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가득한 아침이다.

음울하고 축축한 날씨가 이어지는 동안 거친 비바람 속에서 지내온 내 몸이 제일 먼저 반응하고 기분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맑은 하늘을 본지도 오래된 듯한 느낌이다. 청명한 하늘은 내 안의 우울한 감정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곶자왈에 들어서면 녹음이 드리워져 있고 위에는 큼지막한 나무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나뭇잎은 바람에 살랑거리고 상쾌한 공기는 내 몸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간다. 우거진 수관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어둠과 균형을 이룬다. 곶자왈에는 난대와 온대 수종이 함께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푸르른 잎을 가득 채운 곶자왈은 어떠한 시련도 이겨내고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산책길에서 곶자왈을 바라보면 싱그러움이 가득한 이끼와 초록의 잎사귀들이 지표를 뒤덮고 있다. 이런 곶자왈을 걷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감각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들을 순식간에 찾아낸다. 곶자왈 어느 지점에서 꽃을 피운 투구꽃을 발견했을 때처럼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한 일상이 작은 즐거움으로 가득 찬다. 즐거움을 양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즐거운 일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아무 볼품없는 도시 거리보다는 곶자왈이 훨씬 흥미 있고 가치 있는 장소이다.

 

여기는 큰지그리오름이다.

넓은 곶자왈 저편에는 완만한 산등성이의 여린 오름 곡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곶자왈은 평평하고 넓은데 오름에 가깝게 다가오니 날이 선 칼날처럼 경사가 급하다. 걷는 속도에 완급조절을 하고 리듬감을 살려 오름에 올라선다.

심장이 요동치고 호흡은 거칠지만, 확 트인 시야에 아늑함을 느낀다. 저 멀리 사람이 길게 엎드려 있는 듯한 한라산의 곡선에선 느슨함을 느낀다. 이곳의 조망은 보는 방향에 따라, 시각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 느낌과 아름다움이 다를 것이다.

가을 햇볕은 따스하다기보단 뜨겁고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는 풀벌레를 유혹이라도 하듯 흐느껴 울어댄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경험한 만큼만 느낄 수 있다.

 

구름이 많이 낀 맑은 날이다.

오름에서 내려와 다시 곶자왈을 되돌아 걸어간다. 휴양림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탄다. 왼쪽 창가 자리에 앉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본다. 한적한 버스는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포장도로를 막힘 없이 내달린다. 순식간에 종점에 도착한다.

서귀포다. 뚜벅뚜벅 인도를 걸어간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을 때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다. 1인용 식탁에 앉은 후 주문을 한다. ‘순대 백반하고 막걸리 주세요늦은 점심을 먹는다. 허기진 위장을 가득 채울 때까지.

저녁 찬거리를 산다.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을 둘러본 후 버스를 타고 다시 야영장으로 간다. 이미 해는 서산으로 기울었다. 잔디밭 야영데크에 자리한 사람들은 이미 불을 밝히고 있다. 야영장 도로에 설치된 조명 빛에 의지한 체 원두막으로 걸어간다. 그곳에는 내 손톱만큼 자란 초승달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밤은 외롭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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