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이 온 것은 어제 오전 910분이었다. 2월도 오늘이 지나면 하루밖에 남지 않는다. 세월의 흐름이 연령대의 속력으로 흐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의식하면서도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서서히 곪아가는 종기 같은 내 마음을 한순간에 해방해준 카톡이 그런 순간에 온 것이다.

말보다는 행동이 빠른 나이기에 순식간에 모든 것을 결정했고 일정을 조율했다. 삼일절 연휴가 코앞이지만 어렵사리 왕복 기차표를 예매했고 내일 묵을 여수 숙소도 예약했다. 멈춘 것 같은 심장이 다시 요동치며 뛰기 시작했을 때의 쾌감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세심하게 계획된 여행도 좋지만, 때론 갑작스럽게 떠난 여행이 삶에 더 많은 활력소를 준다. 자 떠나자. 매화가 활짝 핀 남쪽 섬으로. 이제 남은 건 백패킹 배낭을 꾸리는 일만 남았다.

 

 

가슴이 설레는 아침이다. 이것저것 백패킹 장비를 찾느라 아침부터 분주히 집안을 돌아다녔다. 텐트, 침낭, 우모 복, 매트, 탁자, 의자, 버너, 코펠, 가스, 랜턴, 핫팩, 위스키, 견과류, 라면, 햇반, 김치, 고추 절임, 커피, 세면도구를 방에 늘어놓고 테트리스 오락게임을 하듯 배낭에 차곡차곡 넣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소일거리삼아 집에 필요한 식재료를 사기 위해 두 곳의 마트를 다녀왔다. 하늘은 점점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후 여수로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이런 짐이 하나 더 늘겠는걸.

큰 배낭을 메고 우산을 쓴다는 것은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일 한가한 오후였지만 지하철은 이상하리만치 사람들로 북적였다. 집을 나온 지 40분 만에 서대전역에 도착했고 다시 40분을 기다리고 나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연휴 전날이라 기차는 만석이었다. 다행히도 어제 기차표를 급하게 예약할 때 앞 좌석을 선택할 수 있어 큰 배낭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서대전에서의 짧은 정차를 마친 여수행 무궁화호 1503은 소름 돋을 정도로 큰 쇳소리를 내면서 출발했다. 3시간 4분간의 긴 장편 영화를 보는 이제 막 보기 시작한 듯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점점 빠르게 사라지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바뀐 것은 구례구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기찻길 주변으로 매화가 봄을 알리듯 활짝 피어있었다.

 

 

여천역에서 내렸다. 비가 내려 해가 지기 전인데도 어스름이 깔린 분위기였다. 큰 배낭을 메고 우산을 쓴 채 빗속을 걸었다. 오늘 묵을 모텔은 여수시청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2km 남짓을 직진만 하면 된다. 버스를 탈 때 수반되는 기다림, 버스 내 공간확보, 도로정체를 겪는 것보다 육체적으로는 힘듦을 선택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체크인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진남시장으로 향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왔다식당으로 향했다. 뜨끈한 내장국밥에 여수생막걸리까지 배부르게 저녁을 먹었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비가 그친 상태였다. 어둠이 장악한 세상에 항거라도 하듯 여수 거리는 밝은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수시청 옆 골목의 밤 경치는 휘황찬란했다. 날씨는 온화했고 산책하듯 골목을 걷다 보면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선소유적지 안내판을 봤고 자연스레 발걸음이 가막만 최북단으로 향했다. 이곳은 고려 시대부터 선소마을을 형성하여 배를 만들었던 장소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순신 장군이 나대용 장군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이다. 또한, 뒤로는 병사들의 훈련장과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망마산이 자리한 천혜의 요새이다. 밤이라 인적이 없어 더욱 쓸쓸한 선소유적지, 배를 매어두던 계선주가 있는 자리에서 바라본 야경이 아름다웠고 지금도 그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가 다시 모텔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8시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603호 문을 열었을 때 온몸으로 느껴지는 온기는 나를 둘러싼 모든 액운을 스르륵 녹여버렸다. 간단한 샤워 대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몸을 담갔다. 하루의 피로를 푸는 순간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기분은 오늘 없었다. 모텔의 온돌방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요를 깔고 최후의 만찬을 즐기듯 몸을 지진다. 이때까지 몇 시간 후에 찾아올 기상변화를 짐작하지 못했다.

 

어젯밤 문자 한 통이 왔다. 늘 오는 스팸 문자겠지.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대학 동기의 모친상 부고 문자였다.

죽음. 50대인 나에게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하나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잠들기 전에 수원행 기차표를 예약했다. 30년 전에 가본 수원은 내 기억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오후 126분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기차는 만석이었고 각자의 목적지에서 내리고 새롭게 타는 사람들이 반복될 뿐이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영어회화를 들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눈 쌓인 풍경에 가끔 눈을 돌렸다.

수원역을 벗어나자 정면으로 쭉 뻗은 도로가 펼쳐졌다. 버스를 타지 않고 양지바른 길을 따라 그냥 걸었다. 한파가 막바지라서 음지는 엄청 추웠고 점퍼가 아닌 외투를 걸친 나는 더 추위를 느꼈다. 20여 분을 걸었을 때 팔달문과 마주했고 아무 생각 없이 팔달산을 올랐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서장대에서 수원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성벽을 따라 화서문과 장안문을 지나 화홍문까지 왔다. 성벽 길을 내려와 방화수류정을 감상하고 하천길을 따라 걸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430분이었다. 천천히 성빈센트병원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조의금 봉투를 쓰고 8호실로 향했다. 방명록에 서명하고 조의금을 조문함에 넣었다. 상주 자리에 상주가 없어 기다리다 조문객과 이야기 중인 상주를 발견했다. 어색하지만 조문객과 상주의 예를 갖추고 조문을 마쳤다. 저녁을 먹고 혼자 소주를 마시면서 빈소에 남아 있었다. 일가친척을 제외하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끔 두세 명의 지인들이 찾아왔다. 점심때 대학 동기 2명이 다녀간 것을 제외하고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어색한 것보다는 오랜 시간 뻘쭘하게 혼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싫었다.

인터넷의 발달은 조문 방식도 바꿔놓았다. 먼 거리이지만 마음을 내어 찾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는 이미 지난 것 같다. 요즘은 많은 사람이 계좌에 조의금을 이체하고 카톡으로 조의를 표하고 있다.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일련의 행동들이 과연 인간관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담배 피우러 나가자는 상주의 말에 밖으로 나왔다. 그때가 오후 730분이었다. 상주가 담배를 피우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무거웠다. 세상은 네온사인이 어두워진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거리의 인파를 지나 수원역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낯선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쓸쓸한 기분을 음악으로 달래며 밤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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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새벽 5. 이불 밖을 벗어났을 뿐인데 온몸이 서늘하다. 비가 내렸고 그 비가 눈으로 변했다. 그리고서 겨울다운 한파가 찾아온 것이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던 보일러를 가동한다. 화장실 입구 왼쪽 벽면에 있는 전원을 어둠 속에 누른다. 문을 열고 화장실 불을 켠 후 보일러 스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길게 뻗은 연통이 용트림하듯 큰 소리를 내지며 보일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마치 뱃고동 소리처럼 새벽하늘에 우렁찬 외침으로 절규한다.

엄마 방으로 간다. 어둠 속에 텔레비전이 켜져 있고 이미 깨어 있는 엄마는 밀크커피를 마시고 있다. 방 안 공기에는 달곰한 커피 향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듯 내 코를 자극한다. 포트에는 이미 끓은 물이 있다. 방 불을 켜고 나도 커피를 탄다. 잠자느라 당이 떨어졌는지 입에 대기도 전에 냄새에 푹 빠져버린다.

 

오늘은 일찍 집을 나선다. 크리스마스 때에 맹추위가 기성을 부리다 연말이 되면서 따듯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해가 바뀐다는 것은 50대에 들어선 나에게 죽음이 한 발짝 더 다가왔다는 의미이다. 삶 속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내 삶을 더 충만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육체가 움직일 수 있을 때 마음이 원하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게 나이니까.

한파가 지나고 기온이 예년 기온을 회복한 것 같다. 아침을 먹고 배낭에 이것저것을 챙겨 넣는다. 오랜만에 계룡산을 갈 생각이다. 107번 버스를 타고 동학사정류장에 왔다. 주차장과 도로에는 눈이 쌓여 있다. 터벅터벅 도로를 걷는다. 오늘은 동학사로 가서 천정골로 하산할 생각이다. 구름이 점점 산을 집어삼키고 있다. 나는 점점 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동학사를 지나 등산로 초입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쉼 없이 걷는다. 물도 먹지 않고 쉬지도 않고 정상까지 한 번에 올라간다. 주차장에서 관음봉 정상까지 정확히 1시간 30분이 걸렸다. 오랜만에 산행의 짜릿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구름에 휩싸인 산은 나를 지워버리고 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전에 하산을 시작한다.

바람은 구름을 뚫고 갑사에서 불어와 산릉을 넘어 동학사로 향한다. 올해의 온갖 사연들이 바람에 실려 와 상고대가 피어있는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내 마음을 세차게 때린다. 시계가 없어 삼불봉을 오르지 않고 남매탑으로 내려간다. 허기진 배를 전투식량으로 채우고 천정골로 하산을 한다.

 

요즘 하루가 신난다. 올해가 가기 전에 여행준비를 마치려고 한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독일로 유럽여행을 갈 계획이다. 아직 5개월도 더 남았지만, 하루하루가 설레는 기분이다. 일정을 계획하고 세부적인 것들을 알아보는 과정이 재미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에 애정을 쏟는다는 것은 삶의 활력을 준다. 그 뭔가가 난 여행이니까 더 좋다.

이제 하루 남았다. 정확히 12시간 30분 남았다.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는 건가? 스스로가 분주해진다. 내년도 계획도 세우고 올 한해를 정리해야 한다. 할 일이 많은데 머리는 쇠망치에 맞은 듯 띵하다. 차분차분 한가지씩 저리를 해야 하는데. 내년에는 화려한 한량이란 신조로 현실의 비루한 한량을 벗어나 보자.

 

비가 내린다. 2023년의 마지막 날이라 구슬피 우는 건가? 아니면 묵을 때를 씻어버리고 싶은 마음인가? 세상은 고요한 적막이 어둠과 함께 찾아왔다. 가로등 불빛이 대로에 띄엄띄엄 희망의 빛을 발산할 때 그곳에서 한줄기 비가 불빛을 가른다. 오늘은 저무는 해를, 내일은 떠오르는 해를 기다릴 테지. 그게 인생이다.

 

Good By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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