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나는 카키색 바지에 검은 스웨터를 입고 검은색 목도리를 한 후 아이보리색 점퍼를 입었다. 발목까지 오는 운동화를 신고 검은 장갑을 낀 체 미세먼지가 하늘을 여러 번 덧칠한 희끄무레한 하늘을 올려다본 후 길을 걸었다.
내가 걷는 왕복 8차선 도로는 지하터널을 빠져나온 차량이 학교 앞 횡단보도 앞에서 속력을 줄였고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엄마 손에 이끌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길가에 아무렇게 놓인 공유 전동킥보드는 이용자의 비양심만큼 녹슬어 있었다. 오늘 한낮의 기온이 영상 7℃까지 올라가는 겨울치고는 따뜻한 1월의 한낮이다.
스물다섯 살 여름
나의 첫 해외여행으로 한 달 동안 베트남을 다녀왔다. 그 이후 싱가포르, 인도, 네팔,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태국, 라오스, 홍콩, 마카오, 러시아를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10개월 동안 다녀왔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낯선 나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도시를 봤고 농촌을 봤고 산을 봤고 강과 바다를 봤다. 밤이 되면 지는 해의 자취를 따라 하늘을 봤고 달과 별을 봤다. 하지만 결국 내가 본 것은 낯선 사람들 속에 머물고 있던 나 자신이었다.
김연수 작가의 ‘스무살’이라는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남들이 흘리는 눈물보다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위 문장을 각색하여 내 남은 인생을 표현해 봤다.
똑같은 365일이지만 작년보다 올해가, 똑같은 24시간이지만 어제보다 오늘이 더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오십 살이 지나고 나면 오십 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오십 살 이후가 오는 것이다.
나는 더는 스무 살이 아니다. 그보다 두 배 반이나 더 나이를 먹었다. 스무 살 때의 내 모습에서 이미 많이 변환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십 살, 내 나이다.
생물학적 오십은 작년 가을이었지만 어쨌든 2023년 1월 5일 나는 정확히 만 오십 살이 되었다. 100세 달리기에서 이제 반환점에 도달했는데 나머지 50년을 더 열심히 달려야 하나 아니면 다른 길로 빠질까 고민 중이다.
처음의 40년은 뭣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삼십 대까지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지만 고단한 현실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다. 사십 대까지는 이기지도 못하는 현실과 치고받고 싸우느라 나를 돌아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될 대로 되겠지’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나에게 사십 살 이전은 그런 시절이었다.
사십 대에 들어선 후 최근까지 무척 계획적인 삶을 살았다. 뭐든지 계획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룬 성과도 여럿 있었지만, 삶이 조금씩 지쳐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나는 상상을 한다.
오십 살의 여섯 번째 달에는 자동차를 타고 동유럽을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름 오십 년을 그럭저럭 잘 살았으니까 6월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스물다섯 살에 베트남을 다녀온 후 죽기 전에 전 세계를 여행해야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웠었다. 돈 때문에 내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여행에 필요한 충분한 현금을 확보하느라 아주 계획적으로 돈을 모았다. 나에게 시간은 언제나 충분하니 망설이지 말고 떠나자!
후쿠오카 여행[우동 타이라, 골목길, 나카 강, 톈진 중앙공원, 아크로스 후쿠오카, 캐널시티 하카타, 야나가바시 시장]
흐린 날이었다.
바람이 불고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지는 쌀쌀한 날이었다.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바다처럼 넓게 깔려있었다. 나는 하카타역에서 JR 가고시마 본선 전철을 타고 후쿠마역으로 향했다. 전철 안에는 출근하는 회사원, 등교하는 학생 등 각자의 용무를 위해 전철을 탄 사람들이 핸드폰을 보거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지하철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출입문 쪽에 서 있었다.
출입문이 열리면 정류장에 제일 먼저 내릴 수 있는 곳이었다. 전철의 속도만큼 외부 풍경이 창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후쿠오카의 시골 풍경이지만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이었다. 나는 후쿠마역에 도착할 때까지 창밖을 응시하며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후쿠마역을 나와 도로를 건넜다.
버스를 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에 그냥 걷기로 했다. 이곳도 희끄무레한 구름이 가득한 날씨였다. 해는 구름 뒤에 숨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직선으로 뻗은 도로에는 가로수가 내가 갈 곳을 안내하고 있었다. 가로수 잎들은 미미한 바람에도 하나둘 춤을 추기 시작했다. 12월의 잔뜩 찌푸린 날씨는 이 거리에서 다 볼 수 있었다.
나를 급하게 만든 건 아랫배의 통증이었다.
점점 주기가 짧아지는 통증을 겨우 참아가며 잰걸음으로 어느 주차장 화장실에 도착했다. 5분이 지나 다시 화장실을 나왔을 때는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하늘은 조금 전에 보던 그 하늘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좀 더 환해진 듯했다. 도로 위 교통표지판을 보고 미야지다케 신사(宮地嶽神社)에 거의 다 왔음을 알아차렸다.
도로를 건너 우회전을 했다.
도리이를 지나 상점이 끝나는 지점에서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가파르게 보였지만 막상 올라가 보니 많은 힘이 들지는 않았다. 신사 뒤쪽은 산이고 앞쪽은 미야지하마 해변(Miyajihama Beach)이 있는 바다가 있었다. 그 바다가 바로 현해탄이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일직선의 길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신사에서 모래가 아름다운 해변까지는 15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계절상 빛의 길은 볼 수 없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 오른쪽 공간에 일몰을 찍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사진을 보니 10월과 2월에 얼마나 멋진 일몰 풍경을 볼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난 한참을 그곳에 서서 바다까지 길게 뻗은 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사 입구는 한산했다.
신사에 들어가기 전 일본인들은 손을 씻고 입을 헹궜다. 신사 참배에 앞서 마음가짐을 다 잡는 일종의 의식이다.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 신사는 한산했고 침묵이 흘렀다. 아예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삼삼오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신사 안은 어떠한 소음도 용납되지 않는 곳처럼 고요했다.
미야지다케 신사에는 일본 제일의 대주 연줄, 대북, 대령이 있었다. 이 중 대주 연줄은 지름 2.6m, 길이 11m, 무게 3톤이나 나갔다. 어마어마한 대주 연줄은 매년 12월에 새것으로 바꾼다고 한다.
원숭이를 발견했다.
신사에서 나와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데 찻집 앞 공터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조련사의 말 한마디에 원숭이는 편안한 자세로 무언가를 응시하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오히려 원숭이는 모여드는 사람들을 못 본 척 곁눈질로 보는 듯했다. 우리가 원숭이를 신기하게 바라보듯이 원숭이도 사람들을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보고 있었다.
후쿠마역을 향해 걸었다.
도로 좌우의 전봇대의 전깃줄이 도로를 따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한번 걸었던 길이라 어느새 익숙한 거리처럼 느껴졌다. 후쿠마역에서 전차를 타고 하카타역으로 돌아왔다.
마치 멀리 떠났다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사람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월요일의 하카타역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구글 지도를 검색해 보고 Kaldi Coffee Farm에서 드립 커피를 샀다.
어느새 12시가 넘었다.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지 더 배가 고팠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갑자기 떠오르는 음식이 있었다.
몸이 원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로 했다.
이 순간 내 몸이 원하는 것은 몸을 따뜻하게 해줄 뜨거운 국물이었다. 따뜻한 국물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갔다. 안 가본 곳이기에 일말의 의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 몸이 원하는 한 우동 타이라에서 우동을 맛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줄 서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식당 밖으로 줄을 선 사람이 5명이라서 빨리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줄을 섰다. 키와미야 함바그 이후 무언가를 먹기 위해 줄을 선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두 명씩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줄이 줄어드는 것 같았지만 내 뒤로 줄은 더 길어졌다. 식당 안에도 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기운이 조금 빠졌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초만원이었다. 이런 상황을 밖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줄을 선 상태에서 메뉴판을 받았다.
일본어와 숫자로 표기된 메뉴판을 보고도 절대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우동 먹으로 왔으니까….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recommend menu, please.’라고 말했다. 그런데 영어를 잘 하는 여사장이 어떤 메뉴를 알려줬다. 미소를 띠며 속사포처럼 영어로 설명을 계속했다. ‘OK, I’ll take it.‘
칸막이 너머 주방은 분주했다.
유독 흰색 메리야스의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저씨는 면만 뽑았다. 뽑고, 또 뽑고…. 정말 쉬지 않고 면을 뽑았다. 이렇게 뽑은 면을 삶은 후 그릇에 담아 육수를 붓고 그 위에 고명을 얹어서 나왔다. 주방과 홀의 손발이 척척 맞았다. 괜히 대박집이겠는가
줄을 선 후 12분 만에 자리에 앉았다.
우동은 15분이 지난 후에 내 앞에 놓였다. 식당 안의 훈훈한 공기처럼 뜨거운 국물과 진한 육수 맛의 우동을 보니 '내가 참 선택을 잘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우동 이름은 모르겠고 고명으로 소고기, 튀김, 파가 올려져 있었다.
그릇을 들고 육수를 마셨다.
육수는 짜지 않고 깔끔하면서 담백했다. 칼칼하게 먹으려고 고춧가루를 조금씩 골고루 뿌렸다. 우동 면발은 중간 크기 면인데 부드러우면서도 쫄깃쫄깃한 것이 씹는 식감마저 아주 좋았다. ‘후루룩후루룩’ 기다리는 시간보다 먹는 시간이 훨씬 짧았지만 저렴한 가격에 이렇게 좋은 맛과 질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찾고 싶은 식당이다.
하늘이 한층 낮아졌다.
비가 내리는 오후가 찾아왔다. 차량과 우산을 든 행인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도로 건너에 SUN ROAD라는 아케이드 시장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었다. 녹색 신호등이 불을 밝히자 잊고 있던 뭔가가 생각난 듯 빗속을 뛰어 아케이드로 들어섰다.
가볍게 흩날리는 겨울비조차도 따뜻하고 고요했다.
시간이 지나 비가 멈춘 흐린 날이지만 경쾌하고 즐거운 노랫소리로 가득했다. 나의 여행방식과 어울려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골목길을 연출했다. 어떤 건물도, 어떤 상점도, 어떤 주차장도, 어떤 전봇대도 그 골목을 다니는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던 사람처럼 익숙한 것을 대하듯 나는 골목을 걸었다. 골목과 골목을 걷는 사람들이 내 여행방식을 대변해 주는 듯 그렇게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톈진 중앙공원 나무 벤치에 앉았다.
꼼짝 안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를 했다. 그곳에서 아크로스 후쿠오카 건물이 잘 보였다.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이 즐비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만든 자연에서도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듯했다. 얼마 전 산 아사히 맥주가 알코올 제로의 무알코올 맥주였다. 무열량의 다이어트 콜라가 판매되고, 카페인 없는 무카페인 커피가 판매되듯이 아크로스 후쿠오카 건물은 자연미 없는 인공 자연을, 미적인 자연만을 구축해 놓았다. 인공적인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해가 지면서 빗줄기가 굵어졌다.
낙숫물이 흘러내리듯 지붕에서 처마를 흘러 땅으로 떨어졌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나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낮의 밝음은 어느새 뭉개지듯 번져 밤의 어둠으로 변했다. 거리의 조명이 하나둘씩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유독 캐널시티 하카타의 조명만이 뭉개지듯 번져 더욱 빛을 발산했다.
시간은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규슈 아니 후쿠오카에서의 마지막 밤이지만 우리들의 즐거운 시간은 영원히 멈추지 않았다. 야나가바시 시장에서 참치, 고래 등 4종류의 회를 샀고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맥주도 샀다. 우리는 호텔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술 한잔 기울이며 상대를 바라보고 말에 솔직한 마음을 담아 이번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어둠을 틈타 비는 세상의 묵은 때를 씻어버렸다. 호텔 방에선 빗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창문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희미한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나는 침대 이불에서 나와 창문 밖을 바라봤다. 하늘에는 어떻게 회색 구름이 새긴 것인지 하늘이 우울해 보였다.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새로 내린 비 위에 내 발자국이 찍혔다. 선명했던 발자국은 찰나의 순간에 번져 바닥에서 사라졌다. 나는 생각했다. 비에 대해 그만 무심해지자. 우리는 봄비 같은 겨울비를 맞으며 하카타역으로 행했다. 일요일 아침, 하카타 거리는 청소 차량만이 분주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내가 지나간 다음에도…. 계속 그렇게….
하카타에서 특급열차를 탔다.
고쿠라에서 JR 열차로 갈아타고 모지코까지 왔다. 모지코역을 등지고 왼쪽 도로를 건너 바닷가 쪽으로 걷다 보니 모지항 여객선 터미널이 보였다. 모지코역을 나와 잰걸음으로 모지항 승선장까지 이동했다. 모지항의 넓은 공터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요금은 편도 대인 400엔
승선권을 뽑아 배를 타러 승선장에 가니 해협이 눈에 들어왔다. 기타큐슈 모지항에서 시모노세키 가라토까지는 날씨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보통 5~1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비가 온 후 바다는 청색이 짙어져 검게 보였다. 정박해 있던 배는 검정 물결의 일렁거림에 크고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검은 바다를 겨울빛으로 물들였다.
북동쪽으로는 혼슈와 규슈를 연결하는 간몬대교(関門橋)가 해협 위를 가로질러 허공에 떠 있었다. 간몬대교 그림자가 더해져 바다는 원래 색보다 더 짙어졌고 그것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검정 바다는 윤기가 넘쳤다.
잔잔한 파도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배의 갑판에 올라 시모노세키를 바라봤다. 검은 바다가 마치 현해탄 같았다. 배의 진행 방향과 속도에 따라 바람이 바뀌었다. 바다 위에는 긴 흰 물거품이 남아 배가 지나온 흔적이 그어졌다. 나는 시모노세키에 그렇게 도착했다.
가라토시장(唐戸市場)과 마주했다.
시장 안을 비추는 조명은 인파에 뭉개져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시끄러움, 혹은 뒤엉킨 혼란과 흥분감 사이의 들뜬 기분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시장은 서늘했고 비린내가 가득 퍼져 있었다. 그나마 천장이 높아 비린내 농도가 심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초밥을 사기 위해 인파 속에 있던 나는 파도가 앞의 파도를 밀어내듯 뒷사람들의 걸음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초밥을 사러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시장 안을 표류하던 나는 인적이 그나마 적은 상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게 덮밥을 발견하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걸 ‘꿩 먹고 알 먹고’라고 표현한다. 시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흥분상태에서 성게 덮밥을 순식간에 먹었다.
망설임은 초밥을 살 기회를 빼앗아간다.
다시 초밥을 사기 위해 혼돈의 시장에 들어섰다. 진열된 초밥이 먹고 싶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야 한다. 우리는 우럭, 도미, 장어 초밥과 짱뚱어가 들어간 된장국을 샀다. 이번에도 바로 시장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적은 바다가 산책로로 가서 바다를 배경으로 초밥을 먹었다. 바다에서 막 잡아 온 생선으로 초밥을 만든 것처럼 신선했다. 초밥의 생선이 일반 초밥에 비하면 두 배나 컸으며 그만큼 밥도 많았다. 초밥 한 개면 입안이 꽉 찼다. 우리는 초밥 먹기에 마음을 다했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초밥 중에 신선도, 맛,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초밥이었다.
‘최고예요.’
12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다.
평일처럼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용무나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늦잠을 자거나 침대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하루다. 내가 있는 곳이 낯선 여행지라도 일요일에 내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배가 부르니 걷기에 더욱 좋은 날이었다
비는 그쳤고 바람이 불지 않아 춥지 않았다. 하늘에 회색 구름이 가득했지만, 바다색만큼 짙지는 않았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은 나에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라토시장에서 간몬터널 입구까지는 1.4km를 걸어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갔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도 해저 터널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단, 엔진을 끈 상태로 밀어서 통행해야 했다.
해저 터널을 걷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도 한국도 아니고 일본에서 혼슈와 규슈를 잇는 1958년에 개통된 간몬 해저 터널을 걸었다. 해수면 58m의 아래의 터널은 혼슈에서 규슈 방향으로 내리막임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긴 줄을 팽팽히 잡았다가 살짝 힘을 푼 것처럼 터널은 완만한 곡선을 유지하고 있다. 혼슈의 시모노세키에서 규슈의 모지코까지 이어진 약 780m의 거리였다. 지금 걷는 이 해저 터널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멈추지 않고 걷다 보면 환한 불빛이 나를 반겨줬다.
해저 터널을 나왔다.
메카리 신사가 있는 해안은 물살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쳤다. 수심이 낮고 해류가 빠르게 흐르며 어종이 다양하여 어업이 발달하였다. 더 넓은 바다로 흘러가는 바닷물이 다 똑같아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물살의 세기가 천차만별이다. 거친 물살을 피해 배들은 모지코가 아니라 시모노세키 쪽으로 왕래를 했다. 작은 배들은 물살에 쉽게 흔들리니까 빠르게 지나가려고 엔진의 출력을 높였다.
모지코까지 가는 길은 한적한 거리였다.
메카리 신사를 지나 노픽 광장으로 거기서 노포크 히로바역까지 이어졌다. 철로를 따라 벚나무가 서 있는 해안 길을 가다 보면 항구를 만나게 된다. 새벽에 낚시 배를 타고 바다를 다녀온 낚시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아 온 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오늘도 많이 걸었다. 친구 K는 발바닥이 아픈 듯 신발을 벗고 쉬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 의자에서 블루윙모지가 가장 잘 보였다. 부산의 영도대교처럼 다리가 올라갈 때를 기다리며 광장과 다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큰 나무 아래에서 만담하는 이야기가 마이크를 통해 크게 들렸고, 캐릭터 탈을 쓴 남자가 아이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고, 일정한 목적 없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다.
약간 멍한 상태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피곤함을 느꼈는데 나중에는 몸이 편안해졌다. 오후 1시가 되자 블루윙모지가 분주해졌고 이내 건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다리는 오른쪽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그 속도가 달팽이가 길을 건너가듯 너무 느렸다. 왼쪽까지 다 올가을 때는 10여 분이 훌쩍 지난 뒤였다. 마지막으로 배만 지나가면 되는데….이렇게 이벤트는 완성되었다.잠시 후 다리는 올라간 속도만큼 천천히 내려왔고 사람들은 다시 블루윙모지를 건넜다.
기차 시간까지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벼룩시장의 흰 천막은 은은한 조명을 밝혔지만, 하늘은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다. 눈앞에는 똑같은 천막들이 일렬종대나 횡대로 펼쳐져 있었다. 아무리 벼룩시장이지만 복고풍 항구와 어울리지 않은 현대적인 분위기가 어색했다. 액세서리, 의류, 화분, 생활용품, 음식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었다. 천막마다 자신들의 물건들을 전시해 놓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벼룩시장 천막 사이를 걸었다.
옷깃을 여미고 에코백을 왼쪽 어깨에 둘러멨다. 두 발은 인파 속을 걷고 있었지만 두 눈은 온갖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바삐 움직였다. 이곳에서의 돈은 그저 필요한 것을 얻는데 필요한 교환수단에 불과했다.
오후 새참을 먹기 위해 오뎅 야마구치(おでんの山口)에 갔다.
이 식당은 모지코역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있으며 모지코와 어울리는 복고풍 감성의 식당이었다. 오후 2시 30분이 넘었지만, 식당에 손님이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한참을 쭈뼛거리다 과감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할머니는 오뎅을 만들고 있었다.
오뎅정식 550엔
메뉴판의 검정색은 메뉴이고 빨간색은 가격이었다. 다행히 사진이 있는 메뉴판이 있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을 했다. 근데, 할머니가 뭐라고 계속 말씀하시는데 일본어를 못하는 내가 알아들을 방법은 없었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을 본 할머니도 이내 포기했는지 그냥 자리를 뜨셨다. 5분쯤 지났을 때 주문한 오뎅정식이 나왔다.
정말로 사진과 똑같았다.
할머니가 나에게 하려던 말을 나중에 알았다. 내가 오뎅 4가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말은 통하지 않고 눈만 껌뻑껌뻑하니까 할머니가 사진과 똑같이 가져다주신 거였다. 한국에서는 어묵 하면 어묵만 생각하는데 일본은 달걀, 무, 감자, 꼬치(돼지고기) 등이 들어간 오뎅요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국처럼 국물을 마실 수 없어 아쉬웠다.
오뎅은 한국보다는 짠데 항구 특유의 육체 노동자들을 위한 전통 음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음식이 특별히 맛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할아버지, 할머니가 운영하는 노포(老鋪)는 틀림없었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아침에 이곳에 올 때의 역순으로 다시 하카타로 돌아가야 했다. 기차 안에는 아침보다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하카타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27분이었다. 오후 5시가 넘으면 해는 서쪽 하늘로 넘어가서 잠들었다. 하카타역의 크리스마스 마켓 축제의 조명은 오늘도 변함없이 불을 밝히고 사람들은 흥분된 상태로 그 불빛을 바라보거나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후쿠오카에서 벌써 5일째 밤이었다.
이제는 밤거리가 익숙해졌다. 저녁 먹을 식당을 찾으면서 가지 않은 골목을 걸었다. 어둠 속에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부산정(釜山亭).’ 고민의 흔적인 미간의 깊은 주름이 식당을 발견한 뒤 축구경기장의 푸른 잔디처럼 평평하게 바뀌었다. 허기짐의 빈자리는 발바닥의 통증과 배고픔의 ‘꼬르륵’ 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간판을 보고 한국식당임을 눈치챘다.
어떤 메뉴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입구에 갔다가 메뉴에 삼겹살을 보는 순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들어갔다. 예약하지 않았지만, 일찍 식당에 와서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추천메뉴인 무한리필 삼겹살을 선택했다. ‘소주와 맥주도 주세요.’ 오랜만에 한국말로 편안하게 주문을 할 수 있어 좋았다.
1인 2800엔.
삼겹살 무한리필 가격이다. 한국보다 무한리필 가격은 비쌌지만, 김치 모둠, 나물 모둠, 오징어젓, 잡채, 샐러드, 파채, 쌈장, 마늘, 상추 등 너무 푸짐했고 무한리필까지 해 주었다. 일하시는 외국인 종업원이 삼겹살을 가져다주면서 김치를 불판에 올렸다. '이러면 다 타는데….' 한국인인 내가 가만있을 수 없어 김치를 제거하고 고기 기름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김치를 올렸다.
10분쯤 그렇게 고기를 구웠다.
겉이 타지 않게 삼겹살을 잘 뒤집으면서 먹기 좋을 정도로 구운 삼겹살을 한입 크기로 잘랐다. 원래 기름기 많은 구운 음식은 잘 안 먹는 친구인데 이곳에서의 친구 K는 젓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배가 고팠구먼.’ 첫판을 이렇게 순식간에 다 먹었다. 삼겹살 리필을 요청하면서 막간을 이용하여 주꾸미까지 구워 먹었다.
외국인 종업원의 배달 사고인지 리필된 삼겹살은 처음의 3배만큼이나 많았다. 아무 말이 없으니 다시 삼겹살을 구웠다. 손바닥에 상추를 놓고 잘 구워진 삼겹살 2점을 올렸다. 마늘을 쌈장에 찍어 삼겹살 위에 살포시 내려놓고 파채와 고사리로 장식을 마무리했다. 쌈을 잘 접어 손에 들고 술잔을 살짝 부딪친 후 원샷을 했다. 입안에 알코올이 다 사라지기 전에 쌈을 넣고 맛을 음미했다.
삼겹살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밤새 켜져 있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처럼 배가 꺼지지 않는 규슈여행의 5일째 밤도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