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월요일, 남해 호도에 들었다. 이른 아침 미조항에서 막 배에 오르려는데 등에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배에서 내린다. 배를 타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사는 곳, 조도에 사는 아이들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호도는 미조항의 지척에 산다.

조그마한 포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해안 절애와 그래서 더 애틋한 기린초와 해국이 첫 마중을 한다. 섬에 들면 늘 마주하는 포구에 목멘 어선 한 척 없는 조그만 항에는 낚시꾼들 몇 명이 바쁘게 캐스팅을 해대고 있었다. 마을 쪽을 향해 난 콘크리트포장 길을 따라 길을 잡았다. 처음부터 가파른 비탈은 길을 이리저리 갈지자로 끌고 다니고, 두어 번의 모퉁이를 지나 마을 당산을 만났다.

 

마을에서 만난 첫 번째 사내에게 저간의 마을 사정과 숲에 있을 법한 옛길과 지명 등에 대한 질문을 두서없이 해댔다. 그는 끝없는 친절을 콘크리트 바닥과 허공에 마구 토해냈다. 더 물을 것이 없을 정도로 질문한 이상의 정보들을 얼굴이 벌게지도록 쏟아내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들 친절할까! 순박해서라고, 외로워서라고 말하지 말자. 그냥 그들과의 인연을 섬여행의 첫걸음으로 삼으면 족할 것이다.

사내와 헤어져 마을 길을 따라 10분여 남짓 걸었을까! 마을 길이 끝났다. 저만큼 아래에 검푸른 바다가 혹하고 다가온다. 아직은 호도의 바다를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급히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숲길로 접어든다. 남녘의 숲들은 늘 새로움으로 이방인을 맞는다. 흔히 보는 예덕나무며 광나무며 마삭줄 등속이 오늘도 반겨준다. 그런데 이 녀석은 뭘까? ‘! 모람이로구나!’ 오랜만에 보는 모람과 더불어 우묵사스레피나무, 섬노린재나무, 돈나무 등이 연속해서 우리를 맞는다. 반갑다.

그렇게 이어진 발걸음이 닫는 호도의 지명들이 예사롭지 않다. 보리마당, 스닷뽀닷, 청늘, 개발매밑, 코밧, 목넘, 진담, 뫼사니홈, 작은홈, 뜨뿌영, 기민장 그리고 서담늘홈 등등. 그 뜻을 알 수 없는 지명들이 연이어 다가온다. 아직은 공부할 것이 많다는 뜻이니 한편 기쁜 일이기도 하다.

 

이미 조성된 탐방로를 벗어나 본격적인 섬 탐사를 시작했다. 먼저 마을 당산 앞에 있는 골짜기를 따라 한달음에 능선에 올랐다. 그리고 작은홈으로 이어졌을 옛 바래길을 찾기 시작했다. 첫 번부터 만만치 않다. 우거진 숲과 가시덤불이 앞을 막는다. 그래도 쉽게 지치지 않는 내 미련스러운 고집에 오늘도 숲은 길을 내주었다.

작은홈에는 시원한 바람이 산다. 덤불과 싸우느라 흥건했던 땀들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등골이 오싹할 만큼 작은홈의 바람은 거칠게 온몸을 덮치고 들었다. 한참을 쉬었다. 지친 몸 하나 의탁하기도 힘든 급경사지에서 그렇게 한참을 쉬며 호도의 첫 속살인 작은홈과 교감하였다.

다시 길을 나섰다. 옛길의 흔적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늘 그렇지만 반복하는 만큼의 호기심이 거친 걸음을 앞으로 이끌고, 기어이는 숲을 벗어나는 길들을 찾게 된다. 뜨뿌영, 기민장을 지나 서담늘홈을 거쳐 다시 출발점인 마을 당산에 도착했다. 숲길을 걷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안도감에 잠시 다리쉼을 한다.

 

얼마쯤 쉬었을까! 다시 능선 삼거리에 올랐다. 이번에는 산봉우리를 따라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얼만큼이나 숲에 걸음 하지 않았던 걸까. 능선에는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럴 때는 지도와 감각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거친 바람의 친구인 섬의 능선에서 결코 만날 수 없는 커다란 상수리 고목과 너럭바위의 부처손 군락지 등을 지나, 기어이 옛 초소가 있던 가물여 앞에 다다랐다. 기암괴석과 바닷가의 연못과 바닷속 동굴과 거친 파도가 함께 사는 곳, 진담과 목넘으로 이어지는 가물여 앞바다는 단연 호도의 절경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옛 초병들의 흔적을 따라 목넘 골짜기에 다다를 무렵 길을 잃었다. 억지로 올라서면 밭 가생이로 올라설 수 있겠지만, 길이 아니었다. 그때, 마치 짱가라로 되는 양, 저만치 마을 길 위에서 어르신 한 분이 소리를 친다. 힘에 부치시는지 어르신의 목소리는 외마디 비명처럼 골짜기를 맴돌았다. “이리. 빠꾸. 건너.” “일리요? 계곡을 건너야 돼유? 식아, 너 내려오란다.” 어르신의 외마디와 몸짓에 위탁하여 길을 잡았다. 결국, 꼭 맞는 옛길을 따라 마을 길에 도착했다.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전에 어르신은 벌써 돌아서서 잰걸음을 옮겼다. 호도에 사는 강아지들도 이방인에게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꼬리를 흔들거나 살그머니 다가와 바라볼 뿐이다. ‘범섬이라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은 뜻도 모를 삶터와 가물여의 절경과 투박한 친절이 몸에 앉은 사람들이 사는 곳, 호도에 다시 와 볼 일이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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