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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나만의 글쓰기/단편 글

by 배고픈한량 2022. 8. 2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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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일기예보는 적중했다.

새벽 4시쯤 세상을 환하게 만든 번개와 천둥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돌격, 앞으로라는 호령에 맞춰 비는 맹렬하게 세상을 향해서 돌진하는 중이다. 올여름은 아직 태풍은 오지 않았는데 폭우와의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상은 끈적끈적하고 습한 날들의 연속이다.

오후에 폭우가 할퀴고 간 화단을 정리했다.

물에 잠겨 썩은 쪽파를 뽑아내고, 키가 훌쩍 자라고 열매는 영글지 않는 방울토마토를 뽑아버렸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태풍도 안 왔는데 폭우의 위력이 대단하다. 평상시에 좋은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텃밭 겸 화단이기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올여름 폭우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자연에 순응하도록 요구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세상의 질서는 파괴되지 않을까? 위대한 자연 앞에 고개를 숙인다.

 

 

어둠 속에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선잠을 잔 것은 아니지만 몸이 찌뿌둥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묶은 후 화장실을 다녀왔다. 조카가 할머니 드시라고 사 온 순대를 어젯밤 늦게 막걸리와 먹었었다. 막걸리 한 대접이 새벽에 나를 깨운 것이다. 자다 깼는데 또 자기는 뭐하고 해서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을 읽는다. 새벽의 고요함은 책을 읽기에 더없이 좋다.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흐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으므로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한 것이다.”

 

 

열린 창문으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온갖 소음에 사로잡혀 사는 도시의 삶에 문득 찾아온 반가운 소리다.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오래된 단독주택이다. 텃밭이 있고 화분이 즐비하게 있는 넓은 마당이 있다. 텃밭에는 봄부터 심은 상추, 부추, 열무, 대파, 당근, 가지, 방울토마토, 고추, 쪽파 등이 자라고 있다. 30개가 넘는 화분은 각양각색의 꽃들로 마당은 언제나 녹음이 가득하다.

마당 한쪽에 자리 잡고 서 있는 터줏대감 감나무는 집을 보호하듯 그윽한 시선으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끔 새들도 찾아와 감나무 가지에 앉아 있곤 한다. 회색 도시 속 우리 집은 갈 곳 없는 풀벌레와 새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아늑한 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옛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나귀를 타고 눈 속에 피어난 매화를 찾아다니는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어딘가에 피었을 매화를 찾아 무작정 떠나는 옛 선인들의 운치와 멋을 엿볼 수 있다. 폭우 속에도 꽃은 핀다. 비록 굵은 빗줄기에 맞아 꽃잎이 시들고 강풍에 꽃대가 꺾여도 화분의 선인장 꽃과 란타나 꽃은 피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물을 주면서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처럼 폭우 속에 피어난 화분의 꽃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 순간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가지마다 꽃이 피어나는 모습과 색이 다른 꽃을 피우는 아름다움을 비로소 보게 되어 기쁘다.

 

 

뭉게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점심을 먹고 어머니 방 침대 정리를 시작했다. 지금보다 낮은 매트리스로 교환하는 작업이다. 한다고 다짐만 하다 며칠이 지났다. 이불과 베개를 걷어내고 무겁고 높은 매트리스를 들어낸다. 벽과 침대 틈의 먼지를 쓸고 걸레질을 한다. 캠핑용 매트리스를 가져와 공기를 넣고 침대 크기에 맞게 조절한다. 매트 위를 얇은 이불로 덮고 베개를 놓으면 침대 정리가 끝이 난다.

날을 흐리지만 바람은 시원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고 찬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 후 선풍기 바람을 즐기며 달콤한 수박을 먹는다. 막힌 코가 뻥 뚫리듯 수박의 시원함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간다. 이때의 여유로움을 오랫동안 즐긴다. 땀 흘린 뒤의 개운함은 이런 것이다.

 

 

장마전선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인다.

아침에 붉은 고추를 따다가 문득 여름은 다 지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연약해 보이는 가지에 빨갛게 물들어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를 보니 결실의 계절이 완연해졌다. 기나긴 장마 뒤에 한껏 부드러워진 햇살을 받으며 봄의 풋풋함과 여름의 신선함은 가을의 충만함으로 변해가고 있다.

연이은 폭우는 더위를 잊게 했다.

야생화같이 짧은 계절, 순식간에 계절이 변해가고 있다. 생각 없이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다 보니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을 오늘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다. 솔솔 불어오는 아침 바람은 가을임을 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진정, 가을이구나.

 

 

나무는 여름의 무성한 잎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가지가 잎 무게에 휘어질 정도로 수북하게 매달려 있다. 세월이 가면 무성하던 잎들이 맥없이 땅 위로 떨어질 것이다. 올여름엔 태풍이 오지 않았고 폭우 때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아서 잎들은 선명하게 물 들을 것이다.

오늘은 감이 4개나 마당에 떨어졌다. 지붕이나 마당에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내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떨어진 감을 보면 계절의 변화가 실감이 난다. 세월은 속절없이 빨리 흘러간다. 세월은 온다고 안 하고 간다고 표현하는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니 알게 되었다.

때가 되면 잎이 떨어지듯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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