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4도였는데 춥지 않았다.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잤다. 텐트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제 아침과 같은 강풍은 불지 않았다. 세상은 하루 만에 평온을 되찾았다. 어두컴컴한 세상에 새벽 어스름이 깔린 바다는 적색 편광이 돌산도 위로 멋지게 퍼져나간다. 노지 야영의 가장 좋은 점은 온전한 자연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의 모습,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파도의 생성과 소멸,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색채의 웅장한 변화를 어떤 장벽도 없이 관조할 수 있다.

갑자기 배가 아팠다. 자연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 잰걸음으로 백야 선착장 화장실까지 갔다. 어둠의 보자기에 싸여있던 고요한 마을이 새벽부터 소란스러웠다. 일단 급한 볼일을 해결하고 백야도 여객선 대기실로 향했다. 환하게 불 밝힌 대기실 문을 열었을 때 따뜻한 공기가 나를 맞아주었다. 오늘은 배가 뜨는구나!

야영지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무엇보다도 배가 뜬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여유롭게 1155분 하화도행 두 번째 배를 타기로 했다. 야영지에서 철수하기 전에 물을 끓여 커피를 마셨다. 커피 한 잔의 여유, 그래 이 맛이지. 야영 후 마시는 커피가 가장 맛있다.

 

 

 

백야 선착장에 차를 주차하고 백호산으로 향했다. 백야도는 흰 섬이란 뜻이다. 섬의 주봉인 백호산 정상 바위들이 하얀색을 띠어서 섬이 하얗게 보인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등산로 1구간으로 백호산에 올라 등산로 2구간으로 하산하는 3.8km 구간을 이용하였다.

웅장한 삼나무 숲길을 지나니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급경사지를 한동안 오르다 보니 더위가 느껴졌다. 백야 선착장과 저 멀리 돌산도가 보이는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성두는 더웠는지 여러 겹 껴입은 옷을 벗었다. 잠깐의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산을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계가 확 트인 바위가 나타났다. , 기분 좋다. 백야대교, 힛도, 그리고 어제 우리가 야영했던 장소도 눈에 들어왔다. 세상은 높은 곳에서 멀리 보아야 훨씬 아름답다.

1봉에 올랐더니 주변 바위에서 하화도가 가깝게 보였다. 3시간 후면 저곳에서 하루를 보낼 곳이기에 더 정감이 갔다. 그 뒤로 희미하게 나로도도 보였다. 능선 주변에는 어느새 진달래 꽃봉오리가 맺혔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봄은 우리 곁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능선을 따라 제2봉과 제3봉을 거쳐 등산로 2구간으로 하산을 했다.

 

 

매표를 마치고 하화도행 태평양 3호를 탔다. 16개월 전 개도에 갈 때 이 배를 탔었다. 그 당시 태풍의 영향으로 배가 뜨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사선을 타고 백야도 선착장으로 나왔었다. 이번에도 제도, 개도를 거쳐 하화도로 간다. 뱃길이 낯설지가 않았다. 배가 개도에 닿았을 때는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흐뭇했다. 배는 개도 북서쪽을 반시계방향으로 움직이며 출발한 지 40여 분 만에 하화도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야생화 공원으로 이동했다. 다른 섬에 비해 이동 거리가 짧아서 좋았다.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공원 잔디밭에 야영지를 구축했다. 캔맥주 한잔의 여유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저녁은 섬 식당에서 사 먹기로 하고 점심을 간단히 해결했다. 그러는 동안 침낭과 우모 복을 따스한 햇볕에 널어놓았다.

와쏘식당에 저녁 예약을 했다. 선착장에서부터 유유자적 꽃섬길을 걷기 시작했다. 계절상 꽃을 볼 수는 없었지만, 꽃 대신 주변 풍광을 눈에 담고 향기 대신 바닷내음을 품에 안았다. 꽃섬길을 따라 조성된 여러 조형물과 관목 조림지를 보고 가슴이 탁 막혔다. 특히 꽃섬다리(출렁다리)와 데크는 천혜의 자연자원에 대한 최악의 테러행위였다. 능선에서 바라본 섬섬옥수 같은 섬들의 아름다운 모습만이 위안이 되었다.

 

 

 

이른 저녁을 먹으러 예약한 와쏘식당에 들어섰다. 당연히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메뉴 선택에 대한 권한도 없었다. 주인장이 내어주신 서대회정식에 개도막걸리를 마셨다. 오후 7시가 막 지났을 뿐인데 섬의 밤은 더욱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섬 밖으로 하늘이 어두워졌다. 밤이 점점 깊어갔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체 야영지로 돌아왔다. 섬에서의 밤은 또 다른 세계처럼 인식되었다.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가시거리에 있는 섬들도 깊은 잠자리에 들었다. 깨어있는 것은 섬마을에 설치된 조명시설뿐이었다.

섬은 도시의 모든 소음에서 벗어난 곳이다. 그래서 섬은 적막감이 감돌았지만 잠을 자야만 한다는 게 더 아쉬웠다. 그런 나를 섬 공기가 부드러운 감싸 안으며 보호해줬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많은지 별은 잘 보이지 않았다. 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내가 보는 세상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의자에 앉아 시간의 흐름에 항거했다.

어둠은 더욱 칠흑 같은 밤으로 변했다. 나는 텐트에 들어갔다. 텐트 밖의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와 바람에 흔들리는 텐트에 명암을 드리웠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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