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지 인근에서 휴식은 진정한 휴식이 아니다. 낯선 장소의 아름다움이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제공한다. 훼손된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고 재충전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여행도 삶처럼 몰아치듯 한다면 금세 지치게 된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삶의 고뇌는 힘을 뺀 채로 여유를 가져야 놓아버릴 수 있다. 성난 파도의 포효보다 잔잔히 흐르는 유연한 파도의 부드러움이 여행에서 더 필요하다. 몸의 힘을 빼고 마음은 가볍게 할 때 여행은 더 편안한 일상으로 다가온다.

 

미조항 조도호

 

탄산음료의 거품처럼 보글거리는 소리는 배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는 파도로 점철된다. 아무 데도 안 가보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알 수 없다. 여행 중에 경험하게 되는 생소한 분위기와 냄새가 부드러운 바닷바람처럼 좋다.

삶은 여행과 같은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설레고 흥분되어 잠도 이루지 못하지만, 여행길의 험난함과 마주치게 되면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게 된다. 미지의 세상으로 언제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은 여행과 같아서 더 애틋한 마음이 든다.

 

살고 싶은 섬, 호도

 

360도 주위를 살피며 섬 냄새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 다채로운 식생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호도의 야생화와 더불어 나무는 다른 나무와 똑같이 닮지는 않는다. 훈훈한 초록빛이라도 그 색깔이 다 다르다. 계절은 나무의 변화와 같다. 나는 변화하는 숲속에서 흘러가는 계절을 파악하려 애쓴다. 나는 자연과 유기적으로 얽혀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하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존재들이 있다. 자연은 늘 같은 모습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그 모습이 시시각각 변한다.

갯바위에 앉아 조도와 두미도를 바라보는 한적함이 좋다. 바다 공기를 마시면서 자연에 호흡을 맡긴다. 이 순간이 여행자로서 가장 좋아하는 명상과 사색의 시간이다. 세상살이에 빠져있을 때는 마음이 흐트러진다. 본래 타고난 밝은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옳고 깨끗한 생각을 하려면 마음을 차분하고 안정되게 해야 한다. 자연과 마주할 때는 언제나 명상에 빠져든다.

생각을 소유하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흘려보낸다. 그래야 집착을 버릴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는 여행지에서 자연에 몸을 맡긴 채 망중한을 즐기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명상에 전념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가꿔나가면 얼마든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

 

호도 여행의 화두(話頭)

 

바람이 부는 데로 떠다니는 구름은 신기하게도 풍경화 속 양 떼의 그림처럼 예쁘게 떠 있다.

새벽에 내린 비는 호도를 적시고 바다로 흘러갔다. 물은 물에서 나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이란 근원은 똑같지만 불리는 이름의 형태만 다를 뿐이다. 똑같은 물을 바라보면서 그 물이 다르다는 착각을 하고 세상을 살고 있다. 모든 자연은 궁극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간다.

갯바위에 서 있는 낚시꾼의 위태로운 상황만큼 수평선으로 점점 기울어져 가는 햇빛에 비친 바다의 윤슬은 그 어떤 빛보다 휘황찬란하다.

나에게 여행의 가장 큰 화두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찰나의 영원함

 

여행지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접하게 되면 처음 의도와는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한 걸음씩 걸어 다닌 길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흥미진진한 여행이 되는 것이다. 여행은 내가 서 있는 장소에 대해 찰나의 영원함을 매 순간 느끼는 것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고 싶다. 나는 언제나 미지의 장소를 보러 떠나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지난주 월요일, 남해 호도에 들었다. 이른 아침 미조항에서 막 배에 오르려는데 등에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배에서 내린다. 배를 타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사는 곳, 조도에 사는 아이들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호도는 미조항의 지척에 산다.

조그마한 포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해안 절애와 그래서 더 애틋한 기린초와 해국이 첫 마중을 한다. 섬에 들면 늘 마주하는 포구에 목멘 어선 한 척 없는 조그만 항에는 낚시꾼들 몇 명이 바쁘게 캐스팅을 해대고 있었다. 마을 쪽을 향해 난 콘크리트포장 길을 따라 길을 잡았다. 처음부터 가파른 비탈은 길을 이리저리 갈지자로 끌고 다니고, 두어 번의 모퉁이를 지나 마을 당산을 만났다.

 

마을에서 만난 첫 번째 사내에게 저간의 마을 사정과 숲에 있을 법한 옛길과 지명 등에 대한 질문을 두서없이 해댔다. 그는 끝없는 친절을 콘크리트 바닥과 허공에 마구 토해냈다. 더 물을 것이 없을 정도로 질문한 이상의 정보들을 얼굴이 벌게지도록 쏟아내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들 친절할까! 순박해서라고, 외로워서라고 말하지 말자. 그냥 그들과의 인연을 섬여행의 첫걸음으로 삼으면 족할 것이다.

사내와 헤어져 마을 길을 따라 10분여 남짓 걸었을까! 마을 길이 끝났다. 저만큼 아래에 검푸른 바다가 혹하고 다가온다. 아직은 호도의 바다를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급히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숲길로 접어든다. 남녘의 숲들은 늘 새로움으로 이방인을 맞는다. 흔히 보는 예덕나무며 광나무며 마삭줄 등속이 오늘도 반겨준다. 그런데 이 녀석은 뭘까? ‘! 모람이로구나!’ 오랜만에 보는 모람과 더불어 우묵사스레피나무, 섬노린재나무, 돈나무 등이 연속해서 우리를 맞는다. 반갑다.

그렇게 이어진 발걸음이 닫는 호도의 지명들이 예사롭지 않다. 보리마당, 스닷뽀닷, 청늘, 개발매밑, 코밧, 목넘, 진담, 뫼사니홈, 작은홈, 뜨뿌영, 기민장 그리고 서담늘홈 등등. 그 뜻을 알 수 없는 지명들이 연이어 다가온다. 아직은 공부할 것이 많다는 뜻이니 한편 기쁜 일이기도 하다.

 

이미 조성된 탐방로를 벗어나 본격적인 섬 탐사를 시작했다. 먼저 마을 당산 앞에 있는 골짜기를 따라 한달음에 능선에 올랐다. 그리고 작은홈으로 이어졌을 옛 바래길을 찾기 시작했다. 첫 번부터 만만치 않다. 우거진 숲과 가시덤불이 앞을 막는다. 그래도 쉽게 지치지 않는 내 미련스러운 고집에 오늘도 숲은 길을 내주었다.

작은홈에는 시원한 바람이 산다. 덤불과 싸우느라 흥건했던 땀들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등골이 오싹할 만큼 작은홈의 바람은 거칠게 온몸을 덮치고 들었다. 한참을 쉬었다. 지친 몸 하나 의탁하기도 힘든 급경사지에서 그렇게 한참을 쉬며 호도의 첫 속살인 작은홈과 교감하였다.

다시 길을 나섰다. 옛길의 흔적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늘 그렇지만 반복하는 만큼의 호기심이 거친 걸음을 앞으로 이끌고, 기어이는 숲을 벗어나는 길들을 찾게 된다. 뜨뿌영, 기민장을 지나 서담늘홈을 거쳐 다시 출발점인 마을 당산에 도착했다. 숲길을 걷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안도감에 잠시 다리쉼을 한다.

 

얼마쯤 쉬었을까! 다시 능선 삼거리에 올랐다. 이번에는 산봉우리를 따라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얼만큼이나 숲에 걸음 하지 않았던 걸까. 능선에는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럴 때는 지도와 감각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거친 바람의 친구인 섬의 능선에서 결코 만날 수 없는 커다란 상수리 고목과 너럭바위의 부처손 군락지 등을 지나, 기어이 옛 초소가 있던 가물여 앞에 다다랐다. 기암괴석과 바닷가의 연못과 바닷속 동굴과 거친 파도가 함께 사는 곳, 진담과 목넘으로 이어지는 가물여 앞바다는 단연 호도의 절경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옛 초병들의 흔적을 따라 목넘 골짜기에 다다를 무렵 길을 잃었다. 억지로 올라서면 밭 가생이로 올라설 수 있겠지만, 길이 아니었다. 그때, 마치 짱가라로 되는 양, 저만치 마을 길 위에서 어르신 한 분이 소리를 친다. 힘에 부치시는지 어르신의 목소리는 외마디 비명처럼 골짜기를 맴돌았다. “이리. 빠꾸. 건너.” “일리요? 계곡을 건너야 돼유? 식아, 너 내려오란다.” 어르신의 외마디와 몸짓에 위탁하여 길을 잡았다. 결국, 꼭 맞는 옛길을 따라 마을 길에 도착했다.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전에 어르신은 벌써 돌아서서 잰걸음을 옮겼다. 호도에 사는 강아지들도 이방인에게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꼬리를 흔들거나 살그머니 다가와 바라볼 뿐이다. ‘범섬이라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은 뜻도 모를 삶터와 가물여의 절경과 투박한 친절이 몸에 앉은 사람들이 사는 곳, 호도에 다시 와 볼 일이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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