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행 슬리핑 기차, 3층 침대

 

오늘도 알람이 울리기 전에 어김없이 일어났다.

요람 속의 아기처럼 기차의 주기적인 흔들림이 편안했다. 좁은 3층 침대라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뭐하고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다 와이파이가 된다는 것을 알고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인스타에 동영상을 올리고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다. 한국처럼 와이파이 속도가 빠르지 않지만, 인터넷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객차 통로

 

 

 

 

화장실을 다녀왔다.

3층 침대에서 내려온 후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객차 통로의 통창으로 밖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왠지 익숙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고 드넓게 펼쳐진 평야도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녹색의 카펫이 세상에 깔렸고 청명한 날씨에 두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 도시락

 

아침 도시락이 배달되었다.

부다페스트에 도착 1시간 전이었다. 어제저녁에 주문한 아메리카노, 오렌지 주스, , 버터, 잼 등이 들어있는 도시락을 승무원이 가져다주었다. 2층 침대를 들어 올리고 3명이 나란히 1층 침대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역시 아침에 커피를 마셔야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제대로 들었다.

 

부다페스트 Nyugati palyaudvar역
도심거리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에서 도나우강까지 직선으로 뻗은 아름다운 거리
세체니 다리와 부다 왕궁

 

오늘은 일요일이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후 알았다. 거리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차량도 거의 없었다. 방향감각을 익히려고 구글맵을 켜고 이동을 시작했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까지 걸었는데 인도가 자전거도로와 구분되어 있었다. 높지 않은 건물 사이에는 노면전차를 위한 시설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유로를 헝가리 화폐로 환전했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웅장했고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장엄했다. 드넓은 광장에 서서 한 바퀴 돌아보면 그 분위기에 바로 숙연해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에서 도나우강까지 직선으로 뻗은 아름다운 거리를 걸었다. 도나우강에서는 왼편으로 세체니 다리가 보였고 강 건너 언덕에는 부다 왕궁과 어부의 요새가 보였다.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까지 강을 따라 걸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에게 신발을 벗게 하고 총살한 곳에 신발 60켤레의 조형물이 있었다.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칠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조그마한 조형물이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잊지 말고 꼭 기억하자!

 

세체니 다리
자유의 여신상
겔라트 힐에서 바라본 부다페스트

 

부다 지역으로 갈 수 없었다.

세체니 다리로 건너려고 했는데 공사 중이었다. 에르제베트 다리까지 내려가서 부다 지역으로 넘어갔다. 일요일이라 도심에는 작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었다. 치타텔라를 가려고 계단을 올랐다. 배낭을 메고 지그재그 오르막길을 계속 올랐다. 정상에 오른 순간 철망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부다페스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지만 공사 중이라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자유의 동상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자유의 다리가 있는 겔라트(Gellert) 온천으로 하산을 했다.

 

Pizza Manufaktura

 

Great Market Hall은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숙소 가는 길에 Pizza Manufaktura에서 피자를 먹었다. 피자를 먹는 동안 소낙비가 내렸다. 열대지방의 소나기처럼 맑은 날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나도 스콜(Squall)처럼 피자를 강렬하게 먹어치우고 체크인을 하러 예약한 호스텔로 갔다.

 

Maverick Urban Lodge

 

샤워하니 살 것 같았다.

야간 슬리핑 기차를 탔고, 배낭을 메고 부다페스트 도심에서 치타텔라까지 한나절을 걸어 다녔다. 땀으로 범벅된 옷을 벗어 던지고 끈적한 몸을 말끔하게 씻어냈다. 오후 5시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야경은 꼭 볼 것이다.

 

부다 왕궁
부다 왕궁에서 바라본 풍경

 

반바지와 반팔을 입고 밖에 나왔다.

바람이 불어 꽤 쌀쌀해진 저녁인데 내 복장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나는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 이 복장이 제일 편안했다. 걷는 건 나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호스텔이 있는 페스트 지역에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 부다 왕궁까지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었다. 성은 곳곳이 공사 중이어서 성이라는 느낌보단 공사장에 관광하러 온 기분이 들었다. 거대한 투룰(Turul) 청동상만이 이곳이 왕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부다 왕궁은 세체니 다리와 성 이슈트반 대성당을 조망할 수 있는 야경명소다.

 

마차슈 성당
어부의 요새

 

어부의 요새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먼저 마주한 마차슈 성당은 후기 고딕 스타일 성당으로 대칭이 아니라는 점이 특이했다. 고깔 모양의 7개 탑이 있는 어부의 요새는 도나우강과 페스트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 불 수 있는 곳으로 헝가리 땅에 처음 정착한 7개 부족을 상징한다.

 

어부의 요새안을 걷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야경은 그리 쉽게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시간을 보내려고 성벽 주위를 걸었다. 사람들이 사는 삶의 현장이기에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와 함께 산책하거나, 의자에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의 삶 속에 내가 무작정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받아주었다.

 

어부의 요새
국회의사당 야경
에르제베트 다리

 

어스름이 깔릴 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곧 야경이 펼쳐진다는 건데, 어느 자리에 있든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오후 9시쯤 가스등에 불이 들어오고 어둠이 세상을 조금씩 집어삼킬 때 내가 보고 싶었던 야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유람선이 도나우강을 떠다니고 웅장한 국회의사당 건물은 불빛 충만한 모습을 드러냈다.

부다 지역에서 바라본 페스트 지역의 야경은 화려하진 않지만, 핵심이 있어 더 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부다페스트의 밤거리는 옹색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호스텔로 돌아와 맥주를 마신 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의 첫날 밤이자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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