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제주, 갈 곳이 없어지고 할 일도 없어졌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문득 그런 날이 있다. 공기에 비 냄새가 섞여 있지만 내 마음을 적시기에 아직 양이 부족하다.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날씨라는 약간의 결핍이 필요하다.

안개에 물들고 싶은 새벽이다. 어둠을 바라보며 난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새벽부터 한라산 산행을 시작한다.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익숙함에 곧 안도감을 느낀다. 이 순간도 조만간 지나가겠지.

 

괜찮은 사람

 

세상에서 가장 짙은 어둠을 내 뒤에 두고 열심히 산을 오른다. 걸음에 집중하다 보니 먼동이 떴고 어느새 편백 숲이다. 위풍당당한 발걸음에 신이 절로 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평범하다, 특별하다'란 말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품 안에 자연을 담을 수 없지만, 마음속에는 나만의 자연이 존재한다. 숲을 지키는 나무는 하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준다. 숲은 인간의 본보기다. 나무는 홀로 살지 않고 이웃 나무들과 숲을 이룬다.

아직 익지 않은 과실처럼 숲의 냄새도 풋풋하다. 절기는 입춘을 지났지만, 조석으로는 겨울을 실감하게끔 쌀쌀하다. 한낮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한없이 높기만 하다. 산 정상에 오르면 하늘에 닿을까? 바다같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나룻배처럼 떠다닌다. 나뭇가지 사이로 맑고 투명한 햇빛이 대지에 닿으면 유릿가루처럼 빛을 낸다.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면 풋풋한 숲에서도 상큼한 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구상나무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고사한 구상나무지만 죽은 나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한라산의 아침은 평화롭고 구상나무는 싱그럽다. 푸른 색채에 빛나는 나뭇결무늬가 무성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얼어 있던 상고대가 녹아 무성한 숲으로 빛을 발산하며 스며든다. 한라산은 높지만 그윽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쉬고 싶을 때는 언제나 그곳으로 찾아가 내 보금자리를 만든다. 자연의 의연한 기상과 늠름함에 매료된 순간이다. 기분 좋다.

산은 구름에 기대어 살고 구름은 바람에 기대어 산다. 기대어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다. 오늘 내가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파도처럼 바람에 출렁이는 맑은 하늘이다.

한라산만 52번째

 

눈부시게 맑은 날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을 쳐다본다. 한반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보다 더 청량한 세상의 첫 공기를 마신다.

세상의 주인은 자연이다. 한 생명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세상을 자연으로부터 빌려 한평생을 사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소유욕은 자연을 황폐화한다. 끊임없는 소유욕은 언젠가 화마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자연이 원금이라면 자연이 사계절 동안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은 이자다. 세상 이치가 이자로 먹고살아야 한다. 원금으로 먹고살기 시작하면 금세 황폐해지고 만다. 물질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을 정복하려고만 한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고 어느 등산가의 욕망도 무궁무진하다. 구름으로 뒤덮인 날, 비바람이 부는 날,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 비록 환상적인 풍경을 못 보고 허공을 향해 고함만 지르다 가도 그저 좋았다. 복 받게도 오늘은 청량한 봄 날씨다. 나는 오늘의 한라산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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