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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 맛집/제주도

9월 제주여행

배고픈한량 2024. 9. 25. 17:41

 

 

그건 홀연한 출현이었다.

50여 분 동안의 짧은 비행이 나에게 준 것은 실로 엄청났다. 한 번의 큰 충격에 이은 마찰음은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했다는 증거였다. 하늘에서 마주한 뜨거운 햇살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제주국제공항은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자 제주 하늘은 먹장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빗방울이 한두 방울 후두두 쏟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는 내 숨통을 바짝 쪼였다.

이번 제주여행은 무계획 여행이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에서 난생처음 거대한 설산과 맨발로 마주한 사람처럼 당황스러웠다. 일단 입국장으로 나와 빈 의자에 앉았다. 핸드폰으로 오늘 숙박할 모텔과 내일 한라산 등산을 위한 신청을 마쳤다. 처음부터 계획한 일정이 아닌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는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차가운 공기가 신선한 새벽이다.

제주를 올 때마다 자주 접하지 못했던 맑은 날씨였다. 오전 545, 버스터미널은 이미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시동이 켜진 버스는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아직 동이 트지도 않았는데 나도 첫차를 타고 성판악으로 향했다.

높고 푸른 하늘 속 태양은 태초의 광채를 숲속에 흩뿌리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햇살을 받은 굴거리나무, 때죽나무, 서어나무의 잎사귀들이 살살 부는 바람에 무언가를 연신 속삭이고 있었다. 시커먼 들개가 황급하게 등산로를 벗어나는 모습을 봤고 나는 강력한 햇살을 조금만 손부채로 가리면서 연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감으로 느끼고 눈으로 마주한 한라산 백록담이 현실에서 존재한다는 확신이 섰을 때 난 이미 한라산 정상에 서 있었다. 내 주변은 티끌 하나 없을 정도로 맑았고 푸른 하늘에 붓으로 그려 놓은 듯한 구름과 그 아래 갇혀 선명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서귀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후면 그곳에 내가 있을 것이다.

 

 

 

 

9월의 어느 화창한 아침

오전 825,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서귀포 삼매봉 도서관에 왔다. 이곳은 한라산의 위용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숨은 명소이다. 비가 내리기 전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햇살은 뜨겁게 내리쬈고 공기는 이동을 멈춘 듯 정체되어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세상은 쌓아둔 짚단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도서관은 한산했고 조용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즐기며 책을 읽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조그만 창문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을 바라봤다. 오후에 한차례 소낙비가 내렸다. 하지만 이미 달궈진 세상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일상의 평범한 속에서 존재를 뒤흔드는 건 바로 피부로 느껴지는 차가운 시냇물일지도 모른다. 오후 들어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나는 지친 육신을 이끌고 솜반천을 찾았다. 수용복을 입고 오지 않을 것을 후회하며 바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물이 더위를 밀어내는 순간, 나는 말 없이 그 순간을 즐겼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계획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오늘 서귀포에서 제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만 확정된 상태였다. 오전 8시가 지나 이틀 동안 머물렀던 모텔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어떤 번호의 버스를 탈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먼저 도착하는 버스를 탈 생각이다. 우연히도 201번 동일 주 노선버스가 먼저 도착했다. 오른쪽 창가에 앉아 순식간에 스쳐 지나쳐버리는 제주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동문 시장에서 뿔소라 회를 샀다. 회보다는 뿔소라를 더 좋아하는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소주 한잔을 마시고 꼬들꼬들한 뿔소라를 씹어먹는 입이 그 어느 때보다 호사를 누렸다.

 

 

차량의 타이어 마찰음이 나를 깨웠다.

눈을 떴을 때 새까만 어둠이 나를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둠에 익숙해지자 공포는 연기처럼 사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새벽 435, 어젯밤 에어컨을 끄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새벽의 소음이 바람과 함께 밀려 들어왔다.

오전 7시가 막 지났을 뿐인데 세상은 햇살의 홍수 속에 갇혔다. 어깨에 가방을 메고 왼손에 물병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공항까지 걸었다. 오후에 태안을 가야 해서 서둘러 육지로 돌아가야 했다. 서둘러서 그런지 비행기 탑승까지 시간이 1시간 30분이나 남았다. 면세점을 둘러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탑승시간을 기다렸다. 9월의 제주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