내 인생은 내린천처럼 흐른다.

 

 

얼마 전쯤 서천의 벗으로부터 문득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벗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본래에도 자신만만하고 활달한 벗이긴 하나, 그날의 목소리는 더욱 기운찼다.

서천에 한번 와야것다.”

그려

그렇게 오랜만에 벗을 만난다. 그 잘난 전화기 덕분에 목소리로만 간간이 인사치레를 하다가 정말 오랜만에 벗을 본 것이다.

왔어, 현장에 가봐야 할 거 아녀?”

그려

그렇게 찾은 곳이 종천면에 있는 치유의 숲이다. 치유의 숲 입구에 저수지가 있고 그 둘레를 따라 무장애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본래의 업무인 유아숲 체험시설은 뒷전으로 밀리고 오랜만에 만난 벗은 노린재나무의 가치며, 저수지 옆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신갈나무 고목의 삶터며, 저수지 주변에 살고 있는 수달 이야기며, 끝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 그의 말 끄트머리에 주석을 달 듯 그대의 이야기가 옳으며, 저 정도 크기의 노린재나무면 족히 수십년의 삶을 살아냈을 법하고 또 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하여, 신갈나무 고목의 옆에서 무심한 듯 졸고 앉아 있으며 좋겠다는 이야기며, 수달이 살고 있는 이 삶터가 얼마나 중요성이 있는지 등속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내고 있었다.

오십을 넘은 중년의 두 사내는 마술에 걸린 듯 그렇게 끊임없는 수다를 풀어내며, 오후 시간을 저수지 위에 드리워진 산 그림자에 던지고 있었다.

세시쯤인가 사무실에 도착한 그가 묻는다.

막걸리 할 껴, 소주 할 껴?”

소주

그렇게 우리 둘은 서천특화시장 2층에 자리를 잡았다. 활어회와 쭈꾸미가 상 위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서로의 술잔을 채우기 바빴다. 그렇게 바삐 오가는 술잔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허공으로 유영을 한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기거나 오랜만에 만나니 정말 반갑다는 등의 이야기는 없다. 그저 수다스럽게 변한 두 중년의 남정네는 활어회가 남을 만큼의 수다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오랜만의 낮술은 기어이 해를 서쪽 바다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며칠 후 다시 인제 내린천에 들었다. 원대리 입구의 원대교에서부터 피아시까지 내린천의 비탈을 따라 걷은 걸음이었다. 인제의 산들은 여지없이 뒤축을 잡아당기고, 폭설에 부러진 고목들과 가시덤불들은 좀 쉬었다 가라고 옷소매를 당긴다.

얼마쯤이나 갔을까, 기어이 나타나서 길을 막는 암벽에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늘 길 아닌 길을 걸으며 쏟아내는 한숨같은 소리를 오늘도 결국은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 있었다. 결국 나무와 바위에 구걸을 하며 겨우 내린천으로 내려왔다. 거만하게 곧추선 암벽에 그만 기가 죽어 천변에 지천으로 깔린 너럭바위에 주저 앉았다. 여울목인 그곳은 무심히 흐르는 내린천이 아니었다. 물이 많지않은 시기인데도 내린천의 노여움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한 만큼의 소리를 내며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비 오는 제주, 갈 곳이 없어지고 할 일도 없어졌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문득 그런 날이 있다. 공기에 비 냄새가 섞여 있지만 내 마음을 적시기에 아직 양이 부족하다.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날씨라는 약간의 결핍이 필요하다.

안개에 물들고 싶은 새벽이다. 어둠을 바라보며 난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새벽부터 한라산 산행을 시작한다.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익숙함에 곧 안도감을 느낀다. 이 순간도 조만간 지나가겠지.

 

괜찮은 사람

 

세상에서 가장 짙은 어둠을 내 뒤에 두고 열심히 산을 오른다. 걸음에 집중하다 보니 먼동이 떴고 어느새 편백 숲이다. 위풍당당한 발걸음에 신이 절로 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평범하다, 특별하다'란 말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품 안에 자연을 담을 수 없지만, 마음속에는 나만의 자연이 존재한다. 숲을 지키는 나무는 하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준다. 숲은 인간의 본보기다. 나무는 홀로 살지 않고 이웃 나무들과 숲을 이룬다.

아직 익지 않은 과실처럼 숲의 냄새도 풋풋하다. 절기는 입춘을 지났지만, 조석으로는 겨울을 실감하게끔 쌀쌀하다. 한낮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한없이 높기만 하다. 산 정상에 오르면 하늘에 닿을까? 바다같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나룻배처럼 떠다닌다. 나뭇가지 사이로 맑고 투명한 햇빛이 대지에 닿으면 유릿가루처럼 빛을 낸다.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면 풋풋한 숲에서도 상큼한 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구상나무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고사한 구상나무지만 죽은 나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한라산의 아침은 평화롭고 구상나무는 싱그럽다. 푸른 색채에 빛나는 나뭇결무늬가 무성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얼어 있던 상고대가 녹아 무성한 숲으로 빛을 발산하며 스며든다. 한라산은 높지만 그윽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쉬고 싶을 때는 언제나 그곳으로 찾아가 내 보금자리를 만든다. 자연의 의연한 기상과 늠름함에 매료된 순간이다. 기분 좋다.

산은 구름에 기대어 살고 구름은 바람에 기대어 산다. 기대어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다. 오늘 내가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파도처럼 바람에 출렁이는 맑은 하늘이다.

한라산만 52번째

 

눈부시게 맑은 날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을 쳐다본다. 한반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보다 더 청량한 세상의 첫 공기를 마신다.

세상의 주인은 자연이다. 한 생명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세상을 자연으로부터 빌려 한평생을 사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소유욕은 자연을 황폐화한다. 끊임없는 소유욕은 언젠가 화마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자연이 원금이라면 자연이 사계절 동안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은 이자다. 세상 이치가 이자로 먹고살아야 한다. 원금으로 먹고살기 시작하면 금세 황폐해지고 만다. 물질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을 정복하려고만 한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고 어느 등산가의 욕망도 무궁무진하다. 구름으로 뒤덮인 날, 비바람이 부는 날,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 비록 환상적인 풍경을 못 보고 허공을 향해 고함만 지르다 가도 그저 좋았다. 복 받게도 오늘은 청량한 봄 날씨다. 나는 오늘의 한라산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금산 인제 금산 인제 금산. 쳇바퀴치고는 좀 긴 걸음들을 무시로 옮기고 있었다.

 

인제에 들어 처음 찾은 곳은 상남면 미산동이다. 미산약수교 앞에 서서 개인약수를 품은 계곡을 바라본다. 올라가는 길이 눈에 선하고, 마음은 이미 저 앞으로 가고 있었다.

동행한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과 내린천에서 솟구치는 날카로운 바람에 흠칫 놀라 벌써 저만큼 나아간 정신을 끌어당긴다. 지역과 사람과 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아직은 찬 바람 속을 날고, 급히 한마디 보태느라 개인약수는 잊은 지 오래다. 그렇게 소개인동이며, 의식동 등을 돌고 돌아 인제의 짧은 걸음을 마쳤다.

다음날 곰배령을 찾아들었다. 기린면의 골짜기며 산봉우리들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림들이다. 오랜만에 스쳐 가는 그리운 풍경들, 방동리와 진동리의 골짜기들은 가만히 웅크린 채 숨죽여 봄을 준비하고, 곧추선 봉우리들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겨울을 무심한 듯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설피 마을까지만 겨우 걸음 하였다. 더 갈 수 없는 곰배령은 진부령 너머 해금강처럼 다음에 오라고, 좀 더 따스한 날에 걸음 하라고, 그렇게 그리움 짙은 손짓을 한다.

또 그리움이야! 허허허.’

 

다시 찾은 인제는 여전히 겨울을 털어내지 못하고, 제 죄인 양 새색시 걸음을 하는 내린천의 흐름은 시리게 곱다.

북사면에 기대어 사는 나무와 바위들은 여전히 추위에 떨며 봄을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도 따스한 볕이 드는 남사면 나무들의 허물을 벗듯 허연 기운을 가지 끝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래 얼마 남지 않은 게야!’

내린천을 따라 걸었다. 길 아닌 길을 걷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의 틀 안에서, 그 길이 결국 길벗들의 길이 되리라는 소망으로, 그렇게 그날도 거친 걸음을 하였다. 그래도 내린천을 곁에 두고 걷는 걸음이, 호위무사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변곡점마다 곁에 서서 지친 걸음을 다독여주는 인제의 봉우리들과 함께 걷는 걸음임에, 그날도 걸음만큼 행복했었다.

 

금산에 들었다.

천내리며, 길곡리며, 신안리며, 산안리 등을 돌고 돌았다. 제법 온기를 품은 볕이 골짜기마다 내려앉고, 삶터마다 작은 연둣빛 생명을 밀어 올리고 있다. 물론 잠깐 이는 바람 곁에는 아직도 찬 기운이 동행한다.

금산의 산들은 인제의 산들을 닮았다. 그 풍채와 상관없이 곧추선 봉우리들은 어깨를 으쓱대며 제 자랑질이 한창이다. 곧추선 만큼 깊은 것이 골짜기요, 그 걸음은 한없이 거칠어진다.

때론 한 걸음을 앞쪽에 놓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가 있다. 그 정도쯤 인제와 금산은 거칠게 닮았다. 그 길 아닌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길벗들의 길을 본다.

 

머지않은 날에 인제에 들 것이다.

이미 곰배령이며 백두대간의 걸음을 예정해 놓은 것으로 묶인 걸음의 서운함을 달래는 중이다. 작년 봄에 걸음 하였던 방태산의 가식 없는 선물 보따리들이 눈에 선하다. 얼레지, 바람꽃, 박새, 모데미풀, 연영초 등속은 기어이 백만 송이의 꽃으로 고운 화원을 그려내었다.

그만큼이 아니라도 좋다. 연둣빛 움틈이 시작되는 날 인제의 봄을 마중하러 갈 것이다. 오늘 금산에서 노란 첫봄을 보았다. 이미 남쪽에서 물밀 듯 밀려드는 봄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신안리 고운동 골짜기에 핀 생강나무꽃은 올해 나의 첫봄이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1997년 나의 첫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약 1달 동안 하노이를 중심으로 베트남 북부여행을 다녀왔다. 2000,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10개월 동안 인도와 네팔을 여행했다. 낯선 곳에서 지낸 그때의 삶의 교훈은 인생의 여행자로서 삶에 초석이 되고 있다.

한 달 이상의 장기 여행이 좋은 이유는 여행이 일상이 되고 그 일상 속에 모험을 즐긴다는 점이다. 장기 여행은 정해져 있지 않은 불확실함과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불확실한 순간과 만남은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인생과 세계관을 변화시킨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준비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 일상을 벗어나면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내 일상이 된다.

 

딱하다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마음대로 해외여행을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땀 흘려 일하고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듯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녔던 그 날들이 그립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날씨와 상관없이 우울한 습기가 느껴진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소중하다. 한번 흘러간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여행자로서 확실한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자유로운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할수록 어느 장소이든 간에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한 줄기 바람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다.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밤에 떠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노는 맛

 

1년 전, 나는 제주에 있었고 정확히 오늘 추자도로 향했다. 자연을 직접 보지 않고서 어떻게 글을 쓴단 말인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나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하늘은 맑아졌지만 바람은 멈추지 않아 파도가 심하다. 여행에 있어 파도가 심하게 출렁거리는 게 심각한 걱정거리는 아니다. 멀미로 고생한 여행이라도 보람과 살아있음을 느낀다. 퀸스타 2호 실내공기에 바닷냄새가 섞여 있다.

강풍이 휩쓸고 간 후 하늘도 땅도 그저 좋은 봄날이다. 바닷바람이 등을 떼밀어 추자도 숲길을 즐겁게 걷는다. 온전히 나를 보고 자연을 보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이 순간을 누릴까?

사람의 자취가 거의 없는 곳으로 바람을 피해 이곳에 왔다.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연장하고 싶어 나바론 절벽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다시 추자도에 온다면 그때는 지금의 추자도는 아닐 것이다. 지금 난 차갑게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길에서는 나라는 사람의 꼬리표를 항상 떼고 다닌다. 유유자적 걷는 방랑의 삶도 참 멋지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봄 하늘, 흰 구름이 떠다닌다. 구름의 이동만큼 세월의 흐름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내 젊은 날의 자취가 구름과 함께 사라진다. 어떤 여행을 하든 간에 경험이 써 내려가는 삶의 드라마는 찬란하게 눈부시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여행은 부자유를 거부하고 세상을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다. 일에 얽매여 삶이 지쳤을 때는 현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휴식과 삶을 찾아 떠나야 한다. 낯선 곳을 여행하면 할수록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엉켜있던 생각의 끈이 실타래처럼 막힘없이 풀리게 된다. 바람의 방향에 자신을 맡기면 자연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다.

 

여행의 들뜸으로 인한 부산스러움은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시간에 쫓기어 변화되어 가는 차창 밖의 흐름도 외면한 채 길을 재촉했다. 조금만 더 여유로웠더라면 인제에 잠시 들러 막국수 한 그릇의 즐거움을 위장에 담아 갔었을 텐데 그날도 초행길인 양 낯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두 주일 전쯤 그렇게 진부령에 발을 디밀었다.

 

대관령의 넉넉함이나 미시령의 더딘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르게 진부령은 늘 시리게 서럽다. 향로봉을 향해 백두대간의 걸음을 더는 옮길 수 없어서인지, 고성전망대에서 바라본 갈 수 없는 해금강의 아름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부령은 오늘도 서럽게 나를 맞는다.

오랜만에 흘리에 들렀다. 흘리는 넉넉해야만 한다. 백두대간 위에 선 그 만큼의 넉넉한 땅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허나, 흘리도 여전히 쓸쓸한 풍경으로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다. 아직은 겨울 끝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바람도 잦아들고 날도 많이 풀려 봄바람을 기다리는 때다. 곧 겨울을 밀어낸 움틈이 시작되면 진부령이나 흘리나 연둣빛 웃음으로 이웃을 맞을 것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선유실리로 이어지는 임도에 들었다.

 

넓게 펼쳐진 임도를 따라 늘어서 있는 나무들은 손짓으로 인사하며 우리 일행을 반기고, 저만큼 보이는 탑동리 너머 간성의 바다는 코발트 빛으로 어서 오라고 수작을 한다. 간성의 바다는 금강산 아래 해금강과 연이어 있다. 그리움 한 조각을 바람에 실어 간성의 바다에 보내본다. 혹여 바다의 흐름이 남쪽으로 향하는 때면 어떻게 하나라는 쓸데없는 걱정이 머리를 조여온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녀석을 밀어버렸다.

오늘은 이만큼으로 좋다. 시리게 서러운 진부령에도 연둣빛 움틈이 봄바람을 타고 올 때쯤이면 따스해 지리라.

 

다음날 평창의 발왕산에 올랐다. 초입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가슴팍을 후비는 냉기에 덕지덕지 옷을 겹쳐 입고, 장갑에, 모자에 정신이 없었다. 스키장 입구는 많은 이들의 걸음으로 분주하다. 추워질수록 행복한 그들은 리프트를 타기 위한 긴 줄 앞에서 마냥 즐거워한다.

잠깐의 절차를 마치고 곤돌라를 타고 발왕산에 오른다. 넉넉한 걸음으로 오르는 곤돌라 아래 여러 개의 활강코스가 눈에 들어온다. 날렵한 맵시를 뽐내며 활강하는 그들에게 발왕산은 온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사방을 할퀴면서도 앓는 소리조차 없이 몸을 맡기고 누워있는 발왕산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스키를 타본 경험은 없지만, 굳이 스키장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늘 그렇듯이 할퀴어진 세상을 보는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것도 삶의 한 방향이라고 되뇌며 발왕산에 도착했다.

 

영하 19.7, 발왕산이 이방인을 맞는다. 칼바람까지 더해진 정상은 체감온도 영하 30도 이하다. 즐거운 걸음을 하던 이방인들은 앙칼진 발왕산의 외침에 스카이워크 아래 대피소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내빼기 일쑤다.

옷깃을 여미고, 모자를 눌러쓰고 발왕산을 맞이한다. 백 년의 세월을 살아낸 나무들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산을 지키고, 산 아래 군상들은 오늘도 올망졸망 제멋으로 삶을 산다.

발왕산의 하늘은 푸르다. 발아래 흰 눈을 덧대어 그 푸르름이 더 하겠지만,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발왕산은 늘 푸르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칼바람을 타고 가슴으로 온다. 옆구리 한쪽에 그 큰 생채기를 안고 살면서도 의연하게 푸르른 발왕산에도 연둣빛 움틈이 곧 올 것이다.

 

어제 진부령의 봄이 66.9cm의 눈에 묻혔다는 소식이 바람을 타고 온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는다. 그 두꺼운 눈 이불 속에서 연둣빛 움틈은 봄을 재촉하고, 곧 나는 진부령으로 따스한 봄을 맞이하러 갈 것이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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