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첫 주말이다.

한주만 더 지나면 추석이다. 명절을 앞두고 즐거워야 할 세상은 구겨진 종잇조각처럼 뒤숭숭하다. 경기침체도 침체지만 여름내 조용했던 태풍이 명절을 앞두고 북상을 하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힌남노이다. 각가지 뉴스매체는 연신 역대 최고의 강풍을 동반한 태풍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추라고 당부하고 있다. 또한, 제주 서귀포로 진입할 태풍 힌남노의 경로는 여수, 통영 등 남해안을 통과한 후 경주, 포항, 울산 등을 거쳐 울릉도 인근 동해안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일요일 오후.

점심을 먹자마자 집을 나왔다. 내일이면 우리나라가 직접적인 태풍 영향권에 들어서기 때문에 주변을 돌아보고 싶었다. 걷는 것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게 더 멀리까지 가볼 수 있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니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층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주변 녹음이 한층 더 짙어진 하천 변 자전거길을 통해 이동한다. 도심지를 벗어나니 공기의 냄새가 평소와 사뭇 다른 느낌이다. 공기에 물비린내가 짙게 묻어있다. 세상은 고요하고 하천의 물 흐르는 소리는 오늘따라 더욱 애달프게 들린다. 자전거를 타고 30여 분만에 계룡산 수통골에 도착한다.

 

 

서서히 잿빛 구름이 몰려든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아서 옷은 이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수통골 주차장은 만차다. 등산객과 인근 식당 이용객들이 많다 보니 주차장은 언제나 차산차해를 이룰 수밖에 없다. 태풍이 오기 전 조금이라도 여가를 더 보내려는 사람들로 수통골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수통골까지 온 김에 빈계산, 금수봉, 도덕봉 종주는 시간관계상 안 되고 가까운 빈계산만 올라갔다가 오려고 생각 중이다. 자전거를 주차장 한쪽에 세우려 하는데 잘 안된다. 공공자전거라 전용구역 외에 반납처리가 되지 않았다.

 

 

자전거를 재대여하다.

복잡한 수통골을 벗어나 한밭대 정문에서 공공자전거를 반납하고 바로 재대여한다. 대전 공공자전거 타슈는 1시간 이내에 반납하면 무료로 다시 재대여할 수 있다. 작년까지는 매해 1년 회원권(30,000)을 구매하여 이용했었다. 올해부터 앱도 바뀌고 자전거도 바뀌어서 더욱 편리하게 이용 가능해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자전거가 예전과 비교해 턱없이 적다는 점이다. 다시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이적까지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로 다니며 1시간 동안 자전거를 알차게 타려고 한다.

 

 

광수사에 왔다.

수통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한불교 천태종 힐링 행복 도량이다. 나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보다는 불교가 조금 더 친숙하다. 세계와 나를 따로 구분하는 이원론보다는 세계와 나는 하나인 일원론을 더 믿는다.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一切唯心造).

포대화상은 대 자유인이다.

긴 막대기에 포댓자루 하나 둘러메고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는 얼굴로 세속 모든 이들과 분별없이 어울리며 불법을 전하고 탁발한 모든 것을 어려운 중생에게 나누어주며 무애(無碍)의 삶을 살았다. 자연과 함께 행()하고 자연으로 돌아간 걸림 없는 대 자유인이다.

 

 

거리를 누비다.

자전거는 도로를 건너고 새로 구획정리가 된 주거지구의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대부분 비슷한 형태의 건물들이지만 간혹 한옥도 있고 특이한 모양의 건물도 있고 넓은 자연공원도 있다. 간판을 대충 눈으로 훑어보다 특이한 이름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들녘은 아직 푸르다.

하천의 제방길을 따라간다. 왼쪽은 하천이 흐르고 오른쪽은 드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밭도 있고, 논도 있고, 과수원도 있다. 들녘에는 아직 익지 않은 초록의 벼가 물결치듯 출렁거린다. 자전거를 멈추고 논에 가까이 가본다. 낱알은 아직 여물지 않았지만 벼는 벌써 고개를 숙이려고 한다.

 

 

세상은 변한다.

제방길은 어느새 좁은 마을 길로 이어진다. 재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여러 가구 수가 살았던 곳인데 지금은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내 키보다 두 배나 높은 담벼락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얗던 담벼락은 거무칙칙한 그을음으로 얼룩져 있고 그 아래의 하수도에 매캐한 시궁창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나무만이 그대로 서 있다.

모두가 떠나고 황폐해지어 버린 그곳에는 여전히 나무가 서 있다.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한층 더 성장해 잎을 피웠고 한낮의 태양을 가려 그늘을 마련해주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오늘처럼 구슬프게 들리는 건 왜일까? 이번 태풍에도 부러지거나 뽑히지 않고 잘 버텨주기를 간절히 빈다.

 

 

비가 내린다.

주말은 어찌어찌 버텨내더니만 결국 월요일이 되어서 비가 내린다. 아직은 간접적이긴 하지만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서고 있다는 증거다. 대전은 중부지방이고 내륙이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태풍의 영향이 크지 않을 것 같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이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분주하다.

물에 불린 쌀을 빻아다 냉장고에서 숙성을 시킨 후 반죽을 시작한다. 요즘 집에서 송편 빚는 집이 있을까? 우리 집은 명절날이면 아직도 떡을 직접 빚는다. 시중에 파는 떡은 별로 안 좋아하셔서 번거로워도 집에서 직접 빚는다. 나는 떡을 잘 안 먹는데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떡을 다 좋아하신다. 솔잎과 함께 쪄진 송편이 오늘따라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어둠이 찾아왔다.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낙숫물이 처마를 타고 대야에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있다. 비 오기 전의 후텁지근함은 어느새 싸늘함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의 커다란 고함을 들으며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아침을 기다린다.

새벽 5.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습관적으로 알람을 끄고 불을 켠다. 날이 밝으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간밤에 발생한 일들이 궁금하여 텔레비전 전원을 켠다. 매체는 연신 태풍 속보를 방송하고 있다. 예상했던 태풍의 위력보다는 약해졌다지만 태풍이 동반한 강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남쪽 해안가보다 동풍이 발생한 경주 포항의 피해가 훨씬 더 컸다. 태풍 힌남노는 오전 7시를 지나 동해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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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가 지났다.

돌풍이 바람의 방향을 순식간에 변화시키듯 계절은 여름을 지나 겨울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아직 8월 하순이지만 아침저녁의 체감온도는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창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를 켜놓고 잤었는데 지금은 창문을 닫고 얇은 이불로 배를 덮고 잔다.

 

새벽 5.

어김없이 알람이 울린다. 2주 전에 바꾼 핸드폰 알람 소리가 익숙하지 않지만, 몸에 밴 습관은 나를 깨우기 충분하다. 확실히 어둠은 색이 더 짙어졌고 길어졌다. 커피포트의 전원을 켜놓고 밖으로 나온다. 아직 뽑지 않은 고추와 새로 파종한 씨앗에 물을 준다. 여름만큼 충분히 물을 주지 않아도 촉촉하게 대지가 젖어 든다.

 

커피를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믹스를 큰 머그잔에 타 먹는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김에서 달콤한 향이 코를 찌른다. 뜨거움을 조금이라도 식히려고 호호불어가며 머그잔에 입을 대었다 떼기를 반복한다. 나른한 몸을 일순간에 깨우는 달콤함이 혈관을 타고 흘러 구석구석 퍼져나간다.

 

벌초 날이다.

아침의 느긋함은 해가 뜨고 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뭇국에 밥을 말아 먹고 낫 2, 갈고리, 소주, 담배, 육포, , 음료수, 빵 등 준비물을 챙기기 시작한다. 어제 오후에 녹슨 낫을 열심히 숫돌에 갈아 두었다.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등산화를 신으면 벌초 준비는 끝이 난다.

 

 

고속도로를 달린다.

집에서 불과 1시간의 거리이지만 이른 아침부터 고속도로는 정체가 시작된다. 지금은 용담댐으로 수몰되어 마을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지만, 선조의 혼이 서린 지역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금산에서 용담댐 수문을 지나면 한적한 도로가 계속된다. 작년의 홍수피해로 방류를 많이 했는지 댐의 수위가 한결 낮다는 느낌이 든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는 곳이라 지금도 그 여운이 남아있다. 창을 여니 자취를 감춘 봄의 벚꽃 냄새가 살며시 다가오는 듯하다. 오늘의 집결지인 월계교가 눈앞에 보인다.

 

칡덩굴을 뚫고 나가야 한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올해는 유독 칡덩굴이 무성하다. 낫으로 칡덩굴을 끊어가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칡덩굴에 가려져 있던 찔레나 초피나무 가시가 피부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칡덩굴을 낫으로 끊는 순간 내 등을 강렬한 무엇인가가 찌르기 시작한다. ‘아 따가워.’

 

벌침을 맞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칡덩굴 사이 어딘가에 벌집이 있다. 제트기가 굉음을 내며 하늘로 치솟듯 갑자기 벌떼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도망가라는 짧은 비명과 함께 우리는 달리고 달려 다행히도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벌에 쏘이지 않았다. 길로 나와서 벌에 쏘인 곳을 확인한 후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월계교 옆 수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 후 댐수위 위쪽으로 우회한다. 우여곡절 끝에 할머니 산소에 도착한다. 예년과 비교하면 봉분의 피해는 상당히 적어 다행이다. 벌초한 후 성묘를 마치고 할아버지 산소로 이동한다. 다니던 능선길이 아닌 계곡 부로 질러간다. 청미래덩굴과 초피나무를 제외하곤 이동하는 데 방해물이 없어 손쉽게 도착한다. 성묘를 먼저 한 후 다시 30여 분간의 벌초를 한다. 잡풀로 무성했던 산소가 깨끗하니 내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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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연구용역 보고서를 쓰고 있다.

‘00000 지역 활성화 전략수립이라는 제목이 막막해서 참고문헌을 많이 준비했지만, 현장자료가 부실하다. 일주일 동안 보고서를 끝내보려고 도서관과 집을 오가며,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할 것 없이, 자료를 토대로 현황을 분석하고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쓰고 있다. 처음 노트북 모니터를 마주했을 때 막막하기만 했다. 기승전결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할지 생각은 넘쳐나는데 뒤섞여 있어서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니 자판을 두드리는 손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시간은 폭포처럼 흘렀지만 글쓰기는 민달팽이가 움직이는 속도만큼 더뎠다.

조급히 쓸 수 있는 보고서가 아니기에 끈기를 가지고 노트북 앞에 진득이 앉아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분량을 조금씩 쓰면서 글발이 생겼고 언제 끝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갖지 않게 되었다. 낮에는 백색소음에 시달리고 깊은 밤에는 풀벌레의 구슬픈 속삭임을 들으며 새벽 2시쯤 보고서를 끝냈다. 일주일이 걸렸다. 아직 완성도가 높은 보고서가 아니라서 회의를 통해 수정·보완해 나가야 한다.

 

글쓰기에 집중하다 보니 정신이 자주 멍해졌다.

보고서는 자유로운 글쓰기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온 정신을 장기간 집중해서 쓴 것에 만족한다. 짧은 글을 매일 쓰고 있지만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매일 글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표한다. 홀가분하게 책을 읽거나 메모지에 글을 끄적거리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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