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석양이 질 무렵, 차는 고속도로를 달려 남쪽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은 한층 더 짙은 먹색이 되었다.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은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2시간이 지났을 때 공기에서 생선 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통영에 왔다.

월요일 오전 651, 첫배를 타고 두미도에 가야 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두 번째 방문이다. 통영여객터미널 인근에 숙소를 정했다. 밤늦은 시간이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불 켜진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었다. 낼 아침 또한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원조설렁탕, 수육 - 통영맛집

 

월요일 새벽 5.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나는 일어났다. 간단히 세안하고 짐을 꾸려 숙소를 나왔다. 이른 새벽이지만 서호시장은 활기찼다. 불 켜진 식당에서 복국을 먹었다. 어두웠던 새벽은 어느새 사라지고 해가 떠올랐다. 새롭게 단장한 통영항여객터미널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바다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배를 타면 비로소 바다가 보이는데 출발한 항구는 보이지 않았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본 사람은 바다는 넓고 육지는 좁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육지가 좁아서 바다로 나아가면 바다는 더 넓어지고 거기서 또 작은 섬을 만나게 된다.

 

부일식당, 복국 - 통영 서호시장 맛집
통영 바다
바다누리호에서 바라본 두미도

 

두미도는 살아 숨 쉬는 섬이다.

바다는 다정하게 섬을 껴안아 주고 있었다. 섬은 봄비와 봄볕에 숲이 부풀고 땅에 생명의 기운이 돌았다. 나무는 꽃을 통해 대기의 수분을 흡수했고, 초록의 잎을 통해 봄볕을 간직했다. 하늘도 아기 돌보듯 섬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미도 북구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두미도 바다 펜션(민박)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건물 앞 조형물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1월에 다녀가고 3개월도 안 지났다. 만남이란 언제나 반가운 것이다. 짐을 놓아두고 두미도 옛길을 걸었다.

 

두미도의 봄
두미도 바다펜션 - 북구항

 

두미도 옛길은 발칵 뒤집혔다.

봄날의 두미도 옛길은 깊은숨을 쉬었고 더욱 견고해졌다. 봄비가 내려 풀과 야생화가 뒤섞여 자랐고 흙이 부풀기 시작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길 위에 그림자도 흔들렸다. 나무가 나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벚꽃길에 들어섰다.

벚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려서 연분홍빛 벚꽃잎이 길 위에 떨어졌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에서 빛이 들어와 땅에 닿았다. 떨어진 벚꽃잎은 빛을 받아 반짝이며 뒤섞였다. 육지는 벚꽃이 만개했는데 두미도는 벌써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두미도 옛길
홀아비꽃대

 

둥글레
남산제비꽃
꽃깔제비꽃
고은마을 벚꽃길 - 두미도 옛길

 

나는 천황산을 다시 찾았다.

숲의 나무 색깔이 바뀌었다. 만개한 진달래꽃, 벚꽃이 봄볕을 받아 그 색깔이 숲으로 퍼져나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숲의 색깔이 파도쳤다. 섬을 찾는 사람들과 섬사람들은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두미도 옛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숲속은 더 짙은 녹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숲의 색깔은 나무 우듬지 위를 굽이쳐 파도를 일으키듯 바다로 흘러갔다. 산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졌다.

 

천황산 등산로 조망점
진달래

 

산에서 바다를 바라봤다.

드넓은 바다가 보이는 순간 나는 돌출된 바위에 두 다리로 섰다. 두 다리가 바위에 닿았을 때 닿는 느낌으로 바위가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남구항 선착장 공사는 마무리단계에 들어섰고 어선이 흰 거품 자국을 남기며 바다를 스쳐 갔다. 욕지도가 보이는 바다는 아득하니 멀었다.

계절이 바뀌었다.

핏빛처럼 붉게 핀 진달래는 바람에 흔들거렸다. 산은 각양각색의 색깔로 물들었고 새 생명이 움트는 나무에선 아기 젖내 같은 냄새가 났다. 바닷바람이 땀으로 젖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등산을 시작한 지 40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두미도 남구항
청석마을과 동뫼섬
천황산 숲속
천황봉

 

안 가본 길을 갔다.

나는 투구봉 등산로는 가본 적이 없었다. 천왕산 정상에서 암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바다가 하늘처럼 보이는 북구항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큰 바위와 그 바위에 붙어있는 바위솔, 숲을 뒤덮고 있는 현호색 군락지는 내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등산로는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등산로라고 생각했다. 등산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도 멀었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있었지만 걷고 또 걸어 임도에 도착했다.

 

현호색
투구봉
북구항
임도

 

섬의 밤은 고요했다.

낮의 선착장 공사 소음은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자리돔 회, 돼지고기 볶음, 데친 나물들(두릅, 방풍나물, 꾸지뽕잎), 달래, 돌나물 등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특별히 할 것도 할 일도 없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섬은 밤은 생각보다 길었다.

새벽부터 안개가 짙었다.

바닷가에 안개가 끼면 바다는 무언가에 놀란 듯 창백해져 수면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았다. 바다의 표면을 타고 배가 왔는데 바다의 배는 보이지 않고 뱃고동 소리만 들렸다. 안개 속에 배 엔진 소리만 가득했다. 바다엔 안개뿐이었다. 안개 때문에 배는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배에 탔다. 배 위에서 안개를 마시고 바람을 마셨다. 배는 천천히 두미도를 떠났다.

 

저녁식사
안개
안개낀 북구항에 접안중인 바다누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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