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동굴 같았다. 2층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쓰고 핸드폰 불빛에 의지한 체 주위를 살폈다. 열린 커튼 사이로 거리의 불빛이 반짝였다. 오전 4시도 안 된 시각이지만 오늘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최대한 소음을 줄이면서 2층 침대에서 내려와다. 칫솔과 수건을 가지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잔잔한 호수에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지만, 호스텔의 다인실을 이용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된다.
4시 45분 호스텔을 나왔다. 지난 3일 동안 골목골목 돌아다녀서 구글맵을 자주 확인하지 않고도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길눈이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히 밝다는 점은 낯선 곳을 여행 다닐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내가 느낀 파리의 새벽 거리는 언제나 조용했고 한편으로는 분주했다. 거리에 버려진 지난 하루의 쓰레기를 치우느라 청소부들이 만들어낸 소음을 제외하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하다. 물론 거리의 술 취한 사람이나 노숙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보다 그 수를 따지면 훨씬 많다. 그들은 해코지는 하지 않고 종종 구걸만 하는데, 단호히 거절하면 그뿐이다.
내가 매일 같이 걸어 다니는 것은 나만의 여행 스타일이기도 하다. 머무는 낯선 곳을 더욱 자세히 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서 몽파르나스 기차역에 왔다. 도중에 멋진 석조 분수대도 보고 뤽상부르 궁과 공원도 지났다. 날이 밝으면서 거리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몽파르나스 역 인근에는 유퀴즈에 출연했던 한국인 빵집도 볼 수 있었다. 워낙 이른 시간이라 영업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소소한 것들이 모여 내 여행이 된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샀다. 영어가 전혀 안 통했는데 특별한 문제 없이 커피를 받았다. 다만 컵에 내 성 MOON(달)이 아닌 NOON(정오)으로 표시했을 뿐이다. 출발 20분을 남기고 8번 플랫폼에서 기차를 탔다. 예약한 2층 테이블 좌석에 앉아 커피와 함께 크루아상을 먹었다. 프랑스에서 내 평생의 바게트와 크루아상은 다 먹는 것 같다.
오전 6시 41분, 약간의 흔들림은 기차가 출발한다는 신호였다. 옆자리에 사람이 타지 않아 편안하게 배낭을 놓고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빠르게 속력을 올린 기차는 예정시간보다 4분 일찍 렌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는 꼭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오줌이 마렵지 않아도 다녀오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우습고 슬픈 현실이지만 유럽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쩔 수 없다.
기차역 바로 옆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오전 8시 45분 몽생미셸행 Keolis 버스를 탔다. 월요일이지만 버스는 만원이었다. 그만큼 모두에게 가보고 싶은 장소일 것이다.
1시간 10분이 지나 몽생미셸에 도착했다. 여기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되는데 대기 줄이 엄청 길었다. 셔틀버스가 자주 다니는 것도 아닌데 기다리다 지칠 것 같아 그냥 걷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걸어서 몽생미셸로 향했다.
이곳은 파리 서북쪽이고 위도도 살짝 낮아서 그런지 기온이 온화했다.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때론 따갑게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모자와 선크림을 챙기지 않으면 꼭 이렇게 날씨가 좋다. 저 멀리 보이는 몽생미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함을 품고 있었다. 그저 이곳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최고의 선물인 셈이다. 숲을 보려면 숲을 벗어나야 하듯 몽생미셸을 보려면 멀리서 봐야 한다. 멀리서 바라볼 때 다양한 각도로 몽생미셸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마을 입구까지 왔다. 몽생미셸은 프랑스 서북쪽 노르망디 해안에 있으며 거대한 모래 둑으로 둘러싸여 있다가 만조일 때 섬이 된다. 노르망디 주교였던 성 오베르가 꿈속에 나타난 성 미카엘 대천사의 지시로 교회당을 세운 것이 시초였다. 이후 본당과 절벽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지금은 파리에 이어 프랑스 제2의 관광지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많은 여행객이 뒤섞여 있는 좁은 길을 벗어나 계단을 올랐다. 모든 길을 한 번쯤은 다 걸어볼 생각이지만 일단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장소부터 걸어 다녔다.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내려다보이는 모든 것들이 개미보다 작게 보였고 모래 둑이 얼마나 드넓게 펼쳐져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을 걷다 보면 이곳의 위대함을 더 느끼게 된다. 현장학습 나온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체험 활동을 직접 목격하는 동안 이런 것이 진정한 산교육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규모 단위로 이동하면서 몽생미셸에 대한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보고 질문지의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진지하게 토론을 했다. 심지어는 물 빠진 모래 둑으로 걸어나가 여러 가지 체험을 서슴없이 즐기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 그 어디에도 손과 발을 씻을 어떤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러워진 손과 발을 대충 닦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도 어릴 적엔 그렇게 놀았었는데 왜 지금은 저렇게 못 하는지….
몽생미셸 뒤쪽의 그늘지고 한적한 바위에서 맥주를 마시며 크루아상을 먹었다. 여전히 모래 둑에는 체험하는 다른 학생들이 있었고 몽생미셸을 한 바퀴 돌아보려는 관광객의 발걸음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어차피 버스는 오후 5시에나 있다. 서두른다고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양을 놓아 기르는 초원을 따라 오전에 지나가다 본 야영장에 갔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이곳에서 캠핑하면서 여유롭게 몽생미셸의 야경을 즐기고 싶다. 바쁘게 이동하는 여행보다 호젓하게 머물 수 있는 그런 곳이 몽생미셸 여기가 아닌가 싶다.
여행자 센터 화장실이 무료였다. 맥주를 마셔서 오줌이 마려웠는데 천만다행이다.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차량 행렬을 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6월 6일 나치 돌일 치하의 노르망디에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으로 프랑스를 해방하고 유럽을 탈환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작전을 기념하는 행렬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현충일과 같은 날이다.
시간이 흘러 시원한 바람이 불고 따가운 햇볕도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오후 5시 버스를 타고 렌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 고장의 유명 빵집에서 바게트도 하나 샀다. 오후 7시 48분 파리 몽파르나스행 기차를 타니 집에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후 9시 49분 도착이라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파리 야경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루 사이에 기온이 완전히 달라졌다. 민소매를 입고 있어도 춥지 않았고 조금 걷다 보면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어두워진 파리에서 센강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유람선과 화려한 에펠탑의 야경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긴 여정에 지칠 수 있지만, 오히려 삶의 활력을 느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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