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백패킹]울릉도 육로 여행 - 지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비밀의 섬

 

 

울릉도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때 묻지 않은 자연이다.

섬 전체가 깍아지른 해안절벽과 가파르고 험준한 산자락으로 이우러졌다. 젊고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같은 화산섬인 제주도의 지세가 부드럽고 수평적인 반면, 울릉도는 거칠고 수직적이다.

 

 

 

 

육로 일주, 성인봉 등반, 해상 일주, 독도 탐방

울릉도를 여행하는 네 가지 방법이며, 이중에서 오늘은 육로 일주에 대해 스토리를 쓰려고 한다.

 

육로 일주는 보통 저동도동사동통구미남양구암(학포)태하현포

(추산)천부(죽암,선창)섬목 그리고 내수전-석포 옛길, 행남산책로로 진행된다.

 

 

1. 저동항

 

 

 

 

저동은 태하, 도동과 함께 울릉도 개척 당시부터 형성돼 있던 마을이다.

마을 주변에 모시밭이 많아서 모시개라고 불렸다가, 일제강점기에 한자 지명으로 표기할 때 모시 ’()를 써서 저동(苧洞)이 되었다.

 

 

 

 

 

 

저동항의 어선이 촘촘히 늘어선 항구의 정경이 매우 인상적이다.

 

 

 

 

 

 

저동항은 봄과 가을에 촛대바위 위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울릉도의 일출을 대표할 만큼 장엄하고 화려하다.

 

 

 

 

 

 

봉래폭포로 가는 길에는 천연 에어컨으로 불리는 풍혈이 눈길을 끈다.

여름에는 바위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곳이다. 아무리 무더운 삼복염천에도 섭씨 4도를 유지한다.

겨울에는 이 풍혈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데 바람의 세기로 날씨 변화를 미리 알 수 있다고 한다.

 

 

 

 

 

봉래폭포는 울릉읍 주민들의 생명수이다.

높이 25m3단 폭포인데, 비슴듬한 벼랑을 타고 쏟아지는 물줄기가 단정하고도 우아하다.

화산섬 폭포수답게 무미, 무취, 무색의 완벽한 천연수이다.

 

 

 

 

 

 

내수전망대는 해발 440m에 설치된 전망대로

오름길에 수많은 동백나무와 마가목 등이 터널을 이루고 있고 정상까지 편도 15분 정도가 소요된다.

 

 

 

 

 

 

특히 오징어 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추석 이후부터

동해 밤바다를 화려하게 수놓는 어화는 울릉8경에도 속하는 최고의 밤 풍경 중 하나이다.

 

저동은 봉래폭포, 내수전망대 이외에는 눈길을 끌 만한 절경이나 명소가 별로 없다.

 

 

2. 도동항

 

 

 

 

 

 

 

 

망향봉과 행남봉 사이의 좁은 골짜기를 따라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포항과 묵호에서 출발한 관광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곳인 도동항은 늘 비좁고 번잡한 곳이라는 뜻의 '도방청'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독도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영토박물관이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인들의 망언을 역사적, 논리적으로 반박해주는 서지학자 고 이종학 선생이 남긴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독도전망대는 망향봉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푸른 바다와 도동항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도동약수공원의 안용복장군충혼비가 있다.

조선 숙종 때에 살았던 안용복은 평민 신분인데도 일본에 두 차례나 건너가

에도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임을 확약한다라는 국서를 받아낸 인물이다.

 

그런데도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나라의 허락없이 국제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그를 서울로 압송해 사형에 처할 것을 논의 했다.

결국 영의정 남구만의 만류로 사형은 면한 대신 유배형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참으로 억울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한 민족영웅이다.

 

3. 사동

 

 

 

 

무릉교, 울릉대교(현 울릉터널)를 지나

도사동천 내리막길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사동 흑비둘기 서식지300년 이상의 후박나무 고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사동리 해안도로는 일주도로 가운데 가장 넓고도 시원스러운 구간이다.

사동리 해안 끝에는 가두봉이 돌출돼 있는데 산사태와 낙석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두봉 터널을 지나면 가동봉 등대를 볼 수 있다.

 

 

통구미라는 지명은 골짝기가 구유(또는 통)처럼 좁다고 해서 붙었다고 한다.

통구미 해안에는 거북바위가 솟아 있다.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뭍으로 기어오르는 듯한 형상이다.

통구미 향나무 자생지는 용트림하듯 몸통이 뒤틀린 향나무 고목들이 여기저기 뿌리를 내린 모습이다.

 

 

4. 통구미

 

 

통구미라는 지명은 골짝기가 구유(또는 통)처럼 좁다고 해서 붙었다고 한다.

통구미 해안에는 거북바위가 솟아 있다.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뭍으로 기어오르는 듯한 형상이다.

통구미 향나무 자생지는 용트림하듯 몸통이 뒤틀린 향나무 고목들이 여기저기 뿌리를 내린 모습이다.

 

 

 

통구미터널 입구에는 신호등이 설치돼 있다.

오가는 차량이 서로 비껴갈 수 없을 만큼 터널이 비좁은 탓이다. 통구미터널을 지나면 남통터널과 남양터널이 잇달아 나타난다.

반대쪽 남양터널 입구에도 신호등이 있는데, 진행 신호를 받으면 두 개 터널을 한번에 통과해야 한다.

 

 

5. 남양

 

 

 

 

남양의 원래 이름은 골계이다. 골짜기의 자와 시내 자가 합쳐진 지명이다.

실제로 마을 주변에는 골짜기와 시내가 많고 마을의 중심지도 남양천과 남서천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게다가 혓볕이 잘 들고 날씨가 따뜻해서 울릉도에서 가장 먼저 눈이 녹는다고 한다.

지금의 행정 지명인 남양리라는 지명도 햇볕이 가장 잘 드는 남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일주도로가 통과하는 남서터널 부근의 사자바위와 투구봉에는 옛 우산국의 전설도 전해온다.

 

   신라 지증왕 13(1512) 하슬라(지금의 강릉 지역)의 군주 이사부는 왕명을 받아 우산국 정벌에 나섰다. 신라군이 배를 타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우산국의 우해왕은 천혜의 요새인 골계 해안에 방책을 쌓고 신라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마침내 이사부 장군이 이끄는 신라의 군선이 골계 앞바다에 나타났다. 첫번째 싸움은 수전이었다. 육전에만 능한 신라군은 바다를 끼고 사는 우산국의 수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1차전은 당연히 신라군의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이사부는 다시 치밀한 작전을 세운 다음 우산국 정벌에 나섰다. 이번에는 입에서 불을 뿜는 거대한 나무 사자를 뱃머리에 앞세웠다. 그러자 사자는커녕 뱀이나 토끼조차 본 적이 없는 우산국 병사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나버렸다. 끝내 홀로 남은 우해왕은 투구를 벗어 항복한 뒤 바다에 몸을 던졌다. 당시 신라군이 앞세운 나무 사자는 사자바위가 되었고, 우해왕이 벗어 던진 투구는 투구봉으로 변했다고 한다.

 

 

 6. 태하

 

 

 

 

 

남양리에서 태하리로 가려면

구암터널, 사태감터널, 구암마을(국민여가캠핑장)을 지나고 수층교, 수층터널, 삼막터널, 태하터널을 지나야 한다.

 

 

 

 

태하 버스정류장 옆에 성하신당이 위치한다.

 

  성하신당(聖霞神堂)은 조선 태종 17(1417), 조정에서는 삼척만호 김인우를 안무사로 임명해 울릉도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도록 명했다. 수토 정책이 실행된 것이다. 명을 받은 안무사는 배 두 척을 몰고 태하동에 상륙했다. 주민들을 모두 배에 태우고 뭍으로 떠나기 전날 밤, 그의 꿈에 해신이 현몽해 동남동녀 한쌍을 섬에 남겨두고 떠나라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안무사는 이튼날 배를 출항시켰다. 그러자 잔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사납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도리 없이 배를 되돌린 안무사는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간밤의 꿈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꿈에서 만난 해신의 명대로 곱게 생긴 소년과 소녀를 골라 내 처소에 두공 온 필묵을 찾아오라고 시켰다. 아이들이 심부름을 간 사이 안무사는 곧바로 닻을 올려 출항했다. 내내 거칠게 일렁거리던 바다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주민들을 데리고 육지로 무사히 돌아온 안무사는 섬에 두고 온 아이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로부터 8년 뒤 수토관으로서 울릉도를 다시 찾은 그가 태하동에 가보니 서로 꼭 껴안은 채 백골이 된 두 아이의 주검이 남아 있었다. 안무사 김인우는 아이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그 곳에 사당을 지었다. 그것이 바로 성하신당이다.

 

 

 

 

 

태하황토굴은 낙석 발생 위험구간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황토굴은 거대한 상어 아가리처럼 생겼다. 굴의 일부는 주황색에 가까운 황토로 뒤덮여 잇다. 육지의 황토와 달리 부드러운 흙이 아니라 단단한 돌에 가깝다. 생산량이 미미해서 담을 쌓거나 집 짓는 재료로 쓰기는 어렵다. 태하의 옛 이름인 황토구미도 여기서 유래했다. 황토굴의 황토는 조선 시대에 아주 특별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 조정은 울릉도 개척령(1882)이 내려지기 전까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수토 정책을 유지했다. 수토 정책이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짐에 따라 울릉도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킨 뒤 주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해 순찰하게 한 것을 말한다. 흔히 쓰이는 공도 정책이라는 표현은 일본인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울릉도와 가까운 육지에 근무하는 삼척영장을 수토관으로 임명해 주기적으로 울릉도를 순찰하게 했다. 임무를 마치고 뭍으로 돌아온 수토관은 이곳의 황토와 울릉도 향나무를 증거물로 제출했다고 한다.

 

 

 

 

 

총연장 304m의 레일과 39도에 이르는 가파른 경사로를

20인승 전기차 2대가 동시에 운행하며 분당 50m의 속도로 약 6분 정도 소요된다.

 

 

 

 

 

 

모노레일 정상에서 태하등대까지 이어지는 대풍감 산책로를 걸어가노라면

동백나무락의 맑은 자연속에서 심신의 스트레스를 더 내려놓게 되고 자연의 기운으로 충전된다.

 

바람을 기다리는 언덕이라는 뜻의 대풍감은 돛단배가 항해를 위해 바람을 기다리는 곳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해안절벽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대풍감 향나무 자생지가 위치하고 있다. 거친 바람의 영향을 받아 이 일대의 향나무는 키가 크게 자라지 못한다.

 

 

7. 현포

 

 

 

 

 

태하와 현포를 잇는 현포령은 구절양장의 고갯길이다.

태하 방면의 남쪽 고갯길은 S자 모양의 급커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현포리는 거문작지라고도 불린다.

개척 당시 배를 타고 온 개척민들 눈에 대풍감에서 노인봉까지 약 시오리 정도의 해안선이 까마득해 보여서 그런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천지개벽시 옥황상제가 울릉도 주민을 구원하기 위해

산 정부에 깊이가 밝혀지지 않은 큰 구멍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가진 송곳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짐승이 없는 울릉도에 그것도 바다 한 가운데

대형 코끼리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광경이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주상절리 바위 앞쪽에 생긴 큰 자연굴이 마치 코끼리가 코를 바닷속에 담그고 물을 마시는 형상을 하고 있다.

 

 

8. 천부

 

 

 

 

옛날부터 선창이 들어서 있던 곳이어서 옛선창으로도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울릉도에 몰래 들어온 왜놈들이 벌목해서 배를 만들거나 고기잡이를 하던 곳이라 해서 왜선창이라고도 불렸다.

 

원래의 천부마을은 이곳이 아니라 본천부마을이다.

움푹한 분지에 자리잡은 본천부마을은 울릉도에 개척령이 내려진 직후 옛선창을 찾은 두 양반 노인이 식속들을 이끌고 처음 들어와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당시 울창했던 나무들을 베어내고 천막을 친 뒤 사방을 둘러보니 하늘만 동그랗게 보여 천부’(天府)라고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천부항에서 섬목방향으로 약 100m 지점에 설치된 해중전망대는 바닷속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전망대는 천부마을 해안과 전망대를 잇는 다리(107m)와 수심 6m에 있는 해중전망실, 수상 6m 높이의 해상전망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9. 섬목

 

 

 

 

삼선암은 아득한 옛날, 이곳 경치에 반한 세 선녀가 목욕을 하다가

하늘로 올라갈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서 이곳의 세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거의 붙어 잇는 듯한 두 개는부부바위이고, 홀로 서 있는 바위는 일선암’(또는 가위바위)이라 불린다.

 

바위 굴 앞의 얕은 바다에는 환상적인 물빛을 자랑하는 선녀탕이 있다.

바다 쪽에 우뚝 솟은 갯바위 하나가 파도를 막아주는 덕택에 심산유곡의 작은 못처럼 아담하다.

얕은 수심, 에메랄드 빛 바다, 아담한 모양만 봐도 선녀탕이라는 이름이 썩 잘 어울린다.

 

 

 

 

 

 

2012년 보행연도교가 연결되면서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개방된 관음도는 원시림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보물섬이다.

 

  관음도는 울릉도 개척 당시 경주에서 건너온 어부 김씨가 관음도 부근의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태풍을 만나 이 섬으로 대피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떨던 어부가 밤에 불을 피웠더니 수많은 깍새가 날아들었다. 가까이 내려앉은 깍새를 몇 마리 잡아 구워 먹어보니 아주 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 뒤로 깍새는 명이(산마늘)와 함께 울릉도 개척민들의 목숨을 지켜준 먹을거리가 되었다.

   관음도 절벽 아래쪽에는 관음쌍굴이 있다. 높이 14m의 큰 굴 두 개가 나란히 뚫려 있는데, 일주도로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유람선을 이용해야 한다. 옛날에는 해적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해적들이 그 안에 배를 숨겨두었다가 다른 배가 지나가면 갑자기 나타나 약탈과 살윢을 일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관선터널은 섬목 산줄기 아래쪽에 뚫려 있다. 일주도로의 마지막 터널이다.

 

 

10. 내수전 - 석포 옛길

 

 

 

 

 

 

 

 

운치 좋고 아름답고 편안한 숲길이 줄곧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간다.

내수전이 시작되는 곳에서 1.3km 거리에는 정매화골이 있다.

 

현재 정매화골의 공사로 인해서 그 느낌이 다소 반감될 수는 있어도

‘정매화’라는 인정많은 주막집 여인이 살던 곳이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1962년부터 1981년까지 산 이효영씨 가족이 더 유명하다.

폭우나 폭설이 일었을 때 19년간 무려 300여명의 인명을 구조했다.

지금은 소담한 계곡이 어우러진 내수전둘레길의 쉼터이다. 인근의 큰 바위도 멋스럽다.

 

 

11. 행남산책로

 

 

 

 

 

 

울릉도 최고의 해안산책로이다.

도동등대(행남등대)를 가운데 두고 행남산책로와 저동해안산책로를 연결하면 환상적인 트레킹 코스가 완성된다.

바다와 마주한 기암절벽과 천연동굴은 절경을 실감케 한다.

그 틈새로 들고나는 물빛 또한 짙은 에메랄드 빛의 유혹이다.

 

 

 

 

 

 

 

 

도도등대(행남등대)에서는 저동항과 저동마을, 긴 방파제와 촛대바위 그리고 저동 앞바다의 북저바위와 죽도까지 보인다.

촛대바위는 고기잡이를 떠난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딸이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바위로 굳어버렸다는 전설이 서려 있어 녀바위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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