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거의 매일 책을 읽고 짧은 글을 쓴다. 매일 반복되는 특별한 것 없는 단순한 하루를 살고 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소신에 따라 당당하게 행동한다. 감정표현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행복이 내 삶의 목적이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데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려고 노력할 뿐이다. 인간은 본시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려는 생존본능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생존을 위한 활동에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서 해 나갈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각자의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유하는 삶이 확실히 존재한다. 집단이 개인보다 우선시 되면 개인의 자유와 행복은 후 순위가 된다. 자유와 행복은 사회적 동물에게 필요했던 생존 도구이다.

사회 구성원의 삶은 행복할까?

행복하려면 즐거워야 하는데 많은 사람과 삶을 공유한다고 즐거울까? 많고 적음,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친밀한 감정이나 태도가 더 중요하다. 모든 사람과 친밀하게 지낼 수는 없다. 소수라도 나와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자유로운 삶이 좋다.

나는 자유로운 삶을 위해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안락함을 포기했다. 자유로운 삶은 생각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다. 일정 부분 물질에 대한 마음 비움이 필요하다.

돈을 좇기 시작하면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일만 최소한으로 하고 있다. 돈에 집착할수록 더 많은 돈을 갖고 싶어진다. 소유하고 싶은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소유물에 스스로가 저당 잡히고 만다. 결국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결국, 나는 없고 물질만 남는 삶이 되고 만다. 삶은 내가 사는 것이지 물질이 사는 게 아니다. 무언가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 더 크게 자유로워진다. 행복은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다. 삶은 자유를 추구할 때 한 걸음 더 행복에 가까워진다.

돈이 적다고 가치 없는 삶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다면 인간관계 속 행복을 찾아야 한다. 적게 일하더라도 즐기면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의 삶은 지나칠 정도로 소유 지향적이다.

풍족하게 물질을 소유하려고 평생을 돈을 벌기 위해 살고 있다. 돈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한 필수품이지만 돈의 씀씀이가 자유와 행복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돈에 의존한다고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느끼는 것이다.

소유하지 못한 것을 갈망하면 불행을 느낀다. 더욱더 더 바라는 마음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 소유한 것에 만족하는 생각과 태도를 가지면 행복을 느끼게 된다. 행복이 눈앞에 있는데 눈뜬장님이 될 것인가?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종종 일상을 탈출하여 나에게 자극을 줌으로써 행복해진다. 행복은 생각만큼 멀리 있지 않다. 가을바람에 낙엽들의 속삭임을 듣는 것과 같다. 어둠이 밝음과 이웃하듯 서로가 만나는 시간이 행복이다. 그래서 늘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행은 생존에 유익한 활동이다.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할 때 행복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잠시 일상을 벗어나 여행에 매진하면 그 순간 행복을 느끼고 나의 여행지는 행복한 세상이 된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행복은 뇌를 자극하는 감정의 경험이다.

자 떠나자. 일본 규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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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이었다.

이미 해는 떴지만 안 뜬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갈천약수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을 먹고 구룡령으로 향했다. 어제부터 강원도를 뒤덮은 미세먼지로 인해 시야가 황태해장국처럼 희뿌옇게 흐려졌다.

차창으로 보이는 달만이 막 떠오른 햇빛을 받아 뚜렷한 형태로 산을 넘고 있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지나간 것처럼 길이 구불구불하고 험했던 옛길은 어느새 아스팔트 포장길로 변해 있었다.

 

치래마을(갈천마을)
백두대간 구룡령 비석

 

나는 백두대간에 서 있었다.

뼛속까지 전해지는 강한 울림 때문에 우리나라 등줄기에 나 홀로 선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차가운 바람 속에 구불구불 이어진 구룡령 고갯길의 음침한 그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구룡령에서 갈전곡봉까지는 체 4km가 안 되었지만 나는 서둘러 길을 걸었다. 걷다가 능선 아래를 내려다보면 깎아지른 벼랑이 펼쳐졌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참나무 가지에 붙어 있는 겨우살이를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바람은 시원하게 불었고 오늘 산행은 포근한 날씨 속에 이루어질 거라는 낙관적 마음이 스며들었다.

 

구룡령
등산로 입구
겨우살이

 

달은 높은 능선을 넘어 잠들었다.

동시에 태양은 능선 위로 솟구쳤다. 낮 동안의 햇빛 아래에서 나는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구룡령 옛길을 지나면서 적막함과 함께 외로움이 찾아왔다. 쓸쓸함을 느끼지 않도록 나는 백두대간 마루금 등산로를 부지런히 걸어 갈전곡봉에 1시간 만에 도착했다.

해발고도 1,204m인 갈전곡봉은 휑했다. 자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헐벗은 가지와 떨어진 낙엽만 보고 겨울이 코앞에 왔음을 확신하는 나에게 반감이 치솟았다. 나는 자연 편에 서서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지 않는 내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백두대간
구룡령 옛길 정상
갈전곡봉

 

2년 전

이맘때에 단목령에서 조침령까지 백두대간 등산로 정비를 위해 현장조사를 했었다. 4, 조침령에서 왕승골 삼거리까지 백두대간 등산로 정비를 위해 현장조사를 했었다. 이번에도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명확했다. 왕승골 삼거리에서 갈전곡봉까지 백두대간 등산로 정비를 위해 현장조사를 해야 했다.

오랫동안 백두대간 마루금 등산로에 숨겨진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아내려고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떴다. 이제 당분간 짙은 초록을 한껏 머금은 푸른 숲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날이 추워지면서 더 분명해졌다.

 

백두대간 등산로 조사
조침령방향 백두대간

 

자연은 아무 조건 없이 그 자체를 인간에게 내줬다.

인간이 자연에 저질렀던 것을 생각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맡겼다. 나는 말도 없이 그저 능선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백두대간을 걸었다. 능선의 가파르고 좁은 길만이 내가 갈 길이었다. 봉우리에 올라 물 한 모금 마시고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둘러보았다.

바람에 감기는 몸으로부터, 내 몸이 하늘로 떠오를 수 있는 풍선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떠오르기만 하면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으리라.

 

백두대간 어디쯤... 점심식사
왕승골삼거리
왕승골로 하산
구룡령 쉼터에서

 

다음날

백두대간 트레일 6구간을 찾았다. 백두대간 트레일 6구간은 방태산을 기점으로 강원도 인제군과 홍천군의 3(월둔, 달둔, 살둔) 4가리(아침가리, 명지가리, 연가리, 적가리) 일대에 조성된 21km의 숲길이다.

둘레길은 시점과 종점이 연결되도록 산의 둘레를 따라 조성한 길이며 트레일은 산줄기나 산자락에 길게 조성하여 시점과 종점이 연결되지 않는 길을 말한다.(산림문화·휴양에 관한 법률 제22조의 2)

 

백두대간트레일
아침가리 전망대

 

하늘엔 여전히 미세먼지가 자욱하다.

대기의 먼지와 습기가 막을 이뤄 먼 거리일수록 사물의 윤곽을 흐리게 할 정도로 이 막들의 색채가 우세해졌다. 멀리 있는 백두대간 마루금 등산로는 앞에 펼쳐진 풍경에 비해 미세먼지 자욱한 색으로 변해버렸다.

숲길 입구의 자작나무 조림지와 박달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황철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만날 수 있고, 계곡과 숲을 교차해 지나며 감상할 수 있어 아름다운 자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자작나무

 

아침가리에 왔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국토의 63.7%가 산림인 우리나라에서 아침가리는 작은 계곡일 뿐이지만 자연 그대로 흐르고 있는 그 숨은 가치는 실로 거대하다. 아침가리 주변에는 자작나무 숲이 있다. 그곳에 서 있으면 북유럽 어느 숲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안구가 정화된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이름 모를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우듬지의 함성이 들리고, 구불구불한 계곡을 흐르는 물의 노래를 들으며 명상에 빠졌다. 인제를 몇 년 동안 자주 오게 되면서 맞이하게 된 소중한 추억이다. 참으로 괜찮은 경험이다.

 

 

아침가리

안개가 짙게 끼었다. 새벽 찬 기운을 만난 수증기가 희뿌연 연기처럼 아주 작은 물방울이 되어 세상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다. 어제까지 익숙했던 세상은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오전 830, 어젯밤에 꾸려둔 배낭을 메고 등산화 가방은 손에 쥐고 집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 형님 안녕하세요.’

다 왔습니다.’

, 집 앞에 있어.’

흰색 SUV는 육중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도로를 달린다. 차창으로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는 풍경에 두 눈이 고정된 체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후배와 이야기꽃을 피워본다.

 

안개 자욱한 날

 

출근길 왕복 6차선대로는 정체 중이다. 대로를 벗어나 토박이만이 아는 골목길로 들어섰는데 아뿔싸 유성 장날이었다. 시장 도로에서 골목으로 진입하려던 우회전 차량이 도로를 막고 서 있어서 신호대기도 없이 유성 나들목에 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각양각색의 차량이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며 고속도로를 내달리고 있다. 흰색 SUV도 한풀이하듯 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린다. 그렇게 5분의 시간이 지나고 흰색 SUV는 북대전나들목을 빠져나와 또 한 사람을 태우고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흰색  SUV

 

신탄진을 지나 죽암휴게소에 왔다. 오늘의 종착지는 양양에 있는 구룡령휴게소이지만 단양에 있는 황정산 자연휴양림에 들렀다 가야 한다. 이동 거리가 멀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여유롭게 아침부터 출발한 것이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TOM N TOMS에서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레모네이드를 샀다. 진한 커피 향기가 공기 중에 퍼져 안개에 스며든다. 멍멍한 정신을 차리기엔 커피 한 모금이면 충분했다. 내가 뜨거운 커피를 음미하는 동안 후배는 담배를 피우고 나서 흰색 SUV의 배도 채웠다.

소풍 가기에 딱 좋은 날씨다. 11월인데 봄 날씨처럼 포근하다. 주행 중 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갑지 않다. 유일한 흡연자인 후배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금왕휴게소에, 껴입은 옷을 벗기 위해 한 번 더 졸음쉼터에 들렀다.

 

죽암휴게소
금왕휴게소

 

정오 40분 전에 황정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계절은 가을인데 황정산은 이미 겨울의 문턱에 서 있다. 단풍은 거의 다 떨어졌고 낙엽은 바싹 말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낙엽에 갇혀 정체를 숨기고 있던 처녀치마의 잎만이 주위 환경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후배만이 숲길 정비사업이 진행 중인 석화봉 등산로를 올랐다. 나와 또 한 사람은 휴양림을 돌아다니며 주변을 관찰했다. 햇빛이 비치는 양지는 따뜻한 느낌보다 더 뜨겁고 그늘로 들어서면 서늘함을 넘어 싸늘함이 느껴졌다.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2시간이 지난 뒤 후배가 산에서 내려왔다. 이미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우리의 배고픔은 극에 달했다.

 

황정산 자연휴양림

 

늦은 점심을 먹으러 대강면 장림산방에 왔다. 장림산방은 60년 전통, 3대째 향토 음식 계승자의 집이었다. 건물 위쪽에 단양마늘축제 곤드레가마솥밥 금상 수상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나는 첫 방문이고 후배와 또 한 사람은 두 번째 방문이다. 건물 내부는 천정이 높아서 식당임에도 음식 찌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출입문 벽 상단에 음식으로 고치지 못한 병은 약으로도 고치지 못한다라는 문구가 두 눈을 사로잡았다.

 

장림산방

 

우리는 능이버섯전골을 주문했다. 식사 조리시간은 20분 소요된다고 메뉴판에 적혀 있다. 물을 마시면서 핸드폰으로 뉴스 기사를 검색했다. 10분쯤 지났을 때 나물과 채소로 만든 9가지 반찬과 함께 능이, 싸리, 두부, 호박, , 콩나물 등이 들어간 능이버섯전골 나왔다.

내 인생의 첫 능이버섯전골은 아니다. 산을 다니면서 여러 번 먹어봐서 그 맛을 적확히 알고 있다. 버너 위에서 능이버섯전골은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다. 우리는 며칠을 굶은 게걸든 사람처럼 바닥이 보일 때까지 끊임없이 먹었다.

 

능이버섯전골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차량 네비게이션은 구룡령휴게소까지 250km라고 알려줬다. 적어도 2시간 30분은 소요될 것이다. 홍천을 지나면서 양양까지는 터널 구간이 많이 나온다. 터널에서 운전할 때마다 나는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되었다.

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으려나

후배와 또 한 사람이 식곤증에 잠을 동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운전을 했다. 잠든 이의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한순간에 깬 것은 후배의 전화벨 소리였다. 공적인 용무의 전화는 후배의 단잠을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강원도 어느 들녘

 

원주휴게소에 왔다. 이번에는 ANGELINUS에서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레모네이드를 샀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후배는 담배를 피웠다. 잠이 확 깬 후배가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계속 운전을 했더라도 홍천휴게소에서 후배와 교대할 생각이었다. 좌우지간 내가 터널 운전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홍천에 가까워지면서 고속도로 공사 구간이 반복되었고 조금씩 지체되었다. 동홍천을 지나면서는 터널의 연속이었다. 반복되는 터널 구간에 피로를 느낀 후배가 내린천휴게소로 들어갔다. 차량에서 내리자 강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차가운 정도가 사뭇 달랐다. 후배의 입과 코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가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원주휴게소
내린천휴게소

 

구룡령휴게소까지는 40km 정도 남았다. 5시가 다 되어가니 사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터널을 지나고 또 지나 우리나라 최장터널에 진입했다. 작년에 통과해 본 적이 있는 인제양양터널로 길이가 10,965m이다. 일반 터널과 비교하면 조명도 밝고 갓길도 있어 도로 폭이 넓다. 물론 터널이 구간단속구간이라 속도를 높일 수 없어 한결 안전하게 느껴진다.

 

인제양양터널

 

고속도로를 벗어나 인적없는 도로를 달려 구룡령휴게소에 왔다. 아침에 출발하여 9시간만인 해 질 무렵에 갈천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갈천마을은 구룡령 아래 첫 마을로 칡이 많아서 비롯된 이름이고 치래마을은 갈천을 우리나라 말로 풀어쓴 명칭이다.

예약한 펜션에 여장을 풀고 서둘러 갈천약수식당에서 오리고기로 긴 여정의 회포를 풀었다. 오후 7, 펜션으로 돌아오는데 칠흑 같은 어둠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산속의 밤은 어둡고 길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다.

내일은 구룡령으로 go go~.

 

구룡령휴게소
황토펜션
갈천약수식당

어젯밤 일기예보는 적중했다.

새벽 4시쯤 세상을 환하게 만든 번개와 천둥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돌격, 앞으로라는 호령에 맞춰 비는 맹렬하게 세상을 향해서 돌진하는 중이다. 올여름은 아직 태풍은 오지 않았는데 폭우와의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상은 끈적끈적하고 습한 날들의 연속이다.

오후에 폭우가 할퀴고 간 화단을 정리했다.

물에 잠겨 썩은 쪽파를 뽑아내고, 키가 훌쩍 자라고 열매는 영글지 않는 방울토마토를 뽑아버렸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태풍도 안 왔는데 폭우의 위력이 대단하다. 평상시에 좋은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텃밭 겸 화단이기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올여름 폭우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자연에 순응하도록 요구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세상의 질서는 파괴되지 않을까? 위대한 자연 앞에 고개를 숙인다.

 

 

어둠 속에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선잠을 잔 것은 아니지만 몸이 찌뿌둥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묶은 후 화장실을 다녀왔다. 조카가 할머니 드시라고 사 온 순대를 어젯밤 늦게 막걸리와 먹었었다. 막걸리 한 대접이 새벽에 나를 깨운 것이다. 자다 깼는데 또 자기는 뭐하고 해서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을 읽는다. 새벽의 고요함은 책을 읽기에 더없이 좋다.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흐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으므로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한 것이다.”

 

 

열린 창문으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온갖 소음에 사로잡혀 사는 도시의 삶에 문득 찾아온 반가운 소리다.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오래된 단독주택이다. 텃밭이 있고 화분이 즐비하게 있는 넓은 마당이 있다. 텃밭에는 봄부터 심은 상추, 부추, 열무, 대파, 당근, 가지, 방울토마토, 고추, 쪽파 등이 자라고 있다. 30개가 넘는 화분은 각양각색의 꽃들로 마당은 언제나 녹음이 가득하다.

마당 한쪽에 자리 잡고 서 있는 터줏대감 감나무는 집을 보호하듯 그윽한 시선으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끔 새들도 찾아와 감나무 가지에 앉아 있곤 한다. 회색 도시 속 우리 집은 갈 곳 없는 풀벌레와 새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아늑한 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옛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나귀를 타고 눈 속에 피어난 매화를 찾아다니는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어딘가에 피었을 매화를 찾아 무작정 떠나는 옛 선인들의 운치와 멋을 엿볼 수 있다. 폭우 속에도 꽃은 핀다. 비록 굵은 빗줄기에 맞아 꽃잎이 시들고 강풍에 꽃대가 꺾여도 화분의 선인장 꽃과 란타나 꽃은 피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물을 주면서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처럼 폭우 속에 피어난 화분의 꽃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 순간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가지마다 꽃이 피어나는 모습과 색이 다른 꽃을 피우는 아름다움을 비로소 보게 되어 기쁘다.

 

 

뭉게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점심을 먹고 어머니 방 침대 정리를 시작했다. 지금보다 낮은 매트리스로 교환하는 작업이다. 한다고 다짐만 하다 며칠이 지났다. 이불과 베개를 걷어내고 무겁고 높은 매트리스를 들어낸다. 벽과 침대 틈의 먼지를 쓸고 걸레질을 한다. 캠핑용 매트리스를 가져와 공기를 넣고 침대 크기에 맞게 조절한다. 매트 위를 얇은 이불로 덮고 베개를 놓으면 침대 정리가 끝이 난다.

날을 흐리지만 바람은 시원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고 찬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 후 선풍기 바람을 즐기며 달콤한 수박을 먹는다. 막힌 코가 뻥 뚫리듯 수박의 시원함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간다. 이때의 여유로움을 오랫동안 즐긴다. 땀 흘린 뒤의 개운함은 이런 것이다.

 

 

장마전선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인다.

아침에 붉은 고추를 따다가 문득 여름은 다 지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연약해 보이는 가지에 빨갛게 물들어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를 보니 결실의 계절이 완연해졌다. 기나긴 장마 뒤에 한껏 부드러워진 햇살을 받으며 봄의 풋풋함과 여름의 신선함은 가을의 충만함으로 변해가고 있다.

연이은 폭우는 더위를 잊게 했다.

야생화같이 짧은 계절, 순식간에 계절이 변해가고 있다. 생각 없이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다 보니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을 오늘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다. 솔솔 불어오는 아침 바람은 가을임을 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진정, 가을이구나.

 

 

나무는 여름의 무성한 잎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가지가 잎 무게에 휘어질 정도로 수북하게 매달려 있다. 세월이 가면 무성하던 잎들이 맥없이 땅 위로 떨어질 것이다. 올여름엔 태풍이 오지 않았고 폭우 때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아서 잎들은 선명하게 물 들을 것이다.

오늘은 감이 4개나 마당에 떨어졌다. 지붕이나 마당에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내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떨어진 감을 보면 계절의 변화가 실감이 난다. 세월은 속절없이 빨리 흘러간다. 세월은 온다고 안 하고 간다고 표현하는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니 알게 되었다.

때가 되면 잎이 떨어지듯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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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이다.

어느 순간 찾아온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파리를 쫓아내듯 무더위를 손으로 쫓아낼 수는 없다.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에 서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린다. 바람이 불지 않아 연신 손부채를 흔든다. 온몸은 땀범벅이 되지만 시원함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잰걸음으로 인도를 벗어난다.

늘 다니던 도서관 건물에 들어서니 서늘한 바람이 내 몸을 감싼다. 정수기로 가서 시원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이제야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의 열기가 식기 시작한다. 무더운 한낮에는 도서관에서 에어컨 바람 쐬며 책을 읽는다. 한여름에는 이 맛에 도서관을 찾는다.

 

느릅나무 보호수(대관령면 차항2리)
대관령면 바우파머스몰

 

며칠째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다.

하루의 마감은 안경을 벗고 눈을 감는 순간이다. 평소에는 머리가 베개에 닿으면 바로 잠이 든다. 요즘은 열대야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고 있다. 더위를 잠시나마 잊으려고 선풍기 바람에 몸을 의지하지만 헛수고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은 열심히 살지 않은 하루에 대한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곤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세상을 초록빛으로 물들여 놓고 7월은 저물었다.

휴가철의 시작과 함께 건조하고 메마른 날씨가 더욱 더위를 부추기고 있는 8월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아침부터 흐리고 도시를 둘러싼 산자락엔 먹장구름이 가득한데 기다리던 비는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마당에 어머니가 가꾸는 화분의 꽃들은 각양각색으로 싱그럽게 피어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죽음의 살기를 느끼며 여름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계절임을 실감 중이다.

 

능소화
해당화

 

타닥타닥 타닥타닥

비가 온다. 빗방울이 지붕에 부딪히는 소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귓가에 들린다. 8월 장마가 시작되었다. 처마 안쪽에 우두커니 서서 지붕을 타고 대아에 떨어지는 물줄기의 정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비가 만들어낸 소리 이외엔 아무 소리도,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빗소리만이 세상에 가득하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었다.

입추가 지나면서 여름이 가고, 때늦은 폭우가 쏟아지면서 가을이 찾아왔다. 폭우가 동반한 강풍에 아직 익지 못한 감나무 열매가 땅에 내던져졌다. 서럽게 슬픈 모습이고, 허탈하고 허무한 감정이 일었다.

 

비 오는 날 우리집 마당 정경

 

비 오는 거리를 걷는다.

나뭇가지가 속절없이 흔들리면 내 마음도 같이 흔들거린다. 빗속을 걸으며 사진을 찍고 바람의 떨림에 두둥실 떠다니는 뭉게구름처럼 미지의 곳을 여행하고 다닌다. 방랑의 길은 언제나 즐겁고 소중한 경험이다.

비가 내린 후부터 시간마다 바람의 냄새가 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아래로 떨어진다. 흙이 젖고, 도로가 젖고, 세상이 촉촉해지는 정경이 색다르게 보인다. 문득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 비 오는 거리의 꿉꿉함보다 커피숍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껴본다. 창밖의 비를 보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비 오는 거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늘이 온통 짙은 회색빛이다.

먹장구름에서 시작된 비가 내 발끝을 스치고 땅에 떨어진다. 일주일이나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열대야로 못 자고 깨어 있던 밤의 시간만큼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세상은 얼마 동안 목욕을 하지 않은 걸까?

비가 온 뒤 후텁지근한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듯 세상의 모든 묵은 때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있다. 금방 세상이 깨끗할 것 같았는데 비로 씻어내면 낼수록 세상이라는 욕조는 더욱 더러워지고 있다. 언제쯤 그 목욕이 끝날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세상이 다시 화사한 빛을 발산할 때까지 우리는 굳건히 버텨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비가 갠 후 세상 참 깨끗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울진 망양정
울진 망양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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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훑어보기 1탄

 

6. 양떼목장

알프스가 아니라 대관령이다.

푸른 하늘에 양떼구름이 유유자적 떠다닌다. 드넓은 바다를 고래가 헤엄치듯 푸른 초원에도 양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수확을 앞둔 인근의 양상추밭, 감자밭과 함께 양떼목장은 알프스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대관령하면 제일 먼저 양떼목장이 떠오른다.

대관령에는 대관령양떼목장, 대관령하늘목장, 대관령삼양목장, 대관령순수양떼목장, 알프스양떼목장, 바람마을양떼목장 등이 백두대간과 인접한 높은 봉우리로 둘러싸인 낮은 경사면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양떼목장의 즐길거리는 먹이주기 체험과 산책로 걷기이다.

양은 5월 중순에서 10월 말까지 초지 풀이 자라는 시기에 방목된다. 드넓게 펼쳐진 초지를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풀을 뜯는 양떼를 보게 된다. 먹이주기 체험은 축사 안의 양에게 건초를 주는 체험이다. 양은 배가 부르면 더는 건초를 먹지 않는다.

 

대관령양떼목장

 

7. 티롤빌리지

알프스 테마마을이다.

티롤빌리지는 오스트리아의 티롤지방을 모델로 유럽의 광장문화를 접목했다. 용산리 알펜시아리조트 입구에 있다. 도로와 광장의 레벨 차를 이용해 상업시설과 주거시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전형적인 알프스 산악마을의 모습이다.

인형박물관과 노기하우스도 있다.

인형박물관은 국내 유명 인형작가 및 수집·창작한 인형이 10여개의 전시실에 테마별로 전시되어 있다. 연애계 대표 피구어 매니아인 전영록은 특별관을 통해 취미를 공유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라이브공연을 할 수 있는 노기하우스와 희귀앨범 등 개인소장품을 전시하는 개인박물관도 있다.

 

비엔나 인형박물관
티롤하우스
노기하우스

 

8. 눈꽃마을

대관령은 1950년대 우리나라 스키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목장 경사면에서 고로쇠나무로 만든 전통 썰매를 타고 활강했다고 한다. 썰매는 스키를 짧게 만든 것처럼 생겼다. 이는 사냥과 이동의 편리함을 위해서였다.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2018년에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린 것이다.

대관령은 눈과 얼음의 나라이다.

눈꽃마을은 차양 2리에 있다. 겨우내 눈이 내리면 쌓이기만 하지 녹지 않는다. 백두대간 준령인 황병산 자락이 뒤를 감싸고 있다. 봅슬레이 눈썰매, 스노우래프팅으로 짜릿한 활강을 즐길 수 있다. 전통 썰매, 설피 등과 대관령풍력단지를 조망할 수 있는 눈꽃마을 트래킹도 빠질 수 없는 체험이다.

 

눈꽃마을 유아숲체험 1
눈꽃마을 유아숲체험 2

 

9. 의야지바람마을

의로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횡계2리에 있고 그런 의미로 자연부락명이 생겼다. 바람은 자연의 바람희망의 바람으로 마을 이름을 의야지바람마을이라고 했다. 임진왜란때 경주김씨의 후손이 사부랑이라는 관직을 지냈는데 그 묘가 있는 마을 골짜기를 사부랑골이라고 한다.

·관협업 우수사례 사업지이다.

행정안전부가 공모한 인구감소지역 통합지원사업1호 사업지로 선정되면서 마을의 모습이 점차 바뀌고 있다. KT의 지원을 받아 세계 최초의 5G 시범 마을이 되었다. 지역활력센터가 건립되면서 치즈만들기, 아이스크림 만들기, 양 먹이주기, 눈썰매 타기 등 마을관광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부랑골
의야지 향토음식점
의야지바람마을 안내도

 

10. 지르메마을

스키와 황태 발생지이다.

횡계리에 있는 지르메마을은 1960년대 제1 스키장이 개장하면서 스키대회가 처음 열렸다. 마을을 흐르는 송천 주변으로는 황태덕장이 들어섰다. 국내 황태덕장 마을로 가장 유명하며 진부령 아래 용대리보다 먼저 들어선 덕장이다. 또한, 스키와 황태를 주제로 한 벽화 거리도 조성되었다.

겨울바람은 매섭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피난 온 함경도 사람들이 호구지책으로 황태덕장을 꾸렸다. 황태는 하늘이 만들어준다고 한다. 오랜시간 하늘의 날씨에 맡겨야 한다. 황태는 33번의 손이 가야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정성이 들어가야 좋은 황태가 된다.

 

지르메마을 황태촌
지르메마을에서 바라본 능경봉

 

11. 황태

명태는 다양한 이름을 가진다.

싱싱한 생물이면 생태, 새끼때는 노가리, 얼리면 동태, 반쯤 말리면 코다리, 완전히 말리면 북어, 그리고 황태가 있다. 밤이면 추운 날씨에 꽁꽁 얼었다가 낮에는 따뜻해서 녹기를 서너 달을 보내야 황태가 된다.

황태 음식은 대관령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이다.

황태국, 황태미역국, 황태구이, 황태찜 등이 황태를 이용한 음식이다. 횡계리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황태촌, 황태덕장, 황태회관을 모두 가보았다. 황태정식을 주문하면 황태국이 서비스로 나온다. , 콩나물, 두부, 황태를 넣고 푹 끓인 황태국은 시원하며 해장국으로 그만이다. 반찬으로 나오는 황태식해가 별미이다. 개인적으로 황태의 색깔, 황태의 크기, , 반찬 등으로 판단해보면 알배추가 나오는 황태회관이 제일 맛있었다.

 

황태회관 황태정식
황태구이
황태덕장 황태정식 및 황태찜

 

12. 오삼불고기

대관령면 횡계리는 오삼불고기의 원조다.

1970년대 초, 어느 젊은 여인네가 처마가 낮은 납작한 곳에서 어렵게 주점을 운영하면서 살게 되었다. 아이스박스에 오징어를 넣고 판매하다 보니 오징어가 변해 있었다. 그 오징어를 고추장에 발라 연탄불에 구워 팔았던 것이 오삼불고기의 유래가 되었다.

독특한 풍미를 맛볼 수 있다.

전통적인 조리법은 철판에 호일을 깔고 양념된 오징어와 돼지고기를 올려 요리하는 것이다. 고산지대인 횡계의 추운 날씨가 매운 고추장과 궁합이 잘 맞고 오징어와 돼지고기와 만나 창의적인 먹거리를 개발한 것이다.

 

횡계리 오삼불고기 거리
오삼불고기

 

13. 막국수

대표적인 메밀 산지의 막국수를 맛볼 수 있다.

삼교리동치미막국수는 폭설이 내린 3월에 방문했다. 대표메뉴인 동치미막국수와 수육을 먹었다. 면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워 메밀면 특유의 식감을 느낄 수 있고 동치미육수라 더 시원하고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수육은 무척 비싸지만 고기의 질이 좋고 쫀득했다.

평범한 가정집같은 분위기다.

국민의 숲 인근에 있는 가시머리식당은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하순에 갔다. 식당 인근 지명인 가시머리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더울때는 막국수가 진리다. 메밀면 위에 김가루가 뿌려지고 무채, 오이채가 올려졌다. 빨간 양념장에 삶은 달걀 반쪽을 올린 후 살얼음 가득한 육수를 부었다. 육수는 깔끔하고 시원했고 메밀면은 쫄깃했다.

두 곳 모두 인제의 막국수와는 사뭇 다른 대관령만의 막국수를 맛보았다.

 

삼교리동치미막국수 및 수육
가시머리식당 막국수

[프롤로그]

 

새벽 4.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알람도 울리기 전인데 눈이 떠진 것이다. 열린 창문의 방충망 뒤편은 여전히 어두웠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처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비였다. 두두두두. 빗소리는 커다란 소음을 일으키며 대야에 떨어졌다. 첨벙첨벙. 순식간에 그 소리가 변했다. 벌써 대야에 물이 차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 고추에 물은 안 줘도 되겠네.’

도시는 비에 흠뻑 젖었다.

비가 내리면서 어둠살이 깔린 거리엔 왠지 모를 우울함이 바람과 함께 나부끼기 시작했다. 아침이지만 거리의 가로등과 상점들은 다양한 색깔의 빛으로 어둠을 밀어내는 몸짓을 시작했다. 그들만의 빛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빛의 현란함 속에서도 도시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엔 우산을 받쳐 든 사람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7월, 어느 비오는 날 아침

 

폭우 속에 나와 K가 있었다.

내가 커피를 사고 K가 물과 담배를 샀다. 우리들의 루틴은 오늘도 변함이 없었다. 루틴을 마치자 나와 K는 폭우를 뚫고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는 액체이지만 차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고체처럼 선명하게 앞 유리에 부딪혔다. 유성을 출발하여 진천터널을 지날 때쯤에서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겁게 깔린 먹구름은 흰 구름으로 대체되었다.

대관령면에 도착했다.

올해만 4번째 방문이고 평소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3월과 5월에는 하루, 6월에는 3일을 체류했다. 7월에는 5일을 체류할 예정이었지만 비가 와서 4일째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3월은 폭설이 내렸고 5월은 비가 왔고 6월과 7월은 흐렸다. 6월의 낮은 서늘했고 7월의 낮은 해발고도만큼 해가 비치는 곳만 뜨거웠다.

다른 지역보다 여름이 시원하다는 것은 대관령면에 오고 나서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3월, 폭설
3월, 횡계리 배추밭
6월, 능경봉 아래 전원단지
7월,횡계리 배추밭

 

 

[훑어보기]

 

1. 대관령면

대관령면은 대부분이 산악지대이다.

강원도 평창군의 북쪽에 위치하며 강릉시에 인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황병산, 동쪽에는 백두대간 선자령 · 능경봉 · 고루포기산이 있고, 남쪽에는 발왕산이 있고 서쪽에는 매산 · 장군바위산이 둘러싸고 있다. 높은 고산으로 둘러싸인 고위 평탄 분지 같은 모습이다. 한우연구소, 가금연구소, 양떼목장 등 이국적 풍광의 초원이 대관령면 전역에 산재해 있다.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해가 뜨는 듯하다가 안개 같은 구름이 순식간에 뒤덮어 버린다.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다. 여름 기온은 평지보다 4정도 낮다.

 

지르메마을에서 바라본 능경봉과 고루포기산
대관령면
알펜시아 스키점프대

 

2. 대관령

대관령은 큰 고개다.

높은 고개를 뜻하는 관()에 령()까지 붙었으니 높고 험준한 고개였음을 알 수 있다. 대관령은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평창과 강릉의 경계에 있다.

4번 대관령에 왔다.

내가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강릉 방향, 위 주차장)을 찾은 것은 6월에 한 번, 7월에 세 번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변화무쌍한 기후에 놀라곤 했다. 뜨겁게 햇볕이 내리쬐다가도 순식간에 구름에 뒤덮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시내는 맑은데 이곳은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구름이 낮게 드리워지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주차장은 드넓었다.

현재 이곳은 신재생에너지전시관, 평창대관령수소충전소, 대관령숲길안내센터, 대관령유아숲체험관, 공중화장실이 자리하고 있다. 6월말에서 9월말까지를 제외하고는 드넓은 주차장은 한산하다.

서늘함이 느껴졌다.

기온이 다른 지역보다 낮다고 내 마음마저 서늘해지진 않는다. 이곳은 6월 말부터 캠핑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허가된 야영장이 아니다. ‘야영 · 취사 · 쓰레기 투기 금지라는 현수막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음식물을 먹고 있었다.

주차공간이 없었다.

백두대간이나 대관령 숲길을 찾아온 사람들은 주차할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캠핑카, 텐트 등 주차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차량이 70대가 넘었다. 이런 행태는 야간이나 주말에는 100대가 훌쩍 넘는다고 한다. 대부분은 한달이상 장박을 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취사의 위험성, 소음, 쓰레기 투기, 화장실 사용문제 등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었다.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이런 불편을 호소하며 오히려 악성 민원을 넣고 있는 게 현실이다. 후안무치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라고 생각된다.

주차료를 받는 휴게소가 있다.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횡계 방향, 아래 주차장)은 올 초부터 주차료를 받기 시작했다. 최근에 주차료 받는 희한한 휴게소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중앙일보 박진호 기자(7/17, 7/19).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단지, 아래 주차장처럼 위 주차장도 주차요금을 받는다면 캠핑족의 이런 행태는 확 줄었을 것이다.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원만한 해결책을 관계기관에서 하루빨리 찾길 바랄 뿐이다.

 

대관령
6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 ( 강릉 방향 ,  위 주차장 )
7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 ( 강릉 방향 ,  위 주차장 )
7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 ( 강릉 방향 ,  위 주차장 )
7월,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주차장 ( 횡계 방향 ,  아래 주차장 )

 

3. 대관령 국가숲길

대관령에는 국가숲길이 있다.

국가숲길은 산림·생태적,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아 체계적인 운영·관리가 필요한 숲길을 정부에서 지정·고시하고 관리하는 정책이다. 그간 최초 지정된 지리산둘레길, 백두대간트레일, DMZ편치볼둘레길, 대관령숲길과 추가 지정된 내포문화숲길, 울진금강소나무숲길 총 6개소가 국가숲길로 지정되었다.

대관령 국가숲길은 12개 노선으로 약 103km이다.

숲길은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성산면에 걸쳐 있다. 개별노선으로 관리되던 숲길을 대관령의 자연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4개의 주제 순환 숲길(목장코스, 소나무코스, 옛길코스, 구름코스)로 새롭게 구획했다.

 

대관령숲 안내도
대관령 국가숲길 목장코스
올림픽트래일

 

4. 국민의 숲

국민의 숲은 인공조림지다.

대관령 국가숲길 중 개별 숲길에 포함된 국민의 숲은 전나무, 낙엽송(일본잎갈나무), 잣나무, 자작나무, 독일가문비 등이 조림되어 있다. 숲 옆에는 양묘장이 있다. 침엽수가 주종을 이뤄 강력한 살균물질인 피톤치드를 즐기며 걷기에 편안한 숲길이다.

야생화도 다양하다.

은대난초, 동자꽃, 좁쌀풀, 쥐오줌풀, 노루오줌, 은방울꽃, 개쉬땅나무꽃, 고광나무꽃, 산사나무 열매 등 잘 정리된 숲길 주변으로 계절에 따라 야생화가 피고 진다.

숲에 벌레가 없다.

7월 한낮, 무더위에도 숲은 시원하며 모기 등 벌레가 거의 없었다. 국가대표 등 운동선수들의 훈련장으로 활용되는 곳이다.

 

국미의 숲 1
국미의 숲 2
국미의 숲 3
동자꽃

 

5. 등산안내

선자령

백두대간 중심부에 있는 봉우리로 해발고도는 1,157m이다. 강릉시가지와 푸른 동해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초원 위의 풍력발전단지도 장관이다.

능경봉

백두대간에 있는 고산으로 해발고도는 1,123m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고 겨울에는 무릎이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이는 곳이다.

고루포기산

백두대간에 있는 고산으로 해발고도는 1,238m이다. 울창한 숲, 초원지대, 야생화가 조화를 이루어 풍경이 아름답다.

발왕산

대관령면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우뚝 솟아 있고 해발고도는 1,458m이다. 사계절 휴양리조트인 용평리조트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정상에는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의 수백년 묵은 주목 군락과 철쭉이 장관을 이루는 산이다.

장군바위산

칼산, 투구봉과 함께 횡계의 고원지대를 지탱하면서 명성을 지키고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1,140m이다. 보는 방향에 따라 신선바위, 코끼리바위 등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 맑은 물이 흐르는 백일평 계곡을 끼고 있어 청청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칼산

횡계리를 기점으로 하여 차항리와 용산리 사이의 산으로 해발고도는 941m이다. 참나무숲 사이로 스키점프장과 알펜시아스키장이 보이고 정상에서는 이국적인 풍력발전소와 드넓은 초지가 펼쳐진다.

 

대관령면 등산 안내도
발왕산 엄홍길 숲길 입구
능경봉 등산로 입구

 

1년 전 이맘때에 인제를 갔었다.

어느 지역을 간다고 말하는 순간 여행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나는 오늘 인제에 간다. 늘 만나던 노은동 약속장소에서 K형과 만났다. 이른 아침이라 단골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선택된 곳이 파리바게뜨였다. 장거리 여행을 하기 전 승용차에 휘발유를 넣듯 커피는 우리에게 에너지를 제공한다.

월요일인데도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유성에서 출발하여 청주, 오창, 진천, 충주, 홍천을 거쳐 인제로 향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후텁지근하게 느껴지던 바깥 기온은 점점 내려갔다. 아침 하늘은 아이가 생떼를 부린 듯 흐렸다.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처럼 엷은 먹색 구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입김을 세게 불면 엷은 먹색 구름이 흩어져 맑은 하늘이 나올 것 같았다.

 

통영 바닷가의 하늘

 

1년 만이다.

원통에 있는 다들림막국수에 왔다. 과속도 하지 않았는데 약속 시각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일행을 기다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입구에 간판이 없었더라면 그냥 시골의 여느 집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작년에 왔을 때도 이곳이 식당이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현관 앞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식당의 수호신처럼 자리하고 있다.

맛집이 없는 고장은 없다.

인제에 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막국수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인제에 오면 막국수를 먹고 있다. 막국수는 춘천이 아니라 인제에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제에는 막국수 맛집이 여러 군데 있는데 그중 합강막국수, 다들림막국수, 방동막국수, 옛날원대막국수를 추천하고 싶다. 식당마다 고유의 육수 제조법이 있어 막국수 맛이 다 다르다.

 

다들림막국수
식당내부

 

비빔 막국수 3, 물 막국수 1, 편육 주세요.

내가 인제에 올 때마다 물 막국수를 먹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 모닝커피를 마시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행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미리 주문했다. 점심시간 전이라 식당에는 우리만 있었지만 금방 모든 자리가 다 찰 것이다. 면을 뽑는 기계음이 들리고 주방의 분주한 움직임은 다양한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모든 음식은 색감이 있다.

음식은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맛이 달리 표현된다. 맛으로 표현되는 음식은 주관적이지만 색감으로 표현하는 음식은 객관적이라 더 좋다. 두부는 노르스름하고, 수육은 밝은 회색을 띠고, 상추는 녹색이고, 김치는 빨간색이다. 막국수의 달걀은 하얗고, 오이는 밝은 연두색이고, 면은 옅은 자색이고, 김 가루는 까맣다.

 

두부
편육(15,000원)과 기본반찬
물막국수 7,000원
비빔막국수 8,000원

 

막국수를 먹으면 좋은 이유가 있다.

물 막국수는 시원하고 비빔 막국수는 매콤하다. 비빔 막국수를 먹다가 육수를 넣어 물 막국수로 먹을 수도 있다. 면은 탱탱하지만 부드럽고 얼린 살얼음 육수가 시원하다. 막국수를 먹으면 덤으로 편육(수육)까지 먹게 된다. 과식과 폭식을 해도 배가 더부룩하지 않다. 식후 금방 배가 꺼져 또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막국수를 먹으면 온몸이 서늘해진다.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개인적인 취향을 고려하여 식당마다 양념을 따로 준비해 두고 있다. 막국수에 설탕, 식초, 겨자, 들기름을 넣는 것에 대한 고민은 행복한 고민이다. 막국수를 먹는 순간만큼은 모든 일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막국수를 먹는 행위에 마음을 다하고 색감을 즐기며 먹으면 된다. 그냥 천천히 육수를 마시면 머릿속의 번잡함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막국수를 먹은 뒤 카드로 계산을 했다.

은행 계좌에 존재하는 돈이지만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돈을 사용했다. 존재하지만 사용할 때는 없는 돈을 쓴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무엇을 먹고 다니든지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의 총량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옛날원대막국수
곰취수육 20,000원
곱배기 막국수 10,000원

 

한계령을 넘었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도시 생활로 찌든 내 안의 번뇌를 깨끗하게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내 모든 발걸음에 선명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걸어온 발자국이 아쉽지 않게.

도로에 한여름 냄새가 난다.

한낮의 불볕더위가 공기를 뜨겁게 달궈 시큼한 냄새가 난다. 살아 있는 식물은 메말라 앙상해지고 그림자의 그늘은 점점 좁아진다. 햇빛의 딱딱함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원통에서 한계령을 넘어 필례약수에 왔다.

이곳에 인제 천리길이 있다. 길에도 목적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인데 목적 없이 만들어진 길이라면 쓸모없는 길이 되고 만다. 더군다나 걷는 사람에게 허무감을 주기 쉽다.

 

한계령
한계령휴게소
점봉산 자락(오색방향)

 

지난주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불볕더위라 낮에 햇빛을 받으면 그늘을 찾게 된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천둥소리와 함께 먹장구름이 산릉선을 넘어와 순식간에 폭우가 쏟아졌다. 눈앞의 사물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렸다.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끄듯 리모컨으로 비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인제에서의 밤은 길었다.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고 술자리가 이어졌다. 늘 보는 사람들이지만 마치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처럼 밤늦게까지 왁자지껄했다. 밤이 길었던 만큼 아침은 금방 찾아왔다. 산을 감싸고 있는 안개 같은 흰 구름이 산들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아침 기온은 높았으나 체감온도는 훨씬 낮게 느껴졌다.

 

인제 전통시장

 

인제의 산은 푸르다.

푸른 숲, 내가 찾아간 필례약수의 주변 숲도 푸르렀다. 불볕더위를 이겨낸 찰피나무와 까치박달 나무가 열매를 흐드러지게 맺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필례약수를 가다 보면 찰피나무 가지 틈으로 맑은 하늘이 숨어 있다. 구름을 뚫고 빛이 대지에 닿으면 음지가 사라지고 양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양지는 음지를 없애버린다. 마치 음지는 가짜이고 양지가 진짜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낮의 따가운 햇볕이 도로 위로 쏟아졌다.

햇빛이 장맛비처럼 강렬하게 내비친다. 햇빛을 머리에 이고 걷자니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진다. 아지랑이가 꿈틀거리는 필례계곡에는 사람들이 나무 그늘서 삼삼오오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필례계곡
필례약수
찰피나무
까치박달나무

 

숲속에 앉아 계곡을 흘러가는 물을 바라봤다.

굳었던 몸이 이완되면서 마음마저 차분해진다. 내 호흡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내 안의 계곡 속에 빠져들었다. 세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편안함이 나에게 찾아들었다. 맑은 물처럼 내 의식도 점점 맑아지고 있다.

이곳만큼 숨쉬기 좋은 장소도 없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숲을 이뤄 우거져 있고 맑은 계곡이 사시사철 흐른다. 무심코 쉬는 숨이 아니라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복식호흡을 해야 한다. 호흡에 집중하면 마음과 몸이 편안해진다.

 

5단 폭포

 

숲길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숲길 조사가 고되고 힘들수록 숲길을 더 놓은 길이 될 수 있다. 숲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숲 안을 들여다보면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이 지형이 험한 숲에 숲길 조사자의 열정이 더해지면 불가능할 것 같은 숲길 노선에 서광이 비치며 온기로 채워진다.

덤불 숲, 흔들리는 이끼긴 돌, 무더위,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 갈증, 산모기의 공격. 느릿느릿 움직이는 뱀, 모든 역격을 이겨내고 지금 내가 내딛는 걸음이 좋은 숲길이 된다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필례약수에서 바라본 귀둔리 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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