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까지 마신 포도주 때문에 술이 깨지 않았다. 새벽에 침대 밑으로 핸드폰이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벽 구석으로 떨어진 핸드폰을 손으로 끄집어내려고 한참을 부스럭거렸다. 공용객실(Dormitory)이라 불을 켤 수가 없었다. 도저히 꺼낼 수가 없어 손전등을 찾으려고 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열려있던 가방에서 포도주병이 떨어져 깨졌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깨진 병 조각을 치웠고 바닥을 걸레로 깨끗하게 닦았다. 핸드폰이 다시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한편의 코미디 영화를 나 홀로 찍었다. 흰 구름이 산을 집어삼켰다. 비가 내린 그린델발트의 새벽은 맑은 낮보다 주위 색감이 한층 짙어졌다. 주변 풍경을 다시 한번 두 눈에 넘치도록 담은 뒤 터미널로 향했다. 오늘도 오전..
여유로운 아침을 맞았다. 일어나는 시간은 비슷했지만, 오늘 일정이 크게 힘들지 않기에 산책도 하고 조식도 느긋하게 먹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숙박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 떠나고 또 새롭게 찾아들었다. 이제는 그런 감정에 무뎌질 수 있지만, 사람인지라 익숙한 사람들이 사라지면 섭섭한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오늘 아침에 텍사스 출신의 두 젊은이가 떠났다. 언어가 달라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사흘 동안 한방에서 함께 잤다는 것만으로 아쉬운 감정이 일었다. 다른 사람들이 조식을 먹는 동안 나는 등산을 준비했다.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내 계획보다 일찍 산을 올랐다. 그린델발트 풍경은 이제 익숙했다. 마을 길을 걷는 것이 산을 오르는 것보다 힘들게 느껴졌다. 워낙 급경사지에 형성된 마을이라 ..
체르마트 가는 날이 밝았다. 새벽에 홀로 깨어 아이거 북벽을 바라봤다. 거대한 암벽의 웅장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도 첫 기차를 타기 위해 아침 도시락을 받아들고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내의 모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조용한 터미널에 나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여행용 가방을 끌고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사흘 동안 잠깐씩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 정도만 나눈 30대 한국인 처자였다. 오늘 취리히에서 런던으로 간다고 했다. 새벽 첫 기차라서 탑승객도 없고 둘이 멋쩍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체이고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나이 또래에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때론 가볍게 때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차가 스피치(Spiez)에 도착한 후..
알람이 울렸다. 이런…. 언제나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깼는데, 재빨리 알람 해제를 한 후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서둘러 객실 밖으로 나와 양치와 세수를 했다. 롯지나 호스텔 공용침실(Dormitory)의 단점은 이런 점일 것이다. 이른 새벽에 움직여야 할 때 소란스러운 부스럭거림이 언제나 발생한다. 미리 부탁한 아침 도시락을 받고 롯지를 나섰다. 오늘도 고요함이 내 혈관을 통해 몸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린델발트 터미널에서 6시 20분 첫 기차를 탔다. 엊그저께 올라왔던 그 길을 기차는 다시 내려갔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다시 루체른행 기차로 갈아탔다. 오른쪽 차창으로 보이는 에메랄드빛 브리엔츠 호수에 낮게 깔린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차가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풍경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
스위스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아이거 북벽이 바라다보이는 그린델발트 아이거 롯지에서 새벽에 눈을 떴다. 조용한 새벽을 혼자 다 즐기는 동안 조식 시간이 되었다. 뷔페식 조식은 빵, 샐러드, 치즈, 햄, 시리얼, 과일, 음료, 커피 등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은 후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까지 즐겼다. 오전 7시 30분경 피르스트(First)를 향해 출발했다. 그린델발트까지는 마을 길을 지나는 오르막이었다. 길가의 식수대에서 물을 담은 후 도로의 인도를 따라 계속 걸었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졌다. 거리가 너무 조용해서 건물에 사람이 사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린델발트 시내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사람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정표를 따라 골목으로 들..
뜨거운 햇살이 객실의 통창으로 침입했다. 어제저녁에 미리 짐을 챙겨놔서 아침에는 전혀 부산스럽지 않았다. 여느 때보다 여유롭게 샤워를 했고 오전 7시가 지났을 때 3일간 머물렀던 호스텔을 나와 잘츠부르크 중앙역에 왔다. 오늘은 오스트리아에서 스위스로 가는 날이다. 커피와 빵을 샀고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플랫폼 의자에 앉아 먹었다. 4분 연착된 기차를 탔을 때는 많은 사람이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10분이 지났을 뿐인데 기차는 독일을 지나고 있었다. 로밍 문자가 아니었다면 오스트리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새 한 시간가량을 독일을 지나 다시 오스트리아로 들어섰다. 기차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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