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쳤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오늘 이러고 있나? 나도 모르게 나온 소리다. 장거리 이동에 산행까지 그야말로 강행군이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몸을 이끌고 개도 구릉지의 도로를 걷고 있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이온 음료를 마신다. 그리고 걷고 또 걷는다.

이곳이 개도주조장이다.

개인적으로 주조장보다는 술도가라는 단어가 더 좋다.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을 것 같은 이곳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도 없으면 안 되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안으로 들어간다. 건물 안쪽에 어머님이 보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의 출현으로 당황하시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이 마주치자 어머니 막걸리 주세요.’를 외친다.

 

개도 들녘
개도주조장

 

감로수가 따로 없다.

몇 병 줄까요?’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3병 주세요라고 말한다. 밤도 길고 하니 혼자서 3병 정도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3병에 5,000이라고 말하면서 냉장고에서 꺼내주신다. 막걸리를 맛보라고 따라주신 한 대접이 산행 후라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파김치 한쪽도 손으로 집어 먹는다. 그 후 차가운 물 한 대접을 더 얻어 마시니 얼굴에 화색까지 돈다.

갈 길이 구만리다.

텐트가 있는 청석포해수욕장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한다. 개도 생막걸리가 든 에코백을 들고 부리나케 길을 걷는다. 신흥마을 입구에 공공화장실이 있다. 세수하고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구석구석 닦는다. 땀의 끈적거림이 사라지니 기분이 좋아진다. 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하루다. 다시 텐트에 돌아온 시각이 오후 6시다.

 

개도생막걸리
개도의 오후
청석포해수욕장

 

석양이 질 무렵.

간단히 저녁을 먹는 동안 막걸리를 반주로 마셨다. 흰 구름은 그대로인데 배경이 빠르게 먹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다도해 어느 곳보다 이곳은 황량하다. 남쪽을 향해 V자로 펼쳐진 암반을 광막한 바다 위로 신비롭게 드러내고 있다. 그 암반에 서 있는 나는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친다. 무섭게 다가오는 어둠의 공포를 침착하게 맞을 준비를 한다.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인다.

이곳은 자연이 만든 천혜의 온돌이다. 텐트는 후텁지근함을 넘어 후끈후끈하다. 낮의 햇빛을 가득 머금은 암반은 그 열기를 밤이 되어 그대로 내뿜는다. 온돌침대의 효과가 너무 좋아 텐트에 머무를 수 없다. 밖은 바람이 불어 시원한데도 모기는 나에게 끊임없이 덤벼든다. 진퇴양난을 어찌할꼬?

 

 

후드득, 후드득.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빗소리에 눈이 떠진다. 갑작스레 굵은 빗방울이 텐트에 성기게 떨어지고 있다. 어느새 해풍도 요란하게 불고 바다는 거칠게 포효하며 성을 내고 있다. 해풍의 장난에 밀려오는 파도는 갯바위와 부딪혀 하얀 거품을 연신 토해내고 있다. 밤이 깊어지고 비까지 내리니 암반의 열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계속 내릴 것 같은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그친다.

비 온 뒤 하늘이 더 깨끗하다.

보름달은 며칠 사이 그믐달로 기울고 있다. 달이 변하지 않는 것은 바다를 비추는 은빛뿐이다. 달빛을 받은 바다는 은빛 물결을 출렁이며 내 영혼을 설레게 만든다.

 

개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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