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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백패킹 여행 - 3일차(2022.05.31) 본문

국내여행 · 맛집/울릉도

울릉도 백패킹 여행 - 3일차(2022.05.31)

배고픈한량 2022. 6. 23. 01:01

아침은 금방 찾아왔다.

새 소리와 파도 소리가 단잠이 든 나를 깨웠다. 대풍감 너머로 해가 떠오르기 전인데도 주위는 환하게 밝아 있었다. 울릉도에서는 낮을 평소보다 조금 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햇반에 짜장 소스를 데워 이른 아침을 먹었다. 오전 7시도 안 되었는데 아침 햇살은 강렬히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물을 끓였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머릿속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학포야영장을 뒤덮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길을 나섰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밭 모서리에 심어진 개복숭아나무의 초록색 열매, 도로에 검은 칠로 그림을 그린 듯한 검붉게 익은 뽕나무의 오디, 강렬한 붉은빛의 딱총나무 열매 등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학포야영장 데크 9
딱총나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름처럼 구겨진 산맥에 우뚝 서 있는 산봉우리는 옅은 회색 구름이 덮고 있었다. 그물망 속 물고기처럼 산봉우리는 구름 그물에 갇혀 있었다. 오늘 일정은 버스를 타고 나리분지를 가서, 깃대봉을 다녀온 후, 성인봉에 올라 도동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구름이 걷히지 않는다면 오늘 산행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될 것이다.

버스정류장 옆 숲 입구에는 검은 밴이 서 있었다.

이동도 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간판에는 커피와 피자를 판다고 되어 있었지만 영업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레 차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은 없었고 검은 밴 뒤로 텐트 두 개와 야외 탁자가 나무 그늘에 자리하고 있었다.

 

구름낀 울릉도 산맥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학포마을에서 올라오는 차량이 멈춰 서더니 창을 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K에게 외쳤다.

잡아

천천히 움직이던 차량은 일주도로에 멈춰 섰다. 몇 마디 대화가 이루어진 후 K와 나는 차량의 짐 공간에 앉게 되었다. 다행히 그분과 목적지가 같았다. 울릉도에서의 두 번째 행운이었다.

그분들은 부부와 처형 관계였다.

제주 여행을 마치고 일주일간 울릉도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학포야영장에서 야영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차에서 숙박한다고 했다. 여행 이야기를 나누며 이동하는 동안 어느새 우리의 목적지인 나리분지에 도착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나리분지
나리촌식당 갈림길

 

나리분지는 조용했다.

나리분지를 둘러싼 산군들은 여전히 옅은 회색 구름이 장악하고 있었다. 구름은 바람의 손길에 따라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원시림 숲속에 들어섰다.

싱그런 아침의 숲 내음을 맡으며 흙길을 걸었다. 구름을 뚫고 나온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에게 길을 인도하는 듯 내가 걸어가는 그 길에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축구장 수십 배 크기의 밭을 지났다.

예전에는 메밀밭이었지만 지금은 쇠뜨기 풀로 뒤덮인 넓은 평야처럼 보이는 곳이다. 밭이 끝나는 지점에 깃대봉 등산로가 있었다.

 

나리분지 등산로
투막집
메밀밭
메밀밭 끝지점=깃대봉 등산로 시작점

 

깃대봉 등산로에 들어섰다.

계곡 깊숙이 이어진 등산로는 완만한 경사의 원시림이었다. 호장근, 산마늘, 섬노루귀, 선갈퀴, 관중 등의 야생화가 산 사면에 가득했다. 햇빛도 거의 투과되지 않을 만큼 울창한 원시림에 시원한 골바람까지 불었다. 기온이 높아 땀이 났지만 흐르기 전에 바람에 의해 말라버렸다.

능선에서 휴식을 취했다.

계곡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면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원주목계단과 돌계단을 연속해서 두세 번 더 올랐다. 어느새 구름이 내 옆에 다가와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벗어나 주변이 확 트였다고 생각되는 순간 구름으로 둘러싸인 깃대봉 정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장근
선갈퀴
오르막길
깃대봉 정상

 

기다리고 기다렸다.

우리에게는 버스가 아닌 차량으로 이동하여 생긴 여유 시간이 있었다. 시간이 저축되어 이렇게 사용할 수 있으니 더욱 놀라웠다. 생각보다 시간은 더디 흘러갔다. 맨발로 깃대봉 정상을 밟으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주위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복분자 원액에 물을 타서 마셨다.

바람이 점점 세게 불었다.

계곡부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따라 구름이 맹렬하게 이동을 시작했다. 이동한 구름의 공간을 다른 곳의 구름이 순식간에 메꾸어 버렸다. 나는 치열한 눈치작전을 펼치며 바람과 구름과 해의 선택을 기다렸다.

 

깃대봉 인증사진
구름이 사라지길 기다리다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졌다.

깃대봉 정상에 올라온 지 30분쯤 지났을 때였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구름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더니 밝은 하늘이 펼쳐졌다. 우뚝 솟은 송곳봉과 해수욕을 즐기는 코끼리 바위, 노인봉의 위엄있는 기세와 현포항의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 고독을 즐기는 천부항의 외로움, 산으로 둘러싸인 나리분지의 포근함, 울릉도의 상징 성인봉의 수줍음까지 그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된 최고의 선물이었다.

기다리지 않았다면, 시간에 쫓겨 그냥 하산을 해버렸다면 이런 모습은 꿈에도 구경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은 묘미를 제대로 느낀 순간이었다. 하산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투막집 사거리까지 신명 나게 걸어갔다.

 

송곳봉과 코끼리 바위
나리분지
천부항
현포항
미륵산과 형제봉
운해

 

신령수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을 먹기엔 너무 일러서 그냥 성인봉을 오르기로 했다. 신령수에서 목을 축인 후 물병에 담았다. 성인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가파른 경사지를 때론 끊임없이 이어지는 목재계단을 올라야 했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목재계단의 삐걱거림이 근육의 고통과 헐떡거리는 호흡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고사한 섬피나무를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동시에 느꼈다.

성인수에서 휴식을 취했다.

성인수를 지나 마지막 남은 가파른 목재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더뎌지고 무거웠다. 포기하지 않고 남은 힘을 쏟다 부어 성인봉 정상에 드디어 올라섰다.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나를 맞아주었다.

기분 정말 죽이네

깃대봉, 알봉, 나리분지, 먼바다가 보이는 한갓진 성인봉 정상 부근에서 바람의 노래를 들었다.

 

목재계단
섬피나무
성인봉
성인봉 전망대

 

12(깃대봉과 성인봉)은 마무리되었다.

도동 대원사로의 하산길은 마음은 편했지만, 육체가 느끼는 고통은 심했다. 점심을 먹지 않고 연이어서 산행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먹은 것이라곤 복분자 원액을 물에 희석하여 마신 것과 등산객이 나누어준 오이와 방울토마토가 전부였다.

허기를 느끼는 상태는 이미 지나갔다.

겨울철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장소를 지날 때는 다리가 풀릴 정도로 힘이 빠졌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가 되었다. 산마늘(명이나물)밭을 지나 숲길을 벗어난 후에도 콘크리트 하산길은 대원사까지 계속되었다. 망향봉 아래 도동의 모습이 드러났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여도 그 속은 여느 대도시 못지않게 사람들과 차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곳에 내가 들어섰다.

 

대원사 하산길 숲
도동

 

호박 막걸리 할머니를 찾아갔다.

골목에서 보면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다. 대문 기둥에 붙어있는 안내 문구는 세월의 흔적을 말하듯 헐고 너절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이곳에 대체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걸까?

할머니, 술 팝니까?”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방충망이 처진 문 앞에서 말했다. 그곳에 있던 젊은이가 우리를 보고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막걸리를 사 들고 부리나케 나갔다. 그 자리를 우리가 꿰차고 들어가 앉았다. 할머니는 막걸리를 맛보라며 한 잔씩 따라주고는 이내 말씀을 이어나갔다. 중간에 끼어들 틈도 없이 이어지는 레퍼토리는 10여 분간 계속되었다.

막걸리는 시큼했다.

언뜻 떠오른 생각은 쉬었네였다. 할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왜 그리 말씀을 구구절절 하시는지 맛을 보고 제대로 알게 되었다. 5가지 약초를 달여서 빛은 술이라 가끔 알갱이가 씹힐 정도로 걸쭉한 막걸리였다. 마신 후 5분쯤 지나니 입안이 깔끔해지고 숙취도 없었다. 그 옛날 집에서 만들어 먹던 그런 술이었다.

 

이송옥여사의 울릉도 호박막걸리

 

점심을 먹기엔 너무 늦었다.

원더풀 꽈배기에서 간식을 사서 굶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배에 뭔가 들어가니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기서 일정을 멈추고 야영장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어정쩡한 시간이 화근이 되었다. 도동에서 행남 해안 산책로를 따라 저동으로 걸어간 것이다. 오후의 뜨거운 햇살은 바닷물에 반사되어 몸의 피로를 누적시켰다.

길이 바뀌었다.

7년 전에 걸었던 그 길이 아니었다. 도동 등대(행남 등대) 사거리에서 저동 옛길로 들어섰다. 해안 길이 아닌 숲길이다 보니 우뚝 솟은 산을 넘어야 했다. 오늘 12봉에 추가로 산 하나를 더 넘게 된 것이다. 땀은 비가 오듯 옷을 적셨고 타는 듯한 목마름에 마른 침을 연신 삼켰다. 산을 넘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렸다.

 

행남산책로

 

저동에 도착했다.

저동이 떠나갈 듯 선거 차량의 유세방송이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내일이 선거날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야영장으로 돌아가기 전 저녁을 먹기로 했다. 차가운 음식이 먹고 싶은 날이었다.

촛대바위가 훤히 내다보이는 대원회집에서 꽁치 물회를 주문했다.

얼린 꽁치를 잘게 썰어 살얼음 육수와 함께 나왔다. 반찬으로 나온 부지깽이 무침과 오징어무침 등이 입맛을 돋게 했다. 꽁치 물회는 보기엔 썩 맛있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먹어보면 비린 맛은 없고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했다.

 

저동
저동항 촛대바위
꽁치물회

 

일주 버스를 탔다.

저동에서 오후 630분 막차를 탔다. 관음도, 천부, 현포, 태하를 거쳐 학포까지 1시간여가 걸렸다. 학포야영장까지 마을 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울릉도에서의 첫 일몰을 감상하게 되었다. 둥그런 해가 푸른 하늘을 노을 지게 하면서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그 빛이 하늘을 뒤덮었다.

긴 하루였다.

낮의 모든 힘듦을 씻어내고 싶어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조명을 약하게 켠 후 의자에 앉아 야영장의 밤을 훑어봤다. 호박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 동안 우리에게 펼쳐진 모든 일을 되돌아봤다. 몸은 힘들었지만, 두 번 다시 못 느낄 소중한 경험을 한 하루였다. 내일은 무조건 휴식이다. 울릉도에서의 둘째 날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학포마을 일몰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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