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동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공간을 지배하는 계획은 기어이 지친 몸뚱어리를 아무렇게나 삶 속으로 밀어 넣는다.

늦은 일요일 오후 결국 길을 나섰다. 월요일에 보기로 한 벗에게 전화를 해 보지만 대답이 없다. 어느 곳으로 길을 잡아야 하나!

 

식이와 만난 후 또 다른 일행과 약속한 곳으로 차를 몰았다. 조금 늦어지는 일행과 여전히 불통인 벗과 기다림 속에 지쳐가는 커피와 함께 일요일 오후는 나른하다. 나머지 일행이 막 약속 장소에 다다를 무렵 벗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막 지친 몸뚱이를 일으켰단다. 모두 나른한 오후, 그나마 갈 곳이 정해졌으니 다행이려니 하며 단양으로 길을 잡았다.

 

북단양 요금소를 지나 단양 쪽으로 얼마쯤을 가는데 식이가 도담삼봉을 강 건너편 도담마을에서 보자고 한다. 사실 도담삼봉을 처음 보기도 하거니와 강 건넛마을이 궁금하기도 하여 가던 길을 돌려 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시린 겨울날 도담삼봉과 첫 대면을 했다. 뭍에서 섬으로 사는 바위산은 제법 의좋게 서 있기도 하거니와 그 도도함은 자못 큰 산 못지않았다. ‘좀 더 따스한 날에 올걸다만 아쉬움을 도담마을에 묻어두는 것으로 서운함을 대신했다.

단양에 들었다. 얼어붙은 남한강이 먼저 인사를 한다. 단양의 곧추선 산들이야 일찍이 안면을 튼 사이지만 오늘도 그 의연함은 여전하다. 곧이어 벗이 오고 반가움의 표현이 서툰 우리는 그저 손 한번 맞잡은 것으로 일 년여의 세월을 대신했다. 몇 순배 돌아가는 술잔에 녹슨 담장 같은 추억들이 허공으로 유영을 하고, 불콰해진 얼굴 위에 새겨지는 주름들은 술자리만큼 늘어만 간다.

 

십수 년 전 내포문화숲길을 한참 기획하던 때쯤, 내포의 이 선생과의 술자리가 길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묻는다. “내포의 길은 우리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준비하여 별걱정이 없는데, 당신과 나의 길은 도대체 무엇이오?” 잠시 뜸을 들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 지금 이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한 곳을 함께 바라보는 마음이 우리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벗과 함께 길을 물었다.

 

신림면 황둔리에서 감악산으로 들었다. 능선길로 시작되는 첫걸음부터 급경사가 시작되고, 조금 완만하다 싶다가도 금방 곧추선 능선은 발 뒷굽을 챈다. 그렇게 겨우다 올라왔느냐는 환상에 젖어 들 때쯤 나타난 암벽은 낯선 여행자의 기대를 철저히 꺾어 놓았다.

식이가 밥이나 먹고 하잖다. 미리 준비한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마련하고는 살얼음이 가득한 찬물과 함께 억지로 위장에 욱여넣었다.

암벽을 기어오르고, 옆으로 돌아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고, 다시 암벽을 오르고, 다시 돌아가고, 기어이는 감악산 정상에 섰다. 오히려 올라오다가 만난 암벽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훨씬 경쾌할 만큼 정상은 오히려 평범하다. 정상에서 만난 작은 돌탑이 위로한다. ‘그만큼이 삶이지 않은가!’

첫걸음을 내디디고, 시간의 흐름 속에 떠밀려 공간을 유영하는 하루는 그리 보람차거나 희망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하루하루가 삶의 조각이자 좋든 싫든 미래에 그려질 내 인생의 초상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감악산에 그려놓은 한 조각의 삶을 조심조심 여미어 주머니에 넣고는 산에서 내려가며, 오늘도 괜찮았어라고 되뇌어 본다.

 

 

[저자소개]

그는 (주)하늘그린 대표이사 권경익이다.

글은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고, 일부 오타자 등 간단한 편집만을 했을뿐이다.

 

지난 2월 1일 영덕 출장을 그와 함께 다녀왔다.

소주 한잔 하다가 의기투합이 되어 '여행'이란 꼭지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의 글 '그편'은 홀수번호, 나의 글 '식이편'은 짝수번호

격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길 위에 인생이 있다.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비가 온 후 맑게 갠 기분 좋은 아침이다. 세 번째 여권갱신을 한 후 벌써 1년이 지났다. 20, 30대에는 먹고사는 현실적인 경제문제에 부딪혔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해외여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길 위에 인생이 있다. 나에게 길은 여행이다. 내 인생의 최대 승부처인 여행에 이제는 시간제한을 두고 싶지 않다. 아직은 40대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지만, 한국 나이로는 벌써 50대에 접어들었다.

마흔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분기별로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다. 문득 생각나는 곳으로 훌쩍 떠나버린다.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면 더 좋겠지만 직업은 직업일 뿐이다. 직업이 되었을 때 더는 좋아지지 않는다. 현실은 취미로 하는 것과 직업으로 하는 것은 다르다. 난 여전히 여행이 취미다.

 

여행은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남겨둔 것에 대해 고민하지도 미련을 두어서도 안 된다. 여행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면 마음 닿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 여행은 사무치게 외로울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달콤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여행지에서는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닌다. 지나치게 빠른 이동보다는 느린 속도로 공기 온도를 느끼는 그런 여행이 좋다. 속도가 느린 만큼 감성의 온도는 높아진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

아름다운 경치는 내 눈과 적당한 거리에 위치해서 내 눈길을 머물게 하는 풍경이다. 여행의 즐거움은 흘깃 쳐다본 낯선 장소에 상상력을 더하는 것이다. 어느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면서 마음에 평온을 찾는 것이다.

 

여행은 삶의 일부분이다.

 

특별한 목적을 두지 않는다. 여행 그 자체가 좋을 뿐이다. 지금은 어떤 나라나 도시를 마음에 두고 꼼꼼히 여행을 준비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장소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다. 떠나고 싶은 장소가 있고 떠나고 싶은 순간이 오면 어느새 그곳에 내가 가 있다.

여행은 인생의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바람의 물결이 흐른다.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은 맑게 갠다. 나그네처럼 세상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한다. 정처 없이 한 곳에 갔다가 정처 없이 그곳을 떠난다. 거친 세상이지만 절대 서러워하지 않는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을 떠난다. 어떤 경험을 한 여행이든 추억은 남는다. 여행 중에 불쑥 뭔가를 깨닫게 되고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기쁨을 느낀다.

 

여행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두 가지를 통해 이룰 수 있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여행을 통해 능력의 한계를 계속 넓혀 자아실현을 이루고 있다.

약간의 들뜸, 낯섦, 힘듦, 감탄. 여행은 언제나 한밤의 꿈처럼 짧게 느껴지고 풍요롭고 다채롭다. 행복에 대한 시각은 여행을 다닐수록 달라진다. 내 앞에 펼쳐질 여행지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닌 여행 중에 발견되는 것이다.

 

지금도 망설이고 있다면

 

여행을 가느냐, 그냥 이대로 있느냐에 대해 자문해 보라.

뭘 보기 위해 여행을 가느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낯선 곳의 짙은 땅 냄새, 초목 냄새,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고 눈부신 파란 하늘을 보기 위해 떠난다.

여행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여행한 곳은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여행은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처음을 경험하러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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