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일기예보는 적중했다.

새벽 4시쯤 세상을 환하게 만든 번개와 천둥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돌격, 앞으로라는 호령에 맞춰 비는 맹렬하게 세상을 향해서 돌진하는 중이다. 올여름은 아직 태풍은 오지 않았는데 폭우와의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상은 끈적끈적하고 습한 날들의 연속이다.

오후에 폭우가 할퀴고 간 화단을 정리했다.

물에 잠겨 썩은 쪽파를 뽑아내고, 키가 훌쩍 자라고 열매는 영글지 않는 방울토마토를 뽑아버렸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태풍도 안 왔는데 폭우의 위력이 대단하다. 평상시에 좋은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텃밭 겸 화단이기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올여름 폭우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자연에 순응하도록 요구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세상의 질서는 파괴되지 않을까? 위대한 자연 앞에 고개를 숙인다.

 

 

어둠 속에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선잠을 잔 것은 아니지만 몸이 찌뿌둥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묶은 후 화장실을 다녀왔다. 조카가 할머니 드시라고 사 온 순대를 어젯밤 늦게 막걸리와 먹었었다. 막걸리 한 대접이 새벽에 나를 깨운 것이다. 자다 깼는데 또 자기는 뭐하고 해서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을 읽는다. 새벽의 고요함은 책을 읽기에 더없이 좋다.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흐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으므로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한 것이다.”

 

 

열린 창문으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온갖 소음에 사로잡혀 사는 도시의 삶에 문득 찾아온 반가운 소리다.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 오래된 단독주택이다. 텃밭이 있고 화분이 즐비하게 있는 넓은 마당이 있다. 텃밭에는 봄부터 심은 상추, 부추, 열무, 대파, 당근, 가지, 방울토마토, 고추, 쪽파 등이 자라고 있다. 30개가 넘는 화분은 각양각색의 꽃들로 마당은 언제나 녹음이 가득하다.

마당 한쪽에 자리 잡고 서 있는 터줏대감 감나무는 집을 보호하듯 그윽한 시선으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끔 새들도 찾아와 감나무 가지에 앉아 있곤 한다. 회색 도시 속 우리 집은 갈 곳 없는 풀벌레와 새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아늑한 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옛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나귀를 타고 눈 속에 피어난 매화를 찾아다니는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어딘가에 피었을 매화를 찾아 무작정 떠나는 옛 선인들의 운치와 멋을 엿볼 수 있다. 폭우 속에도 꽃은 핀다. 비록 굵은 빗줄기에 맞아 꽃잎이 시들고 강풍에 꽃대가 꺾여도 화분의 선인장 꽃과 란타나 꽃은 피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물을 주면서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겪는 일처럼 폭우 속에 피어난 화분의 꽃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 순간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가지마다 꽃이 피어나는 모습과 색이 다른 꽃을 피우는 아름다움을 비로소 보게 되어 기쁘다.

 

 

뭉게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점심을 먹고 어머니 방 침대 정리를 시작했다. 지금보다 낮은 매트리스로 교환하는 작업이다. 한다고 다짐만 하다 며칠이 지났다. 이불과 베개를 걷어내고 무겁고 높은 매트리스를 들어낸다. 벽과 침대 틈의 먼지를 쓸고 걸레질을 한다. 캠핑용 매트리스를 가져와 공기를 넣고 침대 크기에 맞게 조절한다. 매트 위를 얇은 이불로 덮고 베개를 놓으면 침대 정리가 끝이 난다.

날을 흐리지만 바람은 시원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고 찬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 후 선풍기 바람을 즐기며 달콤한 수박을 먹는다. 막힌 코가 뻥 뚫리듯 수박의 시원함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간다. 이때의 여유로움을 오랫동안 즐긴다. 땀 흘린 뒤의 개운함은 이런 것이다.

 

 

장마전선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인다.

아침에 붉은 고추를 따다가 문득 여름은 다 지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연약해 보이는 가지에 빨갛게 물들어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를 보니 결실의 계절이 완연해졌다. 기나긴 장마 뒤에 한껏 부드러워진 햇살을 받으며 봄의 풋풋함과 여름의 신선함은 가을의 충만함으로 변해가고 있다.

연이은 폭우는 더위를 잊게 했다.

야생화같이 짧은 계절, 순식간에 계절이 변해가고 있다. 생각 없이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다 보니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을 오늘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다. 솔솔 불어오는 아침 바람은 가을임을 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진정, 가을이구나.

 

 

나무는 여름의 무성한 잎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가지가 잎 무게에 휘어질 정도로 수북하게 매달려 있다. 세월이 가면 무성하던 잎들이 맥없이 땅 위로 떨어질 것이다. 올여름엔 태풍이 오지 않았고 폭우 때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아서 잎들은 선명하게 물 들을 것이다.

오늘은 감이 4개나 마당에 떨어졌다. 지붕이나 마당에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내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떨어진 감을 보면 계절의 변화가 실감이 난다. 세월은 속절없이 빨리 흘러간다. 세월은 온다고 안 하고 간다고 표현하는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니 알게 되었다.

때가 되면 잎이 떨어지듯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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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이다.

어느 순간 찾아온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파리를 쫓아내듯 무더위를 손으로 쫓아낼 수는 없다.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에 서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린다. 바람이 불지 않아 연신 손부채를 흔든다. 온몸은 땀범벅이 되지만 시원함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잰걸음으로 인도를 벗어난다.

늘 다니던 도서관 건물에 들어서니 서늘한 바람이 내 몸을 감싼다. 정수기로 가서 시원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이제야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의 열기가 식기 시작한다. 무더운 한낮에는 도서관에서 에어컨 바람 쐬며 책을 읽는다. 한여름에는 이 맛에 도서관을 찾는다.

 

느릅나무 보호수(대관령면 차항2리)
대관령면 바우파머스몰

 

며칠째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다.

하루의 마감은 안경을 벗고 눈을 감는 순간이다. 평소에는 머리가 베개에 닿으면 바로 잠이 든다. 요즘은 열대야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고 있다. 더위를 잠시나마 잊으려고 선풍기 바람에 몸을 의지하지만 헛수고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은 열심히 살지 않은 하루에 대한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곤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세상을 초록빛으로 물들여 놓고 7월은 저물었다.

휴가철의 시작과 함께 건조하고 메마른 날씨가 더욱 더위를 부추기고 있는 8월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아침부터 흐리고 도시를 둘러싼 산자락엔 먹장구름이 가득한데 기다리던 비는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마당에 어머니가 가꾸는 화분의 꽃들은 각양각색으로 싱그럽게 피어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죽음의 살기를 느끼며 여름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계절임을 실감 중이다.

 

능소화
해당화

 

타닥타닥 타닥타닥

비가 온다. 빗방울이 지붕에 부딪히는 소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귓가에 들린다. 8월 장마가 시작되었다. 처마 안쪽에 우두커니 서서 지붕을 타고 대아에 떨어지는 물줄기의 정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비가 만들어낸 소리 이외엔 아무 소리도,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빗소리만이 세상에 가득하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었다.

입추가 지나면서 여름이 가고, 때늦은 폭우가 쏟아지면서 가을이 찾아왔다. 폭우가 동반한 강풍에 아직 익지 못한 감나무 열매가 땅에 내던져졌다. 서럽게 슬픈 모습이고, 허탈하고 허무한 감정이 일었다.

 

비 오는 날 우리집 마당 정경

 

비 오는 거리를 걷는다.

나뭇가지가 속절없이 흔들리면 내 마음도 같이 흔들거린다. 빗속을 걸으며 사진을 찍고 바람의 떨림에 두둥실 떠다니는 뭉게구름처럼 미지의 곳을 여행하고 다닌다. 방랑의 길은 언제나 즐겁고 소중한 경험이다.

비가 내린 후부터 시간마다 바람의 냄새가 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아래로 떨어진다. 흙이 젖고, 도로가 젖고, 세상이 촉촉해지는 정경이 색다르게 보인다. 문득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 비 오는 거리의 꿉꿉함보다 커피숍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껴본다. 창밖의 비를 보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비 오는 거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늘이 온통 짙은 회색빛이다.

먹장구름에서 시작된 비가 내 발끝을 스치고 땅에 떨어진다. 일주일이나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열대야로 못 자고 깨어 있던 밤의 시간만큼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세상은 얼마 동안 목욕을 하지 않은 걸까?

비가 온 뒤 후텁지근한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지듯 세상의 모든 묵은 때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있다. 금방 세상이 깨끗할 것 같았는데 비로 씻어내면 낼수록 세상이라는 욕조는 더욱 더러워지고 있다. 언제쯤 그 목욕이 끝날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세상이 다시 화사한 빛을 발산할 때까지 우리는 굳건히 버텨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비가 갠 후 세상 참 깨끗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울진 망양정
울진 망양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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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의 전원을 켜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대학교 1학년 때 만나 지금은 술친구가 된 K형의 전화였다. 벌써 32년 된 인연 사이에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내일과 모레 일정이 어떻게 되나?”

특별한 것은 없는데요.”

그럼 울진 놀러 가자.”

좋아요.”

K형은 내가 저녁을 먹을 때쯤 전화를 종종 한다.

전화를 끊고 보니 부재중 전화가 이미 와 있었다. 늘 그렇지만 저녁을 먹느라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울진 일정은 이렇게 잡혔다.

 

울진 행곡리 처진소나무

 

아침 820, K형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침은 비교적 선선했지만, 자전거를 20분 넘게 타고 온 나는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벌써 더위를 느끼면 안 되는데 예년보다 빨리 날씨가 더워지는 것 같았다.

우리에겐 루틴 같은 것이 있다.

내가 승용차에 가방을 넣어두면 K형은 편의점으로 나는 커피숍으로 간다. K형은 담배와 물을 사고 나는 샷이 추가된 아메리카노를 산다. 아메리카노는 기온에 따라 HOT 또는 ICE를 선택한다. 이번엔 당연히 ICE를 선택했다. 모든 것이 준비된 후 K형과 나는 승용차를 타고 울진을 향해 출발했다.

 

울진 두천리 모내기한 논

 

3시간 20분의 긴 이동이 시작되었다.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답답하고 에어컨을 켜면 약간 쌀쌀함을 느꼈다. 날씨만큼 목요일 아침의 고속도로는 꽉 막히지도 그렇다고 뻥 뚫리지도 않았다. 앞차의 속도에 맞춰 뒤차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울진은 경상북도에 있다.

울진에 올 때마다 강원도에 왔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제, 양양, 평창, 춘천, 화천 등 강원도를 가끔 돌아다니다 보니 울진도 당연히 강원도라 생각한 것이다. 고속도로 졸음쉼터에서 화장실을 다녀온 것 빼고는 쉬지 않고 계속 운전을 했다. 그러고 보니 1년 만에 다시 울진에 왔다.

 

하원2교
울진종합버스터미널

 

울진에서 짬뽕을 먹었다.

K형이 월요일에 가봤다는 기절초뽕에 들어갔다. 이름만큼 특별하지 않은 여느 중국집 실내여서 약간 실망했었다. K형이 추천한 짬뽕은 숙주나물이 고명으로 가득 올려진 짬뽕이었다. 면과 숙주를 같이 먹으면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좋았다. 국물은 빨갛지만 맵지 않고 깔끔하며 시원했다.

기절초뽕에 한 번 더 갔다.

울진 산야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예상하지 못한 일로 일정이 하루 늘어났다. 이튿날 저녁에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짬뽕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소맥을 말아 목구멍으로 넘겼다. 막소주만 고집하는 K형은 술이 고팠는지 구포식 소맥이라며 직접 소맥을 말아 나에게 건넸다. 단무지를 안주 삼아 한잔, 양파를 안주 삼아 또 한잔, 그렇게 4잔쯤 마셨을 때 짬뽕과 탕수육이 나왔다.

 

울진마집 - 기절초뽕

 

승용차는 불영계곡 도로를 달렸다.

몇 년 전에 왔었던 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야속한 세월만 흘렀다. 나는 산을 바라보면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무작정 산에 올랐다. 보통은 등산로를 따라 오르지만, 오늘은 차를 타고 임도를 따라 높은 곳에 올랐다.

처음 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풍경을 한 번이라도 구경해본 사람이라면 또다시 산을 찾게 된다. 풍경 사워, 아름다운 풍경이 온몸과 정신까지도 말게 씻어줬다. 눈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다. 전후좌우에 드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바람이 와락 내게 안겼다.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 오랫동안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이런 포옹도 좋네라고 생각했다.

 

불영계곡 - 하원리, 아미사 입구
대흥리 임도

 

산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세상이 갑자기 낯설고 이상해졌다.

지난겨울, 산불은 매일 번져 나갔다. 소방헬기로 물을 뿌리고, 소방차로 물을 뿌리고, 수많은 사람이 투입되어 잔불을 제거했다. 산불은 바람에 의해 퍼져서 그 면적을 넓혀 나갔고 오래도록 타다가 비에 의해 완전히 소멸하였다.

산불피해지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다.

산불이라는 화마를 만나 죽을 고비를 겪었을 뿐이다. 그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 예전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 , , , 도로, 강 등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공허했다.

 

금강소나무숲길(보부상길 입구-두천리)
두천리 마을 산불피해지
두천리 산불발화지점
대형산불 실화자 찾는 현수막

 

봄이 되기까지 산불의 흔적은 처참했다.

울진의 산은 초록의 천위에 실수로 먹물을 부어 놓은 것 같았다. 산은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검게 탄 잿더미였다. 산불의 흉터는 먹색으로 남았지만 봄이 되면서 그 흉터는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큰 산불을 겪고도 산은 생명의 씨앗을 틔웠다.

상처가 흉터가 되고 새살이 돋듯 잿더미 속에서도 희망의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산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더디 간다는 것은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때처럼 긴 하루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호월1리

 

어둠은 무언가에 쫓기듯 물러났다.

새벽 5시가 넘으면 어느새 해가 떠올랐다. 모텔 창문으로 환해진 울진 시내를 내다봤다. 바람은 가로수를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지만 시원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더위와 싸워야 하는 힘겨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오늘은 얼마나 걸어야 할까?

불영계곡 아미사에서 산에 들어섰다. 나는 가보지 않은 산을 돌아다닌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걷는 길을 기획하고 조사에 참여하는 일만으로도 희열을 만끽하고 있다.

능선을 따라 오르고 또 올랐다.

깊은 산속 이름 없는 고개의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 소리를 들었다. 청량함이 가득한 산골 바람은 더위를 식혀 주었다. 소나무 우듬지를 흔들리게 만드는 그 바람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바다에서 높이 물결치는 파도 소리 같은 허공의 바람 소리였다.

 

아미사 옆 숲길
초롱꽃
꼬리진달래
소나무
울진군 금남면 수곡리
울진군 금남면 수곡리

 

깊은 계곡 바위에 서 있었다.

여러 갈래로 흐르는 물처럼 내 마음도 여러 갈래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물이 흐르지 않아 속살을 드러낸 바닥은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듯 보였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맑고 투명했으며 수면 아래로 군데군데 두껍게 낙엽이 쌓여 있었다. 흐름이 느린 물줄기에는 사분음표 모양의 올챙이가 불안정한 상태로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계곡의 물은 아래로 흘러갔다.

비가 오지 않아 유량은 적었지만, 낙차 큰 암반 지형에선 파도처럼 걷잡을 수 없는 물이 쏟아져 내렸다. 하염없이 물이 불어나지도 않고 물살도 세지 않아서 장마철을 제외하면 계곡물을 이용하기엔 안전했다. 계곡을 건너고 또 건넜다. 일 년 중 가장 긴장감 넘치고 재미있었다. 이태백이 술에 취하듯 나는 계곡에 취했다.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보부천길
울진군 하원면 소광리 보부천길
울진군 하원면 소광리 보부천길

 

맑았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드득, 후드득.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내 빗줄기로 변했다. 급한 대로 숲속 나무 밑으로 가서 넓은 잎사귀로 머리를 가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엷은 구름이 퍼져 있을 뿐 대체로 맑았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구나!’ 비는 곧 멈췄고 구름을 걷어낸 태양이 숲의 가지 틈새로 빛을 쏟아냈다.

들꽃처럼 희망의 꽃을 피우자.

화마가 덮친 후 예전 생활로 돌아오기까지는 꽤 시일은 걸릴 것이다. 화마가 덮친 후 새싹이 움트고 꽃을 피우기까지 들꽃은 시련을 견디어 꽃을 피웠다. 무수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 비록 삶은 고되겠지만 상황은 호전될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하원리 불영계곡
하원리 불영계곡
하원리 불영계곡
백선
함박꽃나무
붓꽃

오후가 되자 뜨거운 열기가 몰려왔다.

오전의 햇빛이 냉장고 속 상추처럼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은 것이라면 오후의 햇빛은 젖은 수건을 골판지같이 딱딱하게 바싹 말린 것이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녹아내린 듯한 뜨거운 날씨였다.

나는 방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았다.

주말이지만 밖에도 나가지 않고 텔레비전을 켰다. 프로야구 중계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한화이글스가 9연패의 사슬을 끊고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떠들어 댔다. 텔레비전의 소음과 달리 집은 고요하고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 햇볕을 쬐며 길을 걸었다.

여행이라도 온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속 걸었다. 낯선 장소를 지나온 내 자취는 벌써 햇빛에 말라버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푸르렀던 하늘빛은 시간이 지나면서 엷은 주황색에서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갔다. 도로의 이팝나무는 바람에 흔들려 흰 꽃을 떨구는데 18개월을 길러온 내 머리카락은 전혀 흩날리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인도를 걸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냄새가 났다. 요란스럽게 질주하는 차량의 움직임과 함께 강력한 돌풍이 내 머리칼을 날려버렸다. 후텁지근하고 기름 냄새나는 바람이었다.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청년기를 지나 이제 막 장년기에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처럼 오십 대가 되어도 여전히 혼자 여행을 다니려고 노력 중이다. 어제의 다음 날인 오늘은 내가 여행을 떠나려고 생각한 미지의 내일이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대도시를 벗어나 적당한 소음만이 존재하는 평화로운 장소이다. 그 장소가 농촌이든, 산이든, 섬이든 상관없다. 내가 늘 접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 그런 곳에서는 호흡도, 걸음도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내 속에 감춰져 있던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나는 일출보다 석양을 좋아한다.

새벽의 어둠이 밝으므로 변하는 시간보다 저녁의 어스름이 어둠으로 변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새벽은 모든 것이 잠들어 있어 고요하지만, 저녁은 모든 것에 생명력이 깃들어 있어 시끌벅적하다. 24시간이 지났다. 나는 일출과 석양을 같은 공간에서 맞이했다.

머무름은 완벽했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내 몸 크기만큼의 여백이 생겼다. 그 여백에 내 흔적이 남아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려고 늘 노력 중이다. 오늘도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낯선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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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가파도에 간 적이 있다.

청보리의 흔들림으로 바람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어디에 서 있든 바람이 속삭였다. ‘네 인생을 나에게 맡겨볼래.’ 나는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청보리는 자신의 짧은 인생을 바람에 맡겼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청보리 인생, 바람이 사라질 때까지 그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햇살이 넓은 청보리밭을 비췄다.

바람을 타고 청보리가 외치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나는 아우성을 잘 들으려고 주의를 집중했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해야 했는데.’

 

제주 가파도

 

지금 모습이 초라하다고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된다.

남과 비교하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내 인생을 확신하게 되면 그 길로 가자는 결심을 할 수 있다.

나의 젊은 날을 회상하면 하루하루가 힘겹고 괴로운 일상이었다.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인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씁쓸한 일상이 토대가 되어 지금의 내 인생이 되었다. 마음의 응어리가 사라진 후에 어른이 되었고 비로소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인생은 왜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누구나 고민과 번뇌 속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인생은 마음을 찾는 과정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짧은 인생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내가 걸어가야 할 인생은 내적 자신과의 진실한 교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내가 진심으로 결정한 일은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어야 한다.

나는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인생을 써 내려가고 있다.

스스로 생각한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로 이룬 것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자유의지를 믿으며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내 인생의 설계자는 나이기 때문이다.

 

제주 함덕서우봉해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매달린다. 그런 순간의 행복 따위는 인생의 행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순간의 행복은 단지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루를 소중히 여기면 인생이 소중해진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노력하면 최소한 후회는 하지 않는다. 잠에서 깨면 굳은 결심을 해 보자. 굳은 결심이 후회라는 적을 물리친다. 인생의 행복은 주거나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화천 딴산 자작나무

 

인간관계는 줄다리기다.

한쪽이 힘이 세서 일방적으로 끌거나 끌리기만 한다면 그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이 유지되어야 인간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똑똑한 관계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관계는 내가 선택하고 상대가 선택한 인생의 순간을 함께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크게 가치를 느끼는 것을 내줄 때 인간관계는 최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화천 딴산 출렁다리

 

매 순간의 선택이 내 인생을 좌우한다.

긴 인생의 여정에는 언제 닥칠지 모를 무수한 상황이 발생한다. 언제나 유연성을 가지고 과감한 궤도수정이 필요하다. 목표를 설정하고 실천 계획을 세워야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실망감을 느끼기보다는 소신껏 목표지점까지 걸어야 한다.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산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마음의 평화로움이 행복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곧 행복이다.

 

제주 위미 동백나무군락지

 

내가 좋아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그 누구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에 대해 늘 생각한다. 뭐든지 내가 편하고 좋아하면 그만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소신에 따라 당당하게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좋거나 싫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아간다. 내 가치관은 내가 지켜야 한다. 감정표현을 두려워하면 자신의 삶을 지키지 못한다.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맞춰 살고 있다. 남을 의식하기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좋아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을 때만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지만 싫어하는 것은 일절 하지 않는다.

 

금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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