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제주 여름 여행4 - 책방무사(한아름상회)



3일간 숙박해던 더 루케테 호텔을 벗어났다.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내 자신이

마치 자유를 찾아 나선 빠삐용처럼 느껴진다.



서귀포 동문로터리



지금 제주는 한라산이 있는 중산간을 제외하고는

바람도 불지 않고 대체적으로 하늘이 맑아지고 있는 중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니 더 후텁지근하다.


얼음을 잔뜩 넣은 커피가 먹고 싶다.

내 기분 탓이지만 냉커피가 정말 맛이 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다.

그녀가 있는 그 곳으로... 출발!!!



광치기해변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 사진을 클릭하시면 동영상을 보실 수 있다.



동문로터리에서 제주행 외곽순환 버스를 타고 성산에 왔다.

성산은 태풍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화창하다.


야.... 정말 날씨 좋다~~

광치기 해변에서 한갓지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문성식 - 뚜벅이가 꿈꾸는 세상, 국내-해외 자유 여행가, 미니멀리스트, 블랙야크 셰르파(2013년~현재), 산림경영ᆞ공학기술자, (주)하늘그린



나는 혼자다.

태어나서 지금껏 결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주 가끔씩 혼인정보업체에 보낼 광고문을 상상해 본다.


사춘기 청소년 만 45세, 솔로, 여행을 좋아함,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음, 여름에는 반바지와 슬리퍼를 신고 다님


이런 남자를 좋아할 여자가 있을까??



수산초등학교 앞 한아름상회(현 책방무사)



일부러 수산초등학교까지 걸어왔는데

한아름상회(현 책방무사)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내가 너무 일찍 도착한 것이다.

마을 쉼터인 정자에 앉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을 읽고 있었다.



책방무사 간판



오늘 책방무사의 첫번째 손님은

나야 나~~~~~ 




책방무사



얼마나 지났을까?

미니쿠퍼 차량이 멈추고 익숙한 얼굴의 그녀가 보인다.


이번이 두번째 만남이다.


30분 정도 책을 더 읽다가 한아름상회로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속에 그녀만의 향기가 숨어 있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좁은 공간이지만

적절하게 배치된 책들을 살펴보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녀 특유의 손길을 나는 느낄 수 있다.



책방무사에서 바라본 수산리 마을



이 공간에 지금 내가 서 있으니

3년전 처음 대면했을때의 그녀 모습이 떠오른다.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 웃음띤 하얀 얼굴이 이쁜 그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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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신수진)라는 사람을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족끼리 왜 이래'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OST가 너무나 좋았었다.

그래서 누가 이다지도 편안하게 노래를 부르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바로 요조였던 것이다.


그 이후 트위터의 팔로우를 신청했었고

작년 9월 그녀가 책방을 연다는 사실을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이름이 '책방무사'다.





얼마 후

서울에 올라갔을때 '책방무사'에 가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대중들은 요조가 책방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시기였다.


오픈한지 얼마되지 않은 '책방무사'

여러가지 꾸미느라 분주했었고, 난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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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을 집어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번이 두번째 만남인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예전보다는 갸냘프게 보이는 그녀 모습은 여전히 보조개가 이쁜 얼굴이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4일차 여정]

더 루케테 호텔-광치기해변-책방무사(한아름상회)-예하게스트하우스

[제주여행]소심한 책방



제주도 동쪽끝마을 종달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동네서점 소심한 책방을 드디어 방문했습니다.


2014년 4월에 소심한 책방이 생겼습니다.

전 트위터를 통해서 소심한 책방을 알게되었습니다.






소심한 책방에는 사실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주차는 꼭 소심한 책방을 약 50미터 지나처 오른쪽 골목에 위치한

수상한 소금밭 게스트하우스 주차장을 이용하면 됩니다.







어둠이 살짝 내려앉을 무렵에

달이 서서히 차오르기를 기다린 사람처럼 소심한 책방을 찾았습니다.


소심한 책방은 집에서 약 300m를 걸어 책방으로 출근하는 제주여자와

집에서 약 450km를 비행기로 출근하는 서울여자가 함께 운영하는 작고, 소심한 동네 책방입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소심한 책방의 샷시문을 열었습니다.


좁은 공간이지만

소심한 책방 서가에 꽃힌 책들을 보니 책의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다양한 책들속의 활자들이 주는 설레임과

서로 다른 질감의 종이가 주는 촉감은 소심한 책방의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손으로 만져지는 책의 질감을 느끼고

책속의 활자에서 잉크의 냄새를 맡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잔잔한 선율의 음악을 들으면서

좁은공간의 한쪽 벽면에서 조그만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하루에 하루를 더하고

그 하루에 또 하루를 더하고

.

.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하루가 모여 1년 365일 된

2017년 일력과 내가 좋아하는 각양각색의 엽서들이 나의 눈을 밝게 만들었습니다.






좁은 소심한 책방의 전체 분위기는

하얀 석유난로가 열을 발산하듯 밝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차를 주차하고 먼길을 걸어왔다면

제주의 바닷바람과 종달리 마을의 향기를 제대로 느꼈을 겁니다.

이곳에서 커피한잔 하면서 그 느낌과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시면 됩니다.





한쪽 구석방에 조용히 앉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있는 소심한 책방 주인장도 만났습니다.


그 누구보다 동네서점에 대한

그녀들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잘 알기에 잠시 바라만 보아도 좋았습니다.





어떤 날 7

책을 사면서 잠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연필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소심한 책방은

겨울철인 12월부터는 매일 오전 10시 ~ 오후 6시까지 운영됩니다.

공식적인 쉬는 날은 없지만 바람나는 날에 때때로 쉬는 날은 따로 공지를 하고 있습니다.


제주를 방문할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소심한 책방의 샷시문을 열어보는 건 어떨까요??

최초의 8,000m 안나푸르나

 

 

지구상에서 해발 8,000 미터가 넘는 산은 모두 14개라고 한다.
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고산들을 일컬어 14좌라고 부른다.

14좌 외에도 해발 8,000 미터가 넘지만 주봉과 산줄기가 같다고 해서 14좌에서는 제외된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를 더해 16좌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지난 1월 18일 월요일 무료한(??) 점심시간에 대전의 메가박스를 찾았다.

2016년 들어 처음으로 영화관을 찾은 것으로 황정민 주연의 '히말라야'를 보기 위해서였다.

 

남들이 한창 일할때 딴짓(??)하는 나의 취미는 영화보는 재미를 더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위대한 도전

황정민(엄홍길 대장 역)과 휴먼원정대의 감동 실화를 영화 '히말라야'로 만든 것이다.

 

MBC에서 방영된 엄홍길 대장이 이끈 휴먼원정대 스토리를 다큐멘터리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두 눈에서 눈물이 마르질 않았는데 '히말라야'라는 영화를 보는 동안 눈물이 계속 흘러 내렸다.

 

 

 

 

'히말라야'라는 영화를 본 후

내가 잊고 있었던 한가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현장독서이다.

현장독서는 여행지에 관련된 책을 가지고 가서 그 곳에서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2015년 10월 23일 ~10월 31일까지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ABC) 트래킹을 준비하면서

현장독서를 위해 '최초의 8,000m 안나푸르나' 책을 구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다.

 

책이 있는 곳을 알았을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뒤였다.

 

아쉽게도 출발당일까지 책을 받지 못하여

'반고흐, 영혼의 편지'를 대신 가져 갔었고,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ABC) 트래킹 일정동안 읽게 된것이다.

 

 

 

 

중고서적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책이 절판되어 판매를 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최초의 8,000m 안나푸르나'를 구할 방법이 생겼던 것이다.

 

짧지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요조(신수진)라는 사람을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족끼리 왜 이래'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OST가 너무나 좋았었다.

그래서 누가 이다지도 편안하게 노래를 부르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바로 요조였던 것이다.

 

 

 

 

그 이후 트위터의 팔로우를 신청했었고

작년 9월 그녀가 책방을 연다는 사실을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이름이 '책방무사'다.

 

 

 

 

얼마 후

서울에 올라갔을때 '책방무사'에 가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대중들은 요조가 책방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시기였다.

 

오픈한지 얼마되지 않은 '책방무사'

여러가지 꾸미느라 분주했었고, 난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날 '책방무사'내가 처음으로 책방에 들어선 사람이었다.

아직까지 책 종류는 다양하지 않아서 내가 원하는 책은 없었다.

 

요조

기타

등등

 

그래서 요조의 책을 구매했다.

카드단말기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현금을 내고 요조에게 직접 잔돈을 받았다.

 

그리고 요조가 직접 타 준 매실차를 받아들고 '책방무사'를 나왔다.

이것이 요조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최초의 8,000m 안나푸르나' 책을 찿던 나는

책 찾기를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요조의 '책방무사' 트위터 계정으로 위와 같은 글을 남겼다.

 

 

 

얼마지나지 않아 요조가 내 트위터에 답글을 남겼다.

 

그 후 주고 받은 짧은 트위터 글을 통해서

'최초의 8,000m 안나푸르나' 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래킹을 떠나기 전까지

책을 받아 보지는 못했지만 요조에게 이 기회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14개 아니 16개의 8000미터 이상의 고봉들은

이미 1950년 6월 30일 안나푸르나를 시작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이르러 모두 등정을 마쳤다.

 

 

 

 

여성산악인 오은선 대장이

13개좌의 등반을 마치고 안나푸르나만을 마지막에 등정하여

여성으로는 세계최초의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오은선대장과 함께

나는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ABC) 트래킹을 함께 다녀왔다.


사진만 찍고

발자국만 남기고

시간만 죽이고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ABC) 트래킹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2015년 10월 31일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공항 리무진버스를 타고 대전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방에 들어서자 간이 책상위에 놓여진 소포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현장독서가 아니라 현장방문 후 독서를 해야 한다.

 

가슴이 설렌다.

 

 

 

 

모리스 에르족이 쓴 이 책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

인류가 최초로 8000미터 이상의 고봉 등정에 성공한 1950년도의 등정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1951년 프랑스에서 초판이 발간된 이후 현재까지 무려 15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간 수퍼 베스트셀러다.


등반에서는 싸우는 상대도 없고 심판도 없다.

단지 나 자신과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경기가 아니다.

정도전의 북악산 한양도성 탐방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천도 계획을 명하고,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鄭道傳)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한양도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양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차(약 18.2km)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 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한양도성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여 세종 4년(1422) 12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안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한양도성의 골격이다.

 

  이후 한양도성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한양도성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2015년 10월 중순... 마음이 설레일정도로 화창한 가을날 아침이었다.

북악산 한양도성에 대한 아무런 준비와 정보도 없이 북악산 한양도성을 걷기 위해 창의문안내소를 찾았다.

 

15년전 나의 주 활동무대였던 경복궁역 3번출구를 나와

초록색의 지선버스(1020번, 7022번, 7212번)를 타고 자하문고개에서 하차를 하였다.

 

자하문고개에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등 31명의 침투를

몸을 던져 저지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표석이 마련되어 드높은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었다.

 

 

 

 

'여행은 틈은 만나러 가는 거야'

 

여행때마다 내가 늘 좋아하는 문구인데... 오늘도 틈을 만나게 되었다.

개방시간이 오전 9시부터인데... 난 30분이나 일찍 도착을 한 것이다.

 

 

 

 

철조망이 쳐진 굳게 닫힌문을 압박이라도 하듯이

가방을 그 앞에 내려놓고 천천히 창의문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하였다. 

 

 

 

 

  한양도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四大門), 그 사이에 4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 단장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신청서 작성 - 신분증확인 및 실명인증 - 신청서접수 - 표찰착용 - 탐방 - 도착사무소 표찰반납

 

자율탐방으로 방식이 전환된 2007년 7월 1일부터 출입절차가 간소화되어

인터넷 사전예약없이 신분증을 지참하신 후, 현지에서 신청서만 작성하여 확인절차만 거치면 탐방이 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내가 받은 표찰번호는 1751번이었고

북악산 한양도성 창의문안내소의 오늘 첫 방문자이었다.

 

 

 

 

 

1751번 표찰을 목에 걸고 발걸음을 북악마루로 향했다.

창의문안내소에서 백악마루까지는 끊임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오르막길이다.

 

 

 

 

 

한양도성은 축조 당시의 모습과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왼쪽부터... 향로봉, 비봉, 사포바위, 승가봉, 문수봉, 보현봉, 칼바위능선, 형제봉 등

 

 

 

 

창의문안내소에서 백악마루를 올라가는 한양도성은 북한산 봉우리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평일이라 아무도 다니지 않는 한적한 북악산 한양도성은 마치 내 소유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름답게 펼쳐진 북한산 봉우리를 감상하면서

급경사지의 한양도성을 올라가면 백악산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이 곳은 북한군의 공중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해 1979년 10월 15일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이며 2000년 9월 9일 보다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서 다른곳으로 이전하였다.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일명 백악, 면악산, 공극산 이라고 불렀다. 높이는 342미터로 내사산(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중에서 가장 높다. 이곳을 백악 마루라고 부르는데 '마루'는 정상꼭대기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白岳山 342m' 라는 정상 표지석이 있는데 표지석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북악산이 통제되던 시기에는 대공포 진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처음의 모습으로 복원해 두었다.

 

 

 

 

백악산에서 한양도성을 내려가다보면 1.21사태 소나무를 발견하게 되었다.

소나무의 위치가 좁은 탐방로 바로 옆에 있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주위를 기울여야 볼 수 있었다.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외 30명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한으로 침투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창의문부근에서 검-경 합동 검문에 발각이 되어 대부분이 사살되었고 김신조는 생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최규식 경무관( 당시 종로 경찰서장)과 정종수 경사가 순직하였고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을 당하였다. 1960년대 남북관계는 매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며 우리의 안보의식이 다시한번 재점검되는 사건으로 남게 돠었다. 북악산 한양도성 전면 개방에 맞춰 베일에 쌓여 있던 1.21사태 소나무는 드디어 2007년 전명 개방에 따라 민간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또한 2010년 9월말 KBS 1박2일에 방영되면서 탐방로 구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한양도성의 성벽 돌 중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돌들이 있었다.

 

이 글자는 대개 성벽 축조 당시 천자문 글자에서 따온

공사 구역 표시, 공사 담당 군현 그리고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등이다.

 

 

 

 

어느덧 발걸음이 청운대에 다다랐다.

잠시 청운대에 서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의 천도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청운대는 북악산의 전면 개방을 기념하는 뜻에서 서울의 진산(鎭山)의 북쪽 최정상인 백운대(836m)를 본떠 청운대(293m)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이곳은 북악산에서 경복궁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궁궐의 구성을 위에서 살펴보기란 쉽지 않은데 마치 경복궁의 조감도를 보는 듯 하다. 광화문 대로를 지나 시청까지 도심의 풍경도 비교적 또렷하며 누구든지 청운대에서서 경복궁을 바라보게 되면 푸른 꿈을 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곡장曲墻 또는 치성雉城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로 도성 중 일부를 자연지세에 맞추어 돌출시킨 것을 치 또는 곡성이라고 부른다.

치雉는 생김새가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었다고 해서 붙인 것이며,각이 진 것을 치성이라고 하고 반원형으로 굽은 것을 곡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북촌마을과 남촌마을을 비교해 보면서

풍수학이 현재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되짚어 보면서 한양도성을 걸었다.

 

성벽을 이루는 다양한 돌들에 눈에 들어왔다. 태조, 세종, 숙종때의 성벽이 지금의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었다.

태조때는 큰 메주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고, 세종때는 장방형 돌을 기본으로 하여 사이사이에 잔돌을 섞어 쌓았으며,

숙종때에는 2자*2자의 석재를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튼튼하게 쌓았다. 이는 장정 4명이 들 수 있는 무게에 해당한다.

 

 

 

 

북악산 한양도성의 시간, 공간의 역사적 흐름을 느껴기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당도한 곳이 숙정문이었다.

 

 

 

 

 

 한양도성 사대문(四大門) 중의 하나. 본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한양도성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한양도성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한양도성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게 되었다.

 

 

 

 

 

숙정문을 지나 이내 말바위안내소에 도착을 했다.

1751번 표찰을 반납하고 화장실을 다녀온 후 와룡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바위 안내소를 지나 전망대에서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확 트인 전망대에서 마음의 휴식을 얻고 고요한 도성을 걷노라니 기분이 한층 맑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북악산 한양도성은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침묵은 내 안에 죽어 있었다고 생각했던 감각을 예리하게 뒤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요즘 한참 재미있는 SBS 월하드라마 '육룡의 나르샤' 때문인지는 몰라도

북악산 한양도성이 나에게 새롭게 느껴지지 시작했다. 또한 정도전의 민본정치도....

 

 

 

 

와룡공원을 벗어나 천천히 북촌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조의 '책방무사'에 들리기로, 전날 저녁에 twitter에서 요조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되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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