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북악산 한양도성 탐방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천도 계획을 명하고,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鄭道傳)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한양도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양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차(약 18.2km)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 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한양도성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여 세종 4년(1422) 12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안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한양도성의 골격이다.

 

  이후 한양도성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한양도성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2015년 10월 중순... 마음이 설레일정도로 화창한 가을날 아침이었다.

북악산 한양도성에 대한 아무런 준비와 정보도 없이 북악산 한양도성을 걷기 위해 창의문안내소를 찾았다.

 

15년전 나의 주 활동무대였던 경복궁역 3번출구를 나와

초록색의 지선버스(1020번, 7022번, 7212번)를 타고 자하문고개에서 하차를 하였다.

 

자하문고개에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등 31명의 침투를

몸을 던져 저지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표석이 마련되어 드높은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었다.

 

 

 

 

'여행은 틈은 만나러 가는 거야'

 

여행때마다 내가 늘 좋아하는 문구인데... 오늘도 틈을 만나게 되었다.

개방시간이 오전 9시부터인데... 난 30분이나 일찍 도착을 한 것이다.

 

 

 

 

철조망이 쳐진 굳게 닫힌문을 압박이라도 하듯이

가방을 그 앞에 내려놓고 천천히 창의문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하였다. 

 

 

 

 

  한양도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四大門), 그 사이에 4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 단장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신청서 작성 - 신분증확인 및 실명인증 - 신청서접수 - 표찰착용 - 탐방 - 도착사무소 표찰반납

 

자율탐방으로 방식이 전환된 2007년 7월 1일부터 출입절차가 간소화되어

인터넷 사전예약없이 신분증을 지참하신 후, 현지에서 신청서만 작성하여 확인절차만 거치면 탐방이 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내가 받은 표찰번호는 1751번이었고

북악산 한양도성 창의문안내소의 오늘 첫 방문자이었다.

 

 

 

 

 

1751번 표찰을 목에 걸고 발걸음을 북악마루로 향했다.

창의문안내소에서 백악마루까지는 끊임없이 이어진 한양도성의 오르막길이다.

 

 

 

 

 

한양도성은 축조 당시의 모습과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왼쪽부터... 향로봉, 비봉, 사포바위, 승가봉, 문수봉, 보현봉, 칼바위능선, 형제봉 등

 

 

 

 

창의문안내소에서 백악마루를 올라가는 한양도성은 북한산 봉우리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평일이라 아무도 다니지 않는 한적한 북악산 한양도성은 마치 내 소유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름답게 펼쳐진 북한산 봉우리를 감상하면서

급경사지의 한양도성을 올라가면 백악산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이 곳은 북한군의 공중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해 1979년 10월 15일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이며 2000년 9월 9일 보다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서 다른곳으로 이전하였다.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일명 백악, 면악산, 공극산 이라고 불렀다. 높이는 342미터로 내사산(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중에서 가장 높다. 이곳을 백악 마루라고 부르는데 '마루'는 정상꼭대기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白岳山 342m' 라는 정상 표지석이 있는데 표지석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북악산이 통제되던 시기에는 대공포 진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처음의 모습으로 복원해 두었다.

 

 

 

 

백악산에서 한양도성을 내려가다보면 1.21사태 소나무를 발견하게 되었다.

소나무의 위치가 좁은 탐방로 바로 옆에 있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주위를 기울여야 볼 수 있었다.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외 30명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한으로 침투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창의문부근에서 검-경 합동 검문에 발각이 되어 대부분이 사살되었고 김신조는 생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최규식 경무관( 당시 종로 경찰서장)과 정종수 경사가 순직하였고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을 당하였다. 1960년대 남북관계는 매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며 우리의 안보의식이 다시한번 재점검되는 사건으로 남게 돠었다. 북악산 한양도성 전면 개방에 맞춰 베일에 쌓여 있던 1.21사태 소나무는 드디어 2007년 전명 개방에 따라 민간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또한 2010년 9월말 KBS 1박2일에 방영되면서 탐방로 구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한양도성의 성벽 돌 중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돌들이 있었다.

 

이 글자는 대개 성벽 축조 당시 천자문 글자에서 따온

공사 구역 표시, 공사 담당 군현 그리고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등이다.

 

 

 

 

어느덧 발걸음이 청운대에 다다랐다.

잠시 청운대에 서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의 천도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청운대는 북악산의 전면 개방을 기념하는 뜻에서 서울의 진산(鎭山)의 북쪽 최정상인 백운대(836m)를 본떠 청운대(293m)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이곳은 북악산에서 경복궁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궁궐의 구성을 위에서 살펴보기란 쉽지 않은데 마치 경복궁의 조감도를 보는 듯 하다. 광화문 대로를 지나 시청까지 도심의 풍경도 비교적 또렷하며 누구든지 청운대에서서 경복궁을 바라보게 되면 푸른 꿈을 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곡장曲墻 또는 치성雉城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로 도성 중 일부를 자연지세에 맞추어 돌출시킨 것을 치 또는 곡성이라고 부른다.

치雉는 생김새가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었다고 해서 붙인 것이며,각이 진 것을 치성이라고 하고 반원형으로 굽은 것을 곡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북촌마을과 남촌마을을 비교해 보면서

풍수학이 현재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되짚어 보면서 한양도성을 걸었다.

 

성벽을 이루는 다양한 돌들에 눈에 들어왔다. 태조, 세종, 숙종때의 성벽이 지금의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었다.

태조때는 큰 메주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고, 세종때는 장방형 돌을 기본으로 하여 사이사이에 잔돌을 섞어 쌓았으며,

숙종때에는 2자*2자의 석재를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튼튼하게 쌓았다. 이는 장정 4명이 들 수 있는 무게에 해당한다.

 

 

 

 

북악산 한양도성의 시간, 공간의 역사적 흐름을 느껴기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당도한 곳이 숙정문이었다.

 

 

 

 

 

 한양도성 사대문(四大門) 중의 하나. 본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한양도성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한양도성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한양도성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게 되었다.

 

 

 

 

 

숙정문을 지나 이내 말바위안내소에 도착을 했다.

1751번 표찰을 반납하고 화장실을 다녀온 후 와룡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바위 안내소를 지나 전망대에서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확 트인 전망대에서 마음의 휴식을 얻고 고요한 도성을 걷노라니 기분이 한층 맑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북악산 한양도성은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침묵은 내 안에 죽어 있었다고 생각했던 감각을 예리하게 뒤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요즘 한참 재미있는 SBS 월하드라마 '육룡의 나르샤' 때문인지는 몰라도

북악산 한양도성이 나에게 새롭게 느껴지지 시작했다. 또한 정도전의 민본정치도....

 

 

 

 

와룡공원을 벗어나 천천히 북촌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조의 '책방무사'에 들리기로, 전날 저녁에 twitter에서 요조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되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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