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깬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비가 내린다. 시계를 보니 오전 459분이다. 알람이 울리기 바로 직전이다. 커피를 마시려고 텐트에서 나온다. 버너에 불을 켜고 물을 채운 냄비를 올려놓는다. 물이 끓는 소리가 빗소리에 맞춰 화음을 더한다. 스테인리스 컵에 카누를 쏟고 끓은 물을 붓는다. 진한 커피 향이 수증기로 변해 원두막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세상은 점점 그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산을 쓰고 야영장을 걷는다.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비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내 다리를 적신다. 잔디에서 야영하던 사람들은 어수선하지만 분주하게 텐트를 철수하고 있다. 나는 매표소 앞 의자에 앉아 비가 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본다. ‘아무래도 온종일 배가 내리겠는걸다시 빗속을 걸어 원두막으로 돌아온다. 원두막에 도착했을 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의자에 앉아 가장 편한 자세로 빗소리를 듣는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비는 쉬지 않고 떠들기 시작한다.

 

태양을 볼 수 없는 날이다.

샤워기의 물줄기처럼 광기가 어린 냉기를 품은 비가 내린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세상은 멈춘 것 같지만 실상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비가 끼를 부리기 시작하면 의미 없이 내리는 빗줄기는 없다.

낮술을 먹는다. 할 일이 딱히 없을 때는 술을 먹는 게 최고의 해결책일 수 있다. 술안주는 라면이다. 물이 끓고 있는 냄비에 수프와 면을 넣고 330초를 끓이면 된다. 소주 1 : 맥주 2의 소맥을 스테인리스 컵에 제조한다. 소맥을 마시고 라면 국물을 마신다. 비가 오는 날엔 라면 국물이 최고다. 낮술과 마시며 녹음이 가득한 곶자왈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흐르지 않을 것 같은 하루도 끝내는 저물고 만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며 보낸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분다.

곶자왈을 지나온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 나를 깨운다. 자연이 만들어낸 아침의 싱그러운 합창이 나의 귀를 간지럽힌다. 텐트가 있는 원두막을 밖으로 나오니 곶자왈의 향기가 내 오감을 자극한다.

오두막은 시원하기보다 서늘하다. 서늘함 때문에 스웨터를 입은 야영객들이 부산스럽게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그들 시야에 민소매를 입은 내가 야영 전문가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재빠르게 철수준비를 마친다. 밤새 폭우로 곶자왈을 뒤흔들던 하늘은 회색 구름만이 둥둥 떠 있다.

 

새로운 아침, 새로운 하루다.

이제 야영은 끝났지만 계속 야영을 하는 듯한 잔상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다. 곶자왈에서의 야영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도시에 머무를 때와 다른 방향으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버스를 타는 것으로 이번 야영을 마무리한다. 이제 다시 회색빛으로 물든 소음 가득한 도시로 돌아갈 시간이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4일간의 곶자왈에서의 야영은 내 영혼에 짙은 자국을 남겼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때의 일들이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되새김질하고 싶어서이다.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간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떠나자!

 

 

 

햇살 가득한 아침이다.

음울하고 축축한 날씨가 이어지는 동안 거친 비바람 속에서 지내온 내 몸이 제일 먼저 반응하고 기분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맑은 하늘을 본지도 오래된 듯한 느낌이다. 청명한 하늘은 내 안의 우울한 감정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곶자왈에 들어서면 녹음이 드리워져 있고 위에는 큼지막한 나무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나뭇잎은 바람에 살랑거리고 상쾌한 공기는 내 몸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간다. 우거진 수관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어둠과 균형을 이룬다. 곶자왈에는 난대와 온대 수종이 함께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푸르른 잎을 가득 채운 곶자왈은 어떠한 시련도 이겨내고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산책길에서 곶자왈을 바라보면 싱그러움이 가득한 이끼와 초록의 잎사귀들이 지표를 뒤덮고 있다. 이런 곶자왈을 걷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감각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들을 순식간에 찾아낸다. 곶자왈 어느 지점에서 꽃을 피운 투구꽃을 발견했을 때처럼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한 일상이 작은 즐거움으로 가득 찬다. 즐거움을 양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즐거운 일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아무 볼품없는 도시 거리보다는 곶자왈이 훨씬 흥미 있고 가치 있는 장소이다.

 

여기는 큰지그리오름이다.

넓은 곶자왈 저편에는 완만한 산등성이의 여린 오름 곡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곶자왈은 평평하고 넓은데 오름에 가깝게 다가오니 날이 선 칼날처럼 경사가 급하다. 걷는 속도에 완급조절을 하고 리듬감을 살려 오름에 올라선다.

심장이 요동치고 호흡은 거칠지만, 확 트인 시야에 아늑함을 느낀다. 저 멀리 사람이 길게 엎드려 있는 듯한 한라산의 곡선에선 느슨함을 느낀다. 이곳의 조망은 보는 방향에 따라, 시각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 느낌과 아름다움이 다를 것이다.

가을 햇볕은 따스하다기보단 뜨겁고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는 풀벌레를 유혹이라도 하듯 흐느껴 울어댄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경험한 만큼만 느낄 수 있다.

 

구름이 많이 낀 맑은 날이다.

오름에서 내려와 다시 곶자왈을 되돌아 걸어간다. 휴양림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탄다. 왼쪽 창가 자리에 앉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본다. 한적한 버스는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포장도로를 막힘 없이 내달린다. 순식간에 종점에 도착한다.

서귀포다. 뚜벅뚜벅 인도를 걸어간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을 때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다. 1인용 식탁에 앉은 후 주문을 한다. ‘순대 백반하고 막걸리 주세요늦은 점심을 먹는다. 허기진 위장을 가득 채울 때까지.

저녁 찬거리를 산다.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을 둘러본 후 버스를 타고 다시 야영장으로 간다. 이미 해는 서산으로 기울었다. 잔디밭 야영데크에 자리한 사람들은 이미 불을 밝히고 있다. 야영장 도로에 설치된 조명 빛에 의지한 체 원두막으로 걸어간다. 그곳에는 내 손톱만큼 자란 초승달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밤은 외롭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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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이 남아있는 곶자왈 아침

외곽 길을 따라 활기차게 발걸음을 옮긴다. 이름 모를 풀벌레가 아침을 알리듯 큰 소리로 울어댄다. 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길은 꼬불꼬불 길게 이어져 있고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가 길가에 널브러져 있다. 길 좌우가 숲으로 둘러싸여 길 자체는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야영장 입구로 들어선다. 구름이 집어삼킨 곶자왈 숲을 보며 뚜벅뚜벅 걷는다. 비 때문에 더욱 짙어진 잔디밭과 대조적으로 하늘은 흐릿한 회색 색깔이 펼쳐져 있다. 돌담길을 걷는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길에 달팽이가 우아한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다. ‘산딸나무 열매를 다 먹으려면 하루는 더 걸릴 듯.’

 

비가 그쳤다.

제주의 가을을 만끽하러 버스를 타고 표선해수욕장에 왔다. 검푸른 바다가 보이는 해변을 차분히 걷는다. 빠져들 듯이 바다를 응시하다 정자 한쪽 구석에 앉는다. 하늘은 파란 도화지에 흰 밀가루를 뿌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 시간을 가만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풍향이 바뀌고 있다. 정면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측면에서 불어온다. 비가 그쳐 따가워진 가을 햇살 속으로 바람을 맞으며 걸어 들어간다. 한참을 걸어 마트에 도착한다. 오늘 밤에 먹을 음식물을 산 후 버스를 타고 다시 야영장으로 돌아간다.

 

어제 비가 너무 내렸나?

야영장 원두막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혼자만의 세상, 너무 좋다. 혼자라서 가장 제정신이 들 때니까 쓸쓸하지 않다. 소맥을 마시며 이른 저녁을 먹는다. 고요함을 깨뜨리는 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음뿐이다. 라디오를 끄고 멍하니 주변을 바라본다. 어둠이 살며시 세상을 덮기 시작한다.

인공 빛에 의지한 체 의자에 앉아 있다. 어둠 속의 낯선 곳이라 몸이 떨린다. 그때 노루의 울음소리가 스산하게 들린다.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노루의 울음소리를 따라 외친다. 몇 번이나 울리던 노루의 울음소리가 잠잠해지고 인공 빛 아래 나는 다시 소맥을 마신다. 어둠, 동물 소리, , 나무, 바람, 돌 등 더는 나를 거스르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욕망을 품지 않는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싶지도 않고, 이름만 들어도 귀가 솔깃한 자동차를 운전하고 싶지도 않고, 명품으로 겉모습을 한껏 치장하고 싶지도 않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고 싶지도 않다. 나의 욕망은 그들의 욕망은 다르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달리지 않는다. 솔직히 그들의 욕망 중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거의 없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욕망의 굴레 속에 지지부진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물건중에 신제품은 거의 없다. 옷은 새 옷을 사본지가 10년도 넘었다. 실제로는 옷은 사지만 모두 중고 옷을 산다. 자세히 살펴보면 유일한 신제품은 등산화, 운동화가 전부인 것 같다. 불필요한 지출에 최대한 돈을 최대한 아낀다. 가장 좋아하는 여행을,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인생은 계획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다닌다.

50여 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제주공항은 시끄러운 비행기 엔진 출력 소리만큼이나 거센 비가 워싱턴 야자수 앞 도로를 때리고 있다. 버스를 탔다. 빗속을 달리는 버스 중앙자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차창 밖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16개월 만에 다시 찾은 제주, 그대로인 듯하지만, 왠지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터미널이 가까워지면서 빗줄기는 다소나마 가늘어지고 있다.

같은 제주지만 공항과 터미널은 다른 세계인 듯싶다. 터미널은 텔레비전의 잡다한 소음 소리와 분식집의 어묵 냄새가 선풍기 바람에 뒤섞여 구석구석에 퍼지고 있다. 시장 같은 터미널 풍경 속 구석진 자리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타야 할 버스는 곧 출발할 듯 엔진이 뜨거워지고 있다. ‘, 다른 건 몰라도 이소가스는 꼭 사야 하는데.’

우산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물웅덩이를 피해 조심스럽게 마트까지 걷는다. 맥주 6, 여행용 소주 2, 이소가스를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에코백에 물건을 담고 다시 터미널에 왔다. 배낭에 대충 물건들을 옮겨놓고 터미널 풍경을 바라본다.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45분이 남았다. 난 원래 계획적이고 급한 성격이지만 여행할 때만큼은 행동이 느긋해진다.

 

복잡한 도심을 버스가 부드럽게 비껴간다.

나는 버스 안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세상을 작은 창으로 바라본다. 40여 분 후, 버스가 인적 드문 정류장에 멈춰 서고 큰 버스에서 작은 사람이 우산을 펼치면서 나온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버스는 직선의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왼손으로 우산을 들고, 어깨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작은 사람이 교래자연휴양림 야영장으로 향한다.

체크인하는 동안 비는 더 거세게 내린다. 예약한 B17 오두막은 깊은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왼손으로 우산을 들고, 어깨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작은 사람이 또다시 걷는다. 잔디 야영장 옆 곡선 길을 걷다가 문득 멈춰선다. 길에 물이 고여있다. CROCS를 신은 발을 내려다보고 그대로 물이 가득한 도로를 첨벙첨벙 걷는다. 오두막 몇 개를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무가 우거진 공간에 오두막이 또 있다. 뚜벅뚜벅 그 길을 계속 걷다가 멈춰선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덩그러니 오두막 한 채가 있다.

 

곶자왈은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

어둠을 씻어내는 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밤의 풍경은 조금씩 변해간다. 나는 오두막에 갇힌 채 소주 1 : 맥주 2의 소맥을 탄 스테인리스 잔을 손에 쥐고 멍하니 어둠을 응시하고 있다. 술 한 모금을 마신다. 세상은 멈춘 것 같지만 실상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번개가 치듯 어둠 속에 실오라기 빛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얼마후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비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감추었던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오두막 안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본다. 라디오는 혼자 떠들고 있고 테이블에 술과 안주가 있는데 거의 마시질 않고 있다. 깜깜한 곶자왈에 랜턴을 비추고 퍼붓는 빗줄기만 하염없이 쳐다보다 의자로 돌아가 술을 마신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다. 호우경보 문자가 오고 비가 내릴수록 감성이 더해지니 우중 캠핑을 하러 제주까지 온 보람이 있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 노곤한 몸을 누인다. 두 귀는 라디오 소리에 집중하나 빗소리에 밀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안경을 벗고 무거워진 눈꺼풀을 닫는다. 세상의 소음은 점점 멀어지고 이내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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