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작심삼일이란 단어는 없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듯이 새해 다짐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2010년 이후부터 시작된 나의 습관들이기가 이제야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 같아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
새해 첫걸음은 울진이다.
작년에도 5월에 울진에 갔었는데 해마다 한 번씩은 꼭 울진에 가는 것 같다. 이상하리만큼 포근한 날씨에 당황한 1월 8일 오후 2시 30분, 검은색 승용차는 아우토반을 달리듯 울진을 향해 고속도로 내달렸다. 울진까지 가는 길 자체도 막힘이 없었다.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다 빨아들이듯 사위가 맑고 투명한 오후였다.
밤의 어둠은 어제처럼 흘러갔다.
나는 어둠의 끝자락 속에 아침을 먹었고 앞으로 나흘 동안 가야 할 장소를 지도에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왕피천을 따라 걸었다. 마을을 지났고 농로도 걸었으며 징검다리를 통해 하천을 건넜다. 그러다 불영계곡에 들어섰다.
불영계곡의 가장 친한 동반자는 물과 바위였고 그늘진 곳은 얼음이 물을 대신하고 있었다. 계곡 안에는 맑고 투명한 계곡물과 더불어 청량하면서도 야릇한 무언가가 깊숙이 숨어 있는 듯했다.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감 가득한 자연의 색감에 고요함까지 더해져 색상의 변화가 그늘에서도 강렬한 힘을 드러냈다.
불영계곡은 거대한 얼음 바다였다.
얼음 바다 위를 걷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얼음 바다에는 작은 돌들이 드문드문 솟아 있었고 그것은 파도의 흰 물거품처럼 잔잔하게 이어졌다. 계곡 바람은 나를 겁주듯이 격렬하게 불어댔다. 내 걸음은 바람에 전혀 위협을 받지 않을 만큼 당당했다.
물은 쉬지 않고 흘렀다.
겨울이라 물의 형태가 고체로 변해 때론 검박하게 때론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꼬부랑 계곡을 따라 흐름을 멈추지 않고 얼음 아래로 자유롭게 흘러가 버리는 계곡물은 대지의 생명줄이다.
물 말고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깊은 산속 골짜기를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물줄기의 시원함과 전기가 오는 듯한 짜릿함을 몸소 체험했다. 얇은 개울을 건널 때 조심스럽게 한 발 내딛는 발걸음에서 전해지는 상쾌함은 어느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이태백이 술에 취하듯 나는 계곡에 취했다.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운 이곳은 산속에 자리를 잡은 좁디좁은 계곡이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고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며 유유자적 지내기엔 내가 사는 도시보다 훨씬 좋았다.
탈출로는 그곳밖에 없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계곡의 폭포와 깎아지른 듯 서 있는 바위산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 순간 길 없는 불영계곡에 서 있는 나를 보았고 흐르는 계곡물을 보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산허리를 지나는 예전 36번 국도를 올려다본 것이다.
얼어버린 계곡물 사이로 드문드문 놓여있는 바위를 밟고 건넜다. 가파른 암벽 사이에서 국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지점을 찾았다. 젖먹던 힘까지 손과 발끝에 모아 조심스럽게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국도의 안전울타리를 뛰어넘는 순간 위험을 벗어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는 얼마간 국도를 걸었다. 다른 길이 없기도 했고 차량까지 갈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닥친 현실을 더욱 맑고 밝은 눈으로 들여다보며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또다시 불영계곡에 올 거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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